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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8 | 칼럼·시평 [문화칼럼]
이제 내 몸에서도 찐 옥수수 냄새가 난다
박성우(2016-08-16 09:07:59)

푹푹 찌는 여름 오후, 비가 친다. 마당가 옥수수 이파리가 휘청인다. 바짝 질겨진 가죽나무 그늘에 들어 낮잠을 자던 고양이가 벌떡 일어나 비의 신발장에서 구두를 꺼내 신고 지붕으로 뛰어오른다. 쿵쿵 쿵쿵 쿠구궁 쿵쿵, 셔플 댄스를 춘다. 일을 잠시 멈춘 나는 어깨를 흔들흔들, 빗소리 볼륨을 한껏 높인다. 숨을 잠깐 고르고 지붕까지 타고 올라간 담쟁이 커튼을 걷는다. 창틀에 가만히 기대어 앉아 눈을 까막까막, 옥수수 푸른 빗소리를 몸 안으로 들인다. 두릅나무 밭을 지나온 우체부 오토바이가 대문 없는 우리 집 마당으로 든다. 우편물을 들고 처마 아래로 드는 우체부에게서 찐 옥수수 냄새가 난다.


새벽 다섯 시에야 겨우 원고를 마감하고 눈을 붙이던 며칠 전 아침이었다. 쾅쾅, 날이 훤헌디 여직 안 인났능가? 강주할매가 제사를 지냈다며 제사떡 봉다리를 주고 가셨다. 비몽사몽 여섯 시, 제사 지냈다더니 웬 백설기? 봉다리를 열어보던 나는 곧바로 떨어져 누웠다. 쾅쾅쾅, 하이고 어쩐디야. 하튼, 늘그먼 주거야 혀! 한 삼십 분이나 지났을까. 다시 오신 강주할매는 빨랫비누 봉다리 가져가고 진짜 제사떡 봉다리 주고 가셨다.


다시 쾅쾅, 여직 자는가 어쩌는가? 생전 안 오시던 종기양반이었다. 흠흠 급헝게 근디, 한 오마넌 있능가? 아침 일곱 시 조금 넘은 시간, 삼만 원밖에 없어 삼만 원을 드렸다. 다시 쾅쾅쾅, 어이 쪼깐 문 좀 열어봐잉! 아침 아홉 시가 조금 못 된 시간, 팽나무집 종기양반이 다시 오셨다. 잃어버린 줄로만 알았던 지갑을 어찌어찌하여 찾았다며 싱글벙글 웃으셨다. 하이고 미안혀서 워쩍 혀! 미안허기는 뭐시 미안혀요, 꿔갔던 삼만 원 돌려주고 가셨다. 누우면 깨우고 누우면 깨우고 누우면 깨우고 누우면 깨우고 했던 잠이 아예 나가, 붕 뜬 하루를 붕붕 떠서 보냈다.


좀 외롭고 싶었으나 초여름부터는 새 이웃이 생겼다. 며칠 집을 비운 새에 꾀꼬리가 텃밭 옆 느티나무로 이사 와있었다. 마당 이팝나무를 찍고 제집으로 들 때도 은행나무와 회화나무 사이 하늘을 날 때도 몸을 싸고 있는 노란색이 참외처럼 선명했다. 꾀꼬리는 맑고 높은음을 가진 새이니 참외 씻는 소리처럼 시원시원한 새소리를 여름 내내 실컷 들을 수 있겠구나 싶었다.


하지만 그것은 내 일방적인 생각이었을 뿐이었는가. 꾀꼬리는 내가 게으름을 좀 피운다 싶으면 뺀질이 성 뺀질이 성 빼빼 뺀질이 성우, 울어댔다. 풀 좀 뽑다 감나무 밑에 들어 쉬려 할 때도 책을 보다 낮잠을 좀 자려 할 때도 꾀꼬리는 내 일거수일투족을 보고 있는 듯 뺀질이 성 뺀질이 성 빼빼 뺀질이 성우, 떠들어댔다.


앞마당 화살나무에 앉아서도 수돗가 옆 늙은 산벚나무에 붙었다 가면서도 뺀질이 성 뺀질이 성 빼빼 뺀질이 성우, 약 올려 댔다. 참견 말고 니 일이나 하셔! 헛웃음 참으며 마당으로 나가 한 소리 단단히 해대도 꾀꼬리는 신경 쓰지 않고 가장 해맑고 높은음으로 뺀질이 성 뺀질이 성 빼빼 뺀질이 성우, 뺀질뺀질한 나를 뺀질거리지 못하게 만들고야 말았다.


지난주에는 십여 년 동안 쌓은 돌탑을 헐었다. 마당 귀퉁이에 달팽이처럼 둥글게 감아두었던 돌을 빙 돌아가며 풀어내 계곡 쪽, 집 가장자리로 길게 당겨갔다. 허물어낸 돌을 길게 늘어트려 축대 겸 돌담으로 다시 차곡차곡 높였다. 골짝 물소리는 쉬이 돌돌 넘어오고 골짝 물은 어지간하면 못 넘어오게 큰 돌은 양 바깥으로 괴어 올리고 자잘한 돌은 안쪽에 촘촘 채워 넣었다.


혹여 큰비 칠 때 내려올지 모를 큰물이 부득불, 우리 집에 들렀다 가야겠다고 막무가내로 밀고 들어오려 하면 그러지 말고 자네 갈 길 가시게나, 등 토닥여 돌려보낼 만큼 돌을 얹었다. 어쩐지 허전하고 서운키는 하더라도 정 없이 아주 매정해 보이지는 않게, 무거운 생각들은 계곡 아래로 굴리고 가뿐한 생각들은 계곡 위로 올리면서 흥얼흥얼 끙끙 돌을 헐어 돌을 쌓았다.


시골 생활에서 울력이 빠지면 뭔가 허전하다. 아아, 잘 드키지요? 마을 길 풀 깎기 울력이 있으니 남자들은 빠짐없이 예초기를 들고 나오라는 이장님 방송이 나왔다. 아침 여섯 시가 못 되었으나 그새 왱왱 왱왱왱 웽웽 웽웽웽, 예초기 돌아가는 소리 요란했다. 여자들은 빼고 남자들만 울력을 하는 날, 애초부터 예초기도 없고 예초기를 할 줄도 모르는 나는 여느 때처럼 빗자루 들고 나갔다.


두어 해 전까지만 해도 나처럼 빗자루를 들고 나오는 노인이 두셋은 더 있었다. 하지만 이젠 먼저 가거나 아주 쇠하여, 이 마을에 남은 빗자루꾼은 나 하나다. 핫따 일찍 나오셌네요잉, 인사를 건네면 마을 어른들은 고개를 끄덕끄덕 씨익, 아 안 나와도 된디 머덜라고 나오고 근디야! 돌리던 예초기 씽씽 돌려 풀을 깎는다. 등허리 축축하게 길을 쓸고 집으로 들다 보니 안 쳐도 되는 우리 집 마당 앞 풀을 누군가가 참 깨끗하게도 싹싹, 쳐두었다. 씻으려고 웃통 벗으니 내 몸에서도 찐 옥수수 냄새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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