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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2 | 특집 [가족 그리고 일]
가족 경영으로 일어선 어머니 김옥래, 아들 두병훈
부모님 농작물로 떡 만드는 군산 <더 미들래>
송미애(2016-02-15 09:36:41)

 

 

꾸떡(구워먹는 떡)으로 독보적인 소비층을 확보하고 있는 <더 미들래>의 영업부 팀장 두병훈씨(30). 어머니 김옥래씨(51)가 사장으로 있는 이 업체가 지금의 모습으로 자리잡기 까지 10여년의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던 만큼, 그의 20대도 파란만장하게 흘러갔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고 했던가. 17세 나이에 떠났던 미국유학 시절부터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그동안 그에게는 '일반적'이거나 '안정적'이었던 순간이 없었던 것 같다.
"학위, 자격증, 영어 점수 등의 스펙은 스펙일 뿐이잖아요. 그것이 자신의 능력이 되기 위해서는 일터에서의 실제 경험이 필요한 것 같아요. 준비는 되어있지 않으면서 처음부터 대우받는 곳에서만 일하려고 하는 것은 자신에게 꼭 필요한 기회를 스스로 차단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해요."
어머니 김옥래씨가 운영하고 있었던 (구)심은콩 식품은 2015년 4월 병훈씨가 직접 지은 '더 미들래'로 이름을 바꾸었다. 군산 '들'녘에서 재배한 쌀(米)로 믿을 수 있는 먹거리를 만든다는 뜻의 '더 미들래'는 현재 12명의 종업원이 함께 하고 있는 '가족경영체'이다.

아버지 두금래씨(57세)는 1차 쌀, 콩, 보리의 재배를 맡고 2차 농산물 가공 및 생산은 어머니 김옥래씨가, 3차 판매 및 영업은 아들인 두병훈씨가 맡고 있다. 꾸떡 뿐 아니라 함초 된장 등의 가공품들을 온라인을 통해 활발하게 판매 하고 있고 오프라인 매장과 체험장을 운영하는 등 병훈씨가 맡고 있는 3차 산업의 비중은 아주 큰 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병훈씨는 여전히 할아버지 때부터 이어온 '농사'를 함께 하고 있다.
 "92년, 제가 6살 때, 부모님은 할아버지가 계셨던 군산 옥구읍으로 귀농을 하셨어요. 어릴 때부터 농사일을 도우면서 자랐죠. 중학교 때 반복되는 일상이 싫어 한국을 떠났었지만, 미국에서도 결국 가고 싶었던 대학은 '농업경영'을 배울 수 있는 곳이었어요. 결국은 경제적 여건이 허락하지 않아 고등학교 4년만 마치고 이 곳으로 돌아오게 되었지만, 전 농사를 짓는 부모님이 항상 자랑스러웠어요."
부모님의 농사에 대한 자부심은 항상 병훈씨 마음 속에 있었지만, 갓 미국유학을 마치고 온 젊은 청년에게는 이 일이 부끄럽게 느껴지는 때도 있었다. 그는 이 때 자신의 모습을 '유학병'에 걸렸었다고 표현한다. 
"새벽에 일어나 농사일을 하는 것은 차라리 괜찮았어요. 하지만 어머니가 만든 물건을 시장에 나가 파는 일은 정말 고역이었어요"
유학병에 걸려있던 병훈씨를 치료해 주셨던 분은, 바로 옆 자리에서 사과를 팔던 아주머니였다. 핸드폰만 만지작거리던 병훈씨에게 사과를 집어 던지며 함께 던져 주신 그 치료약. "유학 다녀왔으면 다야? 부모가 힘들게 일해서 공부시켜 놨더니 된장 파는 거 하나 못해!"
그 덕에 정신을 차리고 보니 할 수 있는 일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당장에 돈이 필요했으므로 피아노 학원 강사, 영어 보조강사, 호프집 서빙, 대리 운전 등 갖가지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부모님의 일을 적극적으로 돕기 시작했다.

이후 한국농수산대학교에 입학, 부모님의 일을 도와가며 과정을 성실히 수료한 병훈씨는 졸업 후 영농후계자로 선정되었고, 그 때 즈음 어머니는 농업기술센터의 지원을 받아 쌀가공육성사업을 시작했다. 직접 농사지은 쌀로 가래떡을 만들어 판매하기 시작했지만 비수기가 긴데다 판로가 충분치 않아 영농자금의 이자를 갚는 것조차 어려웠다. 
차별화 되고, 비수기가 없는 농산물 상품을 찾아야만 했다. 그렇게 생각해 낸 것이 '구워먹는 떡'. 이미 가래떡을 뽑아내는 장비를 가지고 있었지만 터지지 않고, 속 앙금이 균일하게 들어가는 떡을 개발해 내는 일은 쉽지가 않았다.
 "직접 농사지은 햅쌀과 치즈도 자연치즈만 사용하니 재료에 대해선 자신이 있었지만, 짧지 않은 길이, 구워도 옆구리가 터지지 않게 만드는 일이 쉽지 않았어요. 2천만원어치가 거의 전량 반품되었던 때도 있었죠. 제대로 만들어 내기까지 버려진 쌀이 2톤도 넘을 거에요." 
7번을 치대서 만들어낸 정성 가득한 떡이라서일까. 더 미들래의 떡을 먹어본 사람들은 하나같이 잘 굳지 않는 떡의 부드러움에 놀란다. 병훈씨는 "사업은 운인 것 같다"고 하지만 문제점이 해결될 때까지 떡 전문가 10명을 찾아다녔던 그의 끈기를 '운'이라고만 말할 수는 없다.

 

아직 공개하지 않은 많은 종류의 떡들이 때를 기다리고 있고, 동생 두병준씨와 함께 맥주도 연구 중이다. 농사일부터, 상품 개발, 홍보 및 영업까지 거의 모든 과정에 걸쳐 일하고 있는 그가 받는 월급은 0원. 월급이 아닌 용돈을 받는 '신세'지만 이것이야말로 흔들리지 않는 후계자의 특권이다. 부모님 입장에서는 떠나지 않을 든든한 인재를 철저하게 교육하고 있는 셈이고, 병훈씨 입장에서는 부모님의 사업체를 통해 자신의 삶 자체에 투자를 하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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