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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3 | 칼럼·시평 [문화칼럼]
작별에 대한 예의
김판용(2017-03-15 09:07:17)

이 땅에 다시 봄이 오고 있다. 혼란스럽기 그지없는 대한민국, 그 동토에 훈훈한 봄바람이 불어온다. 문득 '빼앗긴 들에도 봄이 오는가'라는 이상화 시인의 시구가 사념의 옆구리를 툭 치고 지난다. 지금 그대는 누구의 나라에 살고 있는가? 저 차갑고 어두웠던 겨울밤을 끈질기게 밝혀온 작은 촛불들의 나라는 정녕 다가올 수 있을 것인가? 이런 혼돈 속에서도 계절은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다.    
봄은 새로운 삶의 시작이다. 죽은 듯이 잠자던 나무들이 기지개를 펴며 가지 끝마다 싱싱한 잎들을 품어낼 것이다. 잎을 나중에 피우는 놈들에게선 팝콘 같은 꽃들이 먼저 내걸리라. 이쯤 되면 회색빛 들녘이 초록으로 채워지면서 대지는 또 무수한 생명으로 출렁일 것이다. 봄은 분명 소생의 계절이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봄은 낡은 거처들과의 작별이다. 거자필반(去者必反)이라했듯 시작과 끝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하나의 끈으로 연결돼 있다. 빛이 있어야 그늘을 만든다. 그러니까 빛과 그늘은 떨어질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 순리이다.    
내가 일하고 있는 학교의 봄도 다르지 않다. 떠나는 사람 뒤에 새로운 사람들이 몰려온다. 졸업과 입학이 연육교처럼 이어져 있다. 꽃다발에서 꽃다발로 그렇게 축하를 받으며 아이들은 점점 성장해 간다. 그만큼 삶의 무게도 더 크게 다가 올 것이다.  학생들만 그런 것이 아니다. 선생님들의 3월도 이 순리로 돌고 돈다. 어떤 이는 짐을 싸고, 또 어떤 사람은 짐을 푼다. 떠나는 이의 뒷모습은 쓸쓸하지만, 낯설게 다가오는 이의 미소는 상큼하다. 그런 의미에서 학교의 봄은 배반의 계절이다.    
떠나고 보낼 때 마다 '나와 작별하는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기억하게 될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모든 이들에게 아름다운 사람으로 남게 되기를 바라는 것은 물론 욕심일 것이다. 그러나 이왕이면 그들의 뇌리에 행복하게 빛났으면 좋겠다는 바램을 가져본다. 나의 실상은 어쩌면 그들의 기억으로만 존재하게 될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또 떠나가는 사람들의 마음도 헤아려 본다. 얼마나 허전하고 쓸쓸할까? 그들의 일상을 채웠던 수업과 업무, 그리고 정든 교정과 동료들을 떠난다는 것은 슬픈 일일 것이다. 만약에 떠나는데도 슬프지 않다면 그 사람은 가치 없이 시간을 낭비했음을 드러낸 것이다. 가치가 감정을 만든다. 감정이 없이 헤어지는 사람이라면 그는 작별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로부터 도주일 것이다. 그래서 모든 작별은 슬퍼야만 한다. 그런 의미에서 어떤 이의 말처럼 이별에도 예의가 필요한 것이다.
우리학교에 이번 학기를 끝으로 정년퇴임을 하는 분이 계시다. 선생님이 아니다. 행정실 주무관도 아니다. 보이지 않는 학교 주방에서 음식을 조리하고, 학생들에게 배식을 하셨던 조리종사원인 권영자 여사님이시다. 그분에게 여사님이라는 호칭도 학교에서나 누리는 호사일 것이다. 그만큼 드러나지 않는 삶으로 일관했던 분이다. 정식 공무원이 아닌 국어사전에도 없는 교육공무직이라는 어정쩡한 직위에서도 책임감을 갖고 온 정성을 다하셨다. 그분을 따라다니면서 보지 않아도 하시는 말씀이나 자세만으로도 분명히 그 내면을 읽을 수 있었다.

지난 2월 9일 점심은 권영자 여사님께서 해주시는 마지막 끼니였다. 무를 썰면서, 나물을 무치면서 만감이 교차했을 것이다. 밥을 푸는 주걱마다 김이 깊게 서렸을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다가 우리들의 감사의 마음과 작별의 아쉬움을 표할 겸 축하의 표시를 하기로 했다. 배식구 앞에 소박한 현수막을 달기로 한 것이다. 물론 누구와 모의한 것은 아니다. 교장으로서 응당해야 하는 보살핌 중에 하나이기에 이럴 땐 독재를 해도 된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분의 사진을 찍고 카피를 써서 편집을 했다. 

'당신의 밥은 참 따뜻했습니다. 마지막 한 끼까지 맛있게 먹겠습니다. 권영자 여사님 정년퇴임을 축하드립니다. 금구교육가족 일동' 이렇게 써서 내걸고는 학생들에게 밥을 받으면서 '고맙습니다. 맛있었습니다.'라고 인사하도록 가르치자고 선생님들께 부탁했다. 다행히 우리 선생님들과 학생들도 잘 따라줬다. 그래서 마지막 한 끼의 밥은 더 없이 그윽했다. 

말은 날개를 달고 다닌다는 격언이 실감났다. 짧은 시간에 조리종사원들 사이에 소문이 난 모양이다. 여기저기에서 감사하다는 전화를 받았다. 이별에도 예의가 필요하다는 의미에서 보면 그 어떤 이별도 각별해야 한다. 청와대를 떠나는 대통령이나 청사의 청소부가 느끼는 이별의 무게는 같다. 학교 교장이나 식당 조리종사원이 별반 다르지 않다. 그런데 왜 직위를 따라 이별의 꽃다발의 개수가 다르고, 아쉽다며 내미는 악수의 손길이 다른가? 가진 자의 거취만이 그토록 위대한 것일까? 우리 사회의 이런 관습의 행태를 확대하면 결국 대통령 탄핵이라는 참담한 현실과 이어져 있음을 보게 된다. 왜 가진 자는 거만하고, 그들의 말은 그토록 무서워야만 하는가?

아무리 높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언젠가는 그 자리에서 내려와야 한다. 내려오고 나면 과연 무엇이 남을까? 결국 사람들의 기억에만 그는 실존하게 될 것이다. 자리가 주는 권력을 잃으면서 인간 본연의 품성에 대한 평가만 남는다.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영화 <버킷리스트>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주인공 젝 니콜슨과 모건 프리먼이 삶의 성공의 여부에 대해 나누었던 대화이다. 핵심은 '얼마나 남을 기쁘게 했는가?' 그리고 '자신은 얼마나 행복한가?'에 있었다. 결국은 지위가 아닌 그의 역할이나 행동에 가치가 있는 것이다. 지고한 대통령도 잘못하면 자리에서 물러나야 하는 시대가 아닌가?

보내고 맞이하는 봄이다. 특히 학교의 봄은 환송과 환영으로 부산하다. 떠나는 이와 아름답게 이별해야 새로운 만남도 설렘으로 다가온다. 그러니 이별 앞에 우리는 진심을 다해야 한다. 지위가 낮다고, 또는 다시는 보지 않을 거라고 막 대하는 사람은 또 다른 사람에게도 함부로 하게 된다. 우리 학교가 권영자 여사님과의 헤어짐에 예의를 갖추려는 것은 자리가 아닌 인간에 대한 지극한 예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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