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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1 | 칼럼·시평 [문화칼럼]
고작 두 장의 사진이 남아 있을 뿐이다
김흥식(2020-11-06 09:22:24)

고작 두 장의 사진이 남아 있을 뿐이다
글 김흥식 서해문집대표

고백하건대 나는 도둑이다.
큰 도둑도 못 되고 좀도둑일 뿐이다. 그러나 곰곰 생각해 보면 큰 도둑일 수도 있다. 세상의 일부분을 훔치는 것이니 말이다.
일주일 전에도 강연이 끝나고 대전역에서 서울행 KTX에 올랐다. 코로나19 사태에도 가득한 객실 승객 대부분 스마트폰에 눈길을 두고 있다. 좌석 앞에 꽂혀 있는 10월 호 《KTX》 잡지가 깨끗하다. 벌써 10월이 반이나 흘렀는데 글쎄, 한 명이라도 읽었을까 싶다. 빼서 경북 영주 부석사의 향긋한 사진을 보고 여주의 흰쌀밥을 즐긴다. 그러는 와중 고작 55분 만에 서울역에 도착한다. 아무도 읽지 않는 잡지가 좌석마다 꽂혀 있다. 너를 그냥 두고 어찌 내리랴. 유기견 데려다 키우듯 가져가리라. 그러나 도둑질에 익숙하지 않아서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다. ‘앱스토어에서 KTX매거진 앱을 다운로드하면 전자책을 무료로 구독할 수 있습니다.’라는 문구 따위는 가슴에 들어오지 않는다. 모두들 내리는 순간 조금은 머뭇거리고 조금은 당당하게 잡지를 들고 내렸다.


고작 두 장의 사진이 남아 있을 뿐이다.
벌써 수십 년이 지났는데, 그래도 깊이 간직해 둔 사진이 눈에 들어올 때마다 내 삶은 다시 스무 살의 설렘으로 돌아간다. 나는 그녀를 영원히, 아마 죽는 순간에도 떠오르는 모습 가운데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갈 것이다.
지금 살고 있는 가족들이 알면 어떻게 하냐고? 그럼 내 삶의 흔적을 가족이 알면 안 되는 건가? 아니, 그것조차 다 알아야 참된 가족 아닐까?
그런데 그렇게 내 젊음을 사로잡고 그 후로도 잊히지 않는 사람조차 평소에는 잊고 산다. 그러다 문득 사진을 볼 때 나는 다시 그 사람을, 그 시절을, 그 삶을 되찾는다. 아! 황홀한 순간이다. 다시 한번 깨닫는다. 눈에 보이지 않으면 남는 것이 무엇이랴. 

얼마 전 방송을 듣다가 우연히 《원광》이라는 잡지 소개를 들었다. 운전 중에 그러면 안 되는데, 방송에서 안내하는 전화번호를 기록했다. 그러고는 신호 대기선에서 전화를 했다.
“정기구독하려고 하는데요.”
“혹시 원불교 신도세요?”
“아니요. 방송 듣고 읽고 싶어서요.”
그렇게 해서 한 달에 3,500원짜리 잡지 정기구독자가 되었다. 그 후 매달 언제인지 모르는 날이 되면 그 잡지가 배달되어 온다. 그리고 10분 만에 일별한 잡지는 거실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 한 달 만에 폐기처분된다. 그리고 다시 익월 호가 온다. 벌써 몇 달 동안 내 눈은 순간순간 《원광》이라는 글자를 읽는다. 읽을 때마다 둥근 원처럼 살아야겠다고 다짐한다. 당연히 실천에 옮기지는 못한다. 그냥 다짐할 뿐이다.

40년 전에 출판에 삶을 걸겠다고 다짐하고 30년 전에 출판사를 등록하였다. 10년 동안 경제적 사경을 헤매다가 20년 전에 재출발했고, 이제 천 종 남짓한 책을 출간했다. 그동안 출판의 레퀴엠을 작곡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오늘 이 순간에도 그 곡은 연주되지 않는다. 아직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닫을 때가 아니기 때문이리라. 무엇 때문일까? 곰곰 생각한다. 전자책이니 앱이니 유튜브니 온갖 새로운 매체가 등장하는데도 수천 년 전 탄생한 종이책이 꿋꿋이 버티는 까닭은 무엇일까?

신문은 – 그 내용이 가짜 뉴스로 도배가 되어 있건, 왜곡과 편파로 얼룩져 있건, 자본의 무력 앞에 참담히 무릎 꿇은 상태이건 – 영원히 간행되어야 한다.
잡지는 – 수천 명의 정기구독자는 가뭇없이 사라지고 이제 수백 명, 아니 수십 명만이 남아 흘러간 시대를 붙잡고 흔들릴지언정 – 영원히 간행되어야 한다.

