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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11 | 칼럼·시평 [문화칼럼]
깨어있는 문화를 위하여
홍석영 소설가, 원광대 문리대학장(2003-09-25 09:06:01)

民主改革의 뜨거운 바람이 누리를 휩쓸고 있는 이때, 이 고장의 각개 文化분야에서 先導的인 역할을 담당해온 젊은이들이 뜻을 모아 여기 「문화저널」을 펴내게 되었으니 이 또한 청신한 새 바람이 아닐 수 없다.


대저 이러한 문화운동이란 그 동기 자체에 있어 순수한 鄕土愛의 자연발생적인 유로, 또한 鄕土文化○達을 갈망하는 문화의식과 드높은 정열에 의하여 이뤄질 법하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간 어떤 체제로든 地方文化가 마치 고여있는 늪처럼 停滯性을 면치 못했던 불행한 상황을 극복하려는 企圖 자체로 하여 매우 뜻있는 작업이라 할 것이다.


그런 만큼 이 「문화저널」이 그 동안 굳어지고 이지러지고 고여있는 이 고장 文化를 바로 일으키고 새 바람을 불어 넣어주는 言論의 새 活路로서 무궁히 이어나갈 것을 간절히 바라마지 않는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 수 없다. 사람은 마땅히 高價의 문화적 혜택을 누릴 수 있는 권리가 있고, 정부는 이를 위하여 투자를 아끼지 않아야 할 의무가 있다.


그리하여 納稅의 평등의무가 있듯 지방이든 서울이든 그 혜택이 고루 미쳐야 됨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나라의 文化가 짐짓 서울 중심으로 集中도미으로써 미상불 지역 문화의 相對的 貧困을 가져오는 政策不在의 크나큰 모순이 아닐 수 없다.


그야 어찌 보면 권력의 상위에 있는 政治자체가 이러하여 地方自治體 하나 제대로 실시되지 못해온 형편에 어련하겠느냐는 말이 나옴직도 하다.


産業社會에 있어 자칫 물량적 공간의 팽배가 인간정신의 황폐화를 가져온다는 사실에서 文化政策의 요긴함을 절감할 터이지만, 이제까지의 경험으로 미루어 이를 위한 깊이 있는 시책이 강구되지 못하고 어찌 보면 현상호도에 지나지 않는 겉치레 문화였다는 인상을 느끼게도 된다.


아니 도리어 한 나라 문화가 정치의 예속물이 되어 그것의 도구로서 과시되는 展示用 아니면 施惠를 위세 하는 위안물과도 같은 입장에 전락하지나 않았나 하는 반성조차 뒤따르게 되기도 했다.


어쨌든 地域文化는 지금 스스로 영성함을 면치 못하고 있다.


우선 文化空間에 있어 으레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시설조차 돼있지 않다.


시민의 독서를 통한 건전한 정신풍토를 함양하는데 필요한 圖書館이 도내에 몇 군데 있지만, 藏書가 확보되어 있지 않은데서 학생들의 학습의 장인 독서실 구실로 바뀌어 겨우 명맥을 잇고 있다.


또한 藝術人의 발표의 장인 유일한 全北藝術會館이 있어 상당한 몫을 담당하고 있음은 사실이지만, 이 역시 官의 운영체제에서 벗어나 전문적인 민간 예술단체에 그 운영권을 넘김으로써 더 좀 창의적이고 특성 있는 운영형태로 활성화 될 수 있으리라 믿는다.

대체로 公演내지 展示의 공간으로 제공될 수 있는 公共의 시설물이라는 게 그나마 도내에 몇 군데 밖에 없는 터에 그 운영조차 지나치게 行政的으로 묶여 있는 상태여서 예술인의 場으로서는 그 이용절차가 도무지 번거로운 것이다.

創作藝術이 발표를 전제로 한다할 때 짐짓 권위 있는 文學의 紙面이 서울 중심으로 偏在하고 있다든가 또는 文壇자체가 길드의 조직처럼 폐쇄성을 지님으로서 영세하나마 地域文學이 自生的인 同人活動에 더 많이 의존할 밖에 없다는 것 역시 불행한 현실이 아닐 수 없다.


또한 公演이나 展示의 空門이 마뜩하지 않음으로써 결과적으로 지역 예술의 창작 의욕을 충족시키지 못하고 또한 질적인 落後性을 초래할 밖에 없다는 것 역시 중대한 손실이 될 것이다.


