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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 | 칼럼·시평 [문화칼럼]
율곡 선생께 길을 묻다
이병초(2020-12-03 09:44:39)


율곡 선생께 길을 묻다
이병초 시인, 웅지세무대 교수 

아직도 코로나 바이러스가 들끓는다. 이 괴질이 오래갈 것이라느니 백신이 곧 나온다느니 하는 말들이 끊이지 않지만 바이러스는 쉽게 잡힐 것 같지 않다. 아무도 예상치 않았던 불행이 명백한 사실로 나타나고 거기서 삶의 갈피를 못 잡는 경우는 이미 예삿일이 되어버렸을까. 괴질은 잡아야 하지만 모두가 겪는 사회적 불행의 원인이 있을 법한데, 바이러스가 창궐하도록 도움을 준 이들이 분명 있을 터인데도 그것을 캐기는커녕 백신 개발이나 방역에만 열을 올리는 걸 보자면 은근히 화가 끓는다.


  이럴 때 나는 시를 읽고는 했다. 시와 현실이 길항이라는 데서 접목된 시세계는 인간이 얼마나 자유로운 존재인가를 보여주고도 남았다. 그러다 지난여름 율곡 선생의 시관(詩觀)¹을 만난 뒤 나는 시의 메시지이자 삶의 메시지를 접한 듯 기뻤다. 선생의 의견에 마뜩찮은 대목도 있었지만 선생의 시관은 사회적 기류와 시에서조차 우울했던 현재를 찬찬히 돌아보도록 유도했다.


  누구나 쉽게 읽으라고 쓰는 게 시(詩)라는 데 요즘은 꼭 그렇지도 않다. 각종 문예지에 발표된 시들 중에는 어려운 시들이 꽤 많다. 문명적 색감을 짙게 드리운 자폐적 비문(非文)들이며 결핍과 소외를 외래어에 끼워놓은 혼종적 불안감들은 시의 내용과 따로 놀기 일쑤다. 언어를 통해 삶의 진정성을 옹호해야 할 시가 되레 삶을 외면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떨쳐내기 어려운 지점에 이른 것이다.


  율곡이 생각한 시는 수단에 가까웠다. 시는 작자나 독자가 성정(性情)을 도야(陶冶)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즉 시는 심성을 바르게 기르는 데 요긴한 정신 행위였다. 그는 「精言妙選序」² 를 통해 “사람의 소리 가운데 알찬 것이 말이며, 시는 말 가운데서도 더욱 알찬 것이다. 시는 성정에 근본을 두고서 지어지는 것으로, 거짓됨이 없어야 참된 시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역대의 참된 시는 ‘성정의 바른 데’에 바탕을 두고 지어져서 인정을 곡진(曲盡)하게 나타낼 수 있었으며, 시의 작자가 ‘사물의 이치’[物理]에 널리 통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 시를 읽고 노래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두터운 인정을 지니게 하고 사물의 이치에 널리 통할 수 있게 한다.”라고 적었다.


  시를 생각하는 율곡의 태도는 엄정하다. 시가 갖추어야 할 요체가 참됨이며, 바른 성정임을 꿰뚫어보고 있다. 하지만 율곡 선생의 시관은 시를 계몽적 수단으로 삼았다는 지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현대시 거개는 인정을 곡진하게 나타내지 않으며 사물의 이치를 널리 통하게 할 수 있는 교조적 색깔을 버린 지 오래다. 사람을 교화 대상으로 삼지 않는 데다 사회운동의 기폭제 역할을 맡아달라는 요구에도 친절하지 않다. 


  여기서 우리는 시의 현대성을 따져봐야 한다. 독일인 노발리스나 미국인 포에서 촉발된 문제의식은 보들레르와 랭보, 말라르메에서 꽃을 피우며 20세기 문학을 그들 문학의 영향력 아래 두었다. 모더니즘 범주에 드는 이 시편들은 전통과 단절, 이질적인 것들의 혼합, 삶의 파편성, 칩처럼 박힌 기호, 주파수를 벗어난 소리의 긁힘, 녹슨 총구, 상품시장, 삶의 무출 구성, 비규범적 언술 등을 시의 정면에 언표하면서 기존의 시형식과 내용을 거절했다.