하루의 역사를 제대로 기록한 신문이건 그렇지 않은 신문이건, 오랜 시간이 흐른 후 눈 밝은 이들에 의해, 뒤틀리고 무너져간 시대의 일상을 기록한 존재로 해석될 것이다. 아니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걸 통해 시대를 해석해야 한다. 가짜 뉴스가 판칠 수밖에 없었던 시대를 분석하고, 왜곡과 편파, 자본의 역사를 되새김하면서 인류의 새로운 미래를 설계할 것이다. 그리고,

정치를, 사회를, 문화를, 종교를, 음식을, 디자인을, 춤을, 음악을, 돈을, 꽃을, 지역을 깊이 들여다보고 순간의 움직임이 아니라 진득한 움직임을 기록한 잡지는 한 지역, 한 사회, 한 나라, 나아가 인류 문명의 퍼즐을 빈틈없이 맞추어나가는 소중한 존재가 될 것이다. 이 시대가 아무리 하찮게 여길지라도 궁극에는 그들의 움직임이 이 시대를 재구성하는 뺄 수 없는 퍼즐이 될 것이다.

정기간행물이라는 매체는 단순한 정보의 전달체가 아니다. 정기간행물은 한 개인으로서는 유한할 수밖에 없는 삶을 무한한 인류의 삶으로 승화시키는 역사의 기록이다. 역사가 없다면 인류는 인류가 아니라 호모사피엔스의 단속적(斷續的) 삶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들이 기록하고 축적하는 순간 호모사피엔스는 인류가 되어 영속(永續) 한다. 그러하기에 기록 또한 영속해야 한다. 기록이 멈춘 순간 인류라는 존재 역시 나아가지 못한 채 멈춘 것과 다름없다. 그리하여 정기간행물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사실 정기(定期), 나아가 시간의 흐름에 맞추어 빈틈없이 출간되는 것이다.
편년체(編年體)라는 체제는 인류 역사를 선형적(線形的)으로 이해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식이다. 편년체가 그러한 효율성을 획득한 데는 그만한 까닭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방법은 역사를 단순히 즐기는 사람을 위해서건, 학문의 대상으로 연구하는 이를 위해서건 자신의 역할을 충분히 해낼 것이다.
만일 문명의 모든 요소를 단행본만으로 기록한다면 어찌 될 것인가. 수많은 저자들이 아무리 열심히 구축한다고 해도 문명의 어느 부분인가는 빠뜨릴 수밖에 없다. 우리는 그러한 실례를 왕조 중심으로 기록해 온 과거 역사에서 살핀다. 그러니 단행본이 기사본말체(紀事本末體)가 해 온 역할을 한다면 정기간행물은 편년체가 담당한 역할을 맡아야 하는 것이다. 게다가 지금이 어느 시대인가. 문명의 시대다. 문명이란 거창한 것이 아닐 것이다. 단 한 시민의 삶도 무시되지 않는 역사, 시대가 문명일 것이다. 그리고 문명을 기록하는 역할은 당연히 지역이라는 퍼즐을 담당한 정기간행물이 담당해야 한다. 솔이, 정구지가, 염지가, 쫄이, 소푸가, 쉐우리가 부추로 수렴되는 중앙집권적 문명이 성립된 지 고작 70년인데, 이미 우리는 부추 대신 솔을, 정구지를, 쉐우리를 되찾고자 한다.

문명의 시간은 단속적으로 사는 이들에게는 멈추어 있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흐르지 않는 것은 시간이 아니다. 그 문명의 시간 흐름을 기록하는 것은 정기간행물이어야 한다. 게다가 단 하나도 빠져서는 안 되는 시민 문명의 시대에 그 역할을 누가 해야 할지는 자명하다.

2018년, 대학을 졸업한 지 40년 만에 나는 동창회도 졸업했다. 계간으로 도착하던 동창회보가 사라진 것이다. ‘그대 서강의 자랑이듯 서강, 그대의 자랑이어라.’라는 자부와 사회에 대한 사명감을 전해주던 교훈을 비롯해 모든 끈이 사라졌다. 메일로 보낸다고? 이제 나의 젊음과 미래를 설계했던 공간과 나를 이어주는 끈은 더 이상 내 책꽂이에 없다.

기차에서 내리면 사라지는 영주 부석사와 여주 햅쌀의 향취를 나는 믿지 않는다. 사진 한 장으로도 남지 않은 그 사랑을 영원히 기억할 재간 역시 내게는 없다.
그보다 아무도 없고 아무것도 꽂혀 있지 않은 앱 도서관, 전자책 도서관에서 지나간 문명을 돌이켜 보고 새로운 문명을 설계할 자신은 더더욱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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