이리하여 모처럼 이 고장이 배출해낸 재능 있는 예술인으로 하여금 보람 있는 활동을 위하여 기왕의 좋은 舞台, 값진 展示場을 찾아 제 고장을 등지고 가위 한국 文化의 1번지라 할 서울을 향하여 기를 쓰고 떠나게 하는 것이다.


급격한 産業化가 離農現想을 부채질하여 시골을 空洞化했듯 모든 文化의 서울 집중현상이 鄕土文化를 더욱 피폐케 함으로써 지역 문화의 불균형 현상을 한층 가속화 시켰다.


이른바 道具主義로서의 눈에 보이는 정책적인 文化施策에 의하여 남에게 보이기 위한 展示用 문화만을 집중적으로 육성하는 등 파행적인 문화 발전의 폐단 역시 없지 않다.


의식이 과잉하면 형식이 타락한다 하지만, 한 나라의 문화 발전에 졸속이란 있을 수 없다. 문화의 전통이란 보이지 않는 가운데 지속되는 것, 그러니까 時代와의 경계 속에서 언제나 총체적으로 파악되어질 그런 성질의 것이다.


마치 한 때의 바람처럼 경박하게 부추겨질 부박한 문화적 풍토가 있는 한결 실한 문화발전이란 있을 수 없다.


이를테면 文化財 발굴과 재현이란 뜻의 民俗競演大會 같은 행사 역시 어찌 보면 해를 거듭 할수록 展示化 大型化됨으로써 자칫 허세에 승하고 있지 않나 하는 우려를 낳는 것도 그 한 例라 하겠다.


과거에 집착하는 것만이 늙음의 美德이 아니듯 무분별한 전통문화의 재현만이 능사가 아니다. 感傷主義에 빠지는 것이 참 敍情이 아니 듯이 말이다.


그러하나 鄕土文化는 언제나 고장 사랑의 기름진 토양 위에서 피어 날 꽃이다.


官에 의지하여 아긋한 施惠라도 있어야 겨우 날개 짓이라도 해볼 영성한 地域文化, 먹피같은 콤플렉스를 되씹으며 숙명처럼 문화의 밭갈이에 종사할 수밖에 없는 地域文化人들, 그들의 노력만큼 영예는 따르지 않는다. 


차라리 보이지 않는 곳에 서서 묵묵히 고장을 지키는 把守兵으로서의 긴한 의무가 뜨거운 鄕土愛와 더불어 그들의 발을 묶는다 할 것이다.


더욱이 地域文化의 입은 무겁다. 나태와 침체는 言論의 무기력을 낳아 정말 시시껄렁할 만큼 할 말들이 없는 것 같다.


전파매체나 활자매체란 것도 도무지 로칼리티의 活性化가 이뤄지지 않고, 마치 중앙에서 영달되는 재정에 안달하는 地方官署처럼 자체 프로의 개발이라는 게 고작 명색뿐이다.


政治의 中央集權主義가 獨善主義와 權威主義를 빚어내듯 문화의 서울 집중화는 모든 文化藝術의 全體主義를 낳게 되는 것이다.


民族文化의 總和에서 世界文化가 있듯 한 나라의 文化란 궁극적으로 鄕土文化의 개별성에서 피어난다. 鄕土라는 특수성이 어울려 한 민족 단위의 보편성으로 어울리게 되었을 때 참다운 文化가 형성될 수 있다.


그러므로 地域의 융성과 발전이 없는 곳에 나라의 발전이 있을 리 없다.


이제 뜨겁게 닳아진 民主化의 길에서 굳이 바라건대 地域文化의 活性化를 꾀할 과감한 文化政策의 改革이 이루어졌으면 한다.


한 나라의 政治의 表現을 궁극에 있어 文化的 樣相으로 드러나는 것이 즉, 경제의 고도성장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文化의 성숙도이다.


나라의 先進化는 물질적 번영에 있음이 아니고, 깨어있는 정신의 文化意識 그 자체에 있다.


말만으로 藝鄕이니 文化市民이니 하고 虛張하지 말 것이다. 수준 높은 문화적 시설 속에서 마음껏 그것을 즐길 수 있는 이른바 文化의 地域的 平準化가 이뤄질 수 있는 풍토로 개선되어야 한다. 그래서만이 비로소 우리는 文化的 先進化를 꾀할 단계에 들어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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