  근현대의 시편들은 태생적으로 불온한 것일까. 첨단의 것을 시에 포획하고 싶은 강박에 시달리는 것일까. 하지만 이 시들은 자아와 세계가 필연적으로 불화한다는 사실을, 문명세계는 더 분명히 기계와 금전에 구획된 자유를 강요함으로써 결국 자유의 본질이 살해될 것이라는 비극성까지를 간파했는지도 모른다. 인류의 비관적 미래를 은폐하는 짝퉁 정의와 온정주의가 삶의 외연을 점점 좁히고 있는 현재도 보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시들은, 의미는 증발되고 자폐적 징후만 똬리 틀었다는 질타를 뒤집어썼을지라도 이 시들은, 결코 사이코 집단의 비루한 감정 노출이 아니다. 현대성이 갈수록 얕아지는 시의 고정관념에 대한 통쾌한 해체 시도였거나 거대 자본 또는 자본주의에 대한 저항의 또 다른 표출 방식임과 동시에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는 언어미학인 셈이다.


  율곡 선생의 시관(詩觀)이 거대 자본을 앞세운 문명과 코로나19를 알 리 없다. 하지만 “바른 성정”이 무엇인가는 짚어볼 수 있다. 시가 일상의 수단이었어도 율곡 선생의 시관은 인간의 정서에 뿌리를 두었다. 시에 인정을 곡진하게 나타냄과 동시에 사물의 이치를 널리 통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언술은 의미하는 바가 크다. 불평등한 세상의 의붓자식으로 살면서도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조차 모르는 캄캄한 불감증 환자들을 겨냥한 것으로 읽힌다.
  세상이 물질 중심이 되었고 코로나 바이러스가 창궐하게 된 원인은 일부 지식인의 책임이 크다. 지식이 “바른 성정”을 터 닦음하는 데 쓰이기보다는 부도덕한 이들이 자신의 잇속을 명문화하기 위해 내세운 자본의 마름 역할에 더 충실했기 때문이다. 자연 생태계가 망가지든 말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윤창출에 집중한 지식인의 관념성이 사회의 집단적 불행을 자초한 것이 아닌가 싶다.


  율곡 선생의 시관을 만난 뒤 서구의 상징시를 다시 읽을 수 있었던 지점에서 나는 문명과 자본이 가진 비정을 질타하기는커녕 되레 거기에 복무하는 일부 지식인을 보았다. 그러나 아직은 절망할 때가 아니다. 율곡 선생이 제시한 “바른 성정”과 보들레르, 랭보 등이 치열하게 제시한 “인간 선언”은 현대 사회가 회복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괴질 퇴치를 위한 백신 개발이나 방역도 중요하지만, 더는 자본의 수단으로 소용되지 않겠다는- 일부 지식인들의 참회를 기다린다.





1) 율곡 선생의 시관과 관계된 글은 「陶山十二曲跋과 精言妙選序 및 精言妙選總敍」에서 발췌했다.  글을 쓴 이는 故 정요일 교수이다.
2) 「精言妙選序」(「栗谷全書」, 卷之十三 수록)는 栗谷 李珥가 38세[1573]에 「詩經」 詩 以後 古代의 시로부터 宋代 程明道[程顥 : 程子의 兄] 先生의 시에 이르기까지 중국 역대의 漢詩 중 알차고도 본받을 만한 시들을 ‘五言古詩’, ‘七言古詩’, ‘五言律詩’, ‘七言律詩’, ‘五言絶句’, ‘七言絶句’ 등 여섯 詩體別로 가려 뽑아 詩選集 「精言妙選」을 편찬하고 나서 그 편찬 동기를 밝힌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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