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킵 네비게이션


분야별보기

트위터

페이스북

2017.2 | 칼럼·시평 [문화칼럼]
손으로 일구는 지역의 미래
최공호(2017-03-07 10:59:08)

문명의 성찰이 절실하다
매년 1월이면 미국의 핵과학자회보(BAS)에서 지구 종말을 예고하는 둠스데이(Doomsday) 시간을 발표한다. 위험한 기술로 스스로의 목줄을 죄어온 우리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나 되는 지를 일깨우려는 뜻이다. 불과 2년 전에 남은 시간이 겨우 5분전이었다. 비록 상징적이라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기기에는 상황이 갈수록 꼬이고 있으며, 해결의 실마리를 찾기 어렵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핵무기 경쟁은 갈수록 뜨거운데 반해 온실가스 감축 노력은 진전이 없으며, 위협적인 신무기 개발경쟁도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서둘러 대안을 찾지 않으면 우려가 현실이 될 가능성이 점점 높아질 뿐이다. 
남태평양의 뉴칼레도니아 섬에 우연히 형성된 맹그로브 숲의 하트모양을 두고 자연이 우리에게 던지는 경고의 시그널로 여겨 '문명의 시계'라 부르는 이들의 심경도 이해할만 하다. 위기가 목까지 차오른 느낌을 구체적으로 지각하는 이들이 적지 않은 것은 일말의 희망이다. '양적 유토피아, 질적 디스토피아' 바닷물을 들이키듯 물질의 소비가 갈증을 증폭시킬 뿐이라는 것도 모르는 이가 없다. 그럼에도 브레이크 없이 출시된 자동차 같은 물질의 관성은 가속페달을 밟는데 급급하다.

비행기가 아무리 편리하기로 이웃집 가면서 탈 수는 없다. 첨단의 성취도 필요하지 않은 곳이 있게 마련이다. 과유불급이라는 옛말이 그르지 않다. 최근에는 스마트폰 쓰기를 거부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고 한다. SNS가 소통의 상징이지만, 실제로는 관계가 멀어지고 단절되는 역설을 자각하면서부터다. 
매듭을 풀기가 간단치 않아서 고민일 뿐, 답은 의외로 쉽고 단순하다. 지속가능성을 저해할 문명의 부정적 요소를 걷어내고 속도조절을 하면 될 일이다. 문명이란 이름의 자동차에 브레이크를 다는 일에 누군가는 나서야 하는 것이다. 이

소임을 미룰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실천을 시작하는 것이 중요하다. 문명화 과정에서 상실한 수많은 가치들을 다시 건져 올려 햇볕을 쪼이고 우리 곁에 소환하는 일이 시급하다.
전주시가 손의 가치에 주목하는 연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자판 활자보다 손글씨가 오래 기억되는 평범한 이치가, 인류 문명사를 일구어온 큰 손보다 더 절실한 요즘이다. 특히 손이 가진 풍부한 내러티브는 지역의 가치와 절묘하게 어울린다. 근래 나라 안팎이 온통 지역재생에 열중하고 있는 것도 우연한 일이 아니다. 손을 상징하는 공예와 지역의 융합이 시사하는 바가 각별하다. 더욱이 전주는 지자체 가운데 전통공예 장인을 가장 많이 보유한 도시로 꼽힌다. 전주가 손으로 일구어 나갈 역강한 잠재력을 지닌 셈이다. 


지역성과 공예의 가치
지역성은 고유성의 다른 표현이다. 이동수단의 광속화에 따라 토속의 재료에 근간을 둔 공예의 지역적 특성은 옛말이 되었다. 지역성이 더 이상 지방만을 의미하지 않게 된 것도 이 무렵부터다.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듯, 글로벌화가 진행될수록 나라와 지역의 고유성이 소중한 가치로 부상한 것이다. 문화다양성협약과 같은 유네스코의 정책도 같은 맥락이다.

지역성을 공예와 짝지우면 사안이 훨씬 절실해진다. 공예와 모더니즘의 충돌 지점에서 모리스와 바우하우스가 생성된 것처럼, 고유한 전통의 가치들이 사라질 즈음에 비로소 지역의 가치가 눈에 들어온 셈이다. 근대적 생산방식 자체가 공예분야에게는 존재의 위협에 다름없었고, 본의 아니게 예술의 영역으로 내몰린 나머지, 시대의 어젠다를 외면한 값으로 사회 문화적 소외라는 혹독한 대가를 치렀다. 공예의 잠재력을 끌어낼 정책이 필요하다.

30년의 역사를 축적한 핀란드의 공예마을 피스카스(Fiskars Village)와 일본에서 발원하여 동아시아에 확산된 일촌일품(一村一品) 정책은 공예가 지역의 미래에 어떤 기여를 할 수 있는 지 여실히 보여준다. 


지역, 다른 가치의 중심 
몇 해 전 우르무치 출생에 지방대학을 나오고, 항저우에서만 활동한 '비주류 토종' 왕슈가 건축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프리츠커상을 받았다고 해서 화재였다. 소위 선진국의 건축가들끼리 돌아가면 독식하던 그들만의 리그 프리츠커상을 지역의 토종에게 준 것에 대해 엇갈린 시선을 보내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토종을 인정한 것 자체는, 80년대 이후 지성계의 화두가 된 지역의 가치에 주목한 건축계의 혜안이었다는데 별다른 이견이 없는 것 같다. 사람을 뒷전에 미뤄둔 천편일률의 근대 건축에 대한 반성에 기초한 것이다. 그의 작업은 단지 버려진 폐건축 자재로 건물을 짓는 상식적인 일이었다. 개발의 광풍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남은 흙벽돌이 그에게는 물질의 가치를 선택한 애처로운 중국의 현실로 비쳤을 것이다.

지역이 변방을 넘어 다름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지역의 고유한 가치를 만드는 일이다. 무엇보다 공공성의 보편적 가치에 수렴해야 한다. 한낱 물건일지라도 그 중심에 돈보다 사람이 먼저인 윤리, 후손에 물려줄 환경을 덜 훼손하려는 배려, 상생의 조화를 세심하게 고려하며, 미래를 위해 새 전통을 만드는 노력, 요샛말로 지속가능성이다. 


지역은 지도상의 변방이 아니라 잠재적인 가치의 중심이다. 지금 발 딛고 서 있는 이곳, 내 무늬결이나 파동과 같은 에너지의 발신지다. 연못 어디든 돌이 떨어진 곳에서 물결이 퍼지면, 돌을 던지는 순간 내가 선 곳은 새로운 중심이 된다. 문제는 내가 지금 돌을 들어 던지는 일이다. 한국의 작은 도시 전주가 둠스데이의 위기로부터 인류를 구원하지 말라는 법이 없다. 손의 참 가치를 지혜롭게 풀어낼 수만 있다면.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