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킵 네비게이션


분야별보기

트위터

페이스북

2014.3 | 칼럼·시평 [서평]
거꾸로 들여다보기
<환상도서관>
이현옥 사서(2014-03-03 18:38:29)

봉동읍에 돌아온 년이 지났다. 봉실산과 성작산의 품에 논과 , 고산 쪽에서 흘러내린 물이 하천까지 이루었으니 경치는 어디에도 빠지는 곳이다. 댓잎이 수런대는 뒤안이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지만 그럭저럭 지내고 있다. 고향에 둥지를 틀었을 유독 나를 반기는 사람들이 있었다. 어린 나를 예뻐해 주고 측은지심으로 바라보시던 아주머니 분이 그들이다. 우리집은 들판 가운데 외딴집이었는데 뙤약볕에서 밭일을 하다가 땀을 식힐 때는 약속이라도 우리 오두막에 오시곤 했던 것이다.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였으니 사십 년이 훨씬 넘었나 보다. 땀을 훔치고, 물을 벌컥벌컥 들이켜고 나서야 혼자 지키고 있는 내가 제대로 보였을 것이다. 아주머니들은 더위가 가셨는지어떤 남자한테 시집가고 싶냐라고 묻곤 했다. 그럴 때마다 어린 나는 거침없이고구마 농사짓는 남자한테요라고 대답했다. 하루에 이상을 꽁보리밥이나 시래기밥, 무밥을 먹고 살던 내가 어쩌다 맛본 고구마밥, 달착지근한 맛이 얼마나 입에 쩍쩍 들어붙던가 말이다. 하지만 분들은 이런 대답에 한숨을 지으며 재차 묻곤 했다. 그런 남자 말고 부자에게 시집가기를 종용하는 눈빛을 보내기조차 했다. 그러면 나는책방 아저씨한테요라고 대답했다. 마루엔 언니네에서 빌려온 책들이 있었으니까 그리 했을 것이다. 성이 눈빛은 아니었지만 그제서야 그분들은 고개를 끄덕이시곤 했다. 

초등학생, 중학생 나는 집을 도맡아 지켰다. 막내는 막내라서 오빠들은 오빠들이라서 지키는 것에 제외되었다. 그러다 짬이 나면 무슨 구실이나 핑계를 대서 책이 많은 친구집이나 동네 언니네 집에 놀러갔고 책을 빌려왔다. 혼자 지킬 놀잇감은이었던 것인데 책이 가난한 집에는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봉동읍엔 책방도 없었고 도서관도 없었다. 있는 집도 드물었다.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나는 일이 있다. 친구의 언니가 시내의 성심여고 세라복을 입고 뚝방에서 책을 읽고 있던 모습이다. 폭의 그림 같았다. 나도 그렇게 되고 싶었다. 언젠가 친구와 함께 숙제하자며 집에 발을 들여놓았을 나는 깜짝 놀랐다. 언니의 방에는 한쪽 벽을 차지할 만큼 가지가지의 책들이 빽빽했다. 앞에서 나는 절망했다. 절대적 빈곤에서 헤어날 가망 없이 허덕이며 살던 나는 부러움을 넘어선 티꺼움이랄까, 배신감이랄까 하여튼 설명하기 어려운 느낌에 사로잡혔다. 하지만 아마 책의 삼분의 일은 빌려다 읽었을 게다.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심지어 연애소설까지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그렇게 놀았지 싶다. 집이 내게는 도서관이었던 셈이다. 언니는 책을 빌려주거나 되돌려줄 무엇인가를 기록하고 찍찍 줄을 긋곤 했다. 참으로 꼼꼼했던 언니. 세라복. 나는 성심여고에 가지 못했다. 돈이 없는 아이답게 나는 당연히 상업학교에 진학했다.

시간이 지나갈수록 사람은 기억을 곁에 끼고 사는 것일까. 문득문득 친구 집의 책들이 생각났다. 언니처럼 세라복을 입지는 못했고 책방 아저씨한테 시집은 갔어도 공부방에 빽빽했던 책만큼은 갖고 싶다. 아니 이젠 작은 마을도서관을 만들고 싶다. 지금도 내게는 언니 방이 생애 최고의 도서관이다. 방에서, 빌려온 속에서 수많은 꿈을 꾸었고 집을 지었고 허물었다. 사십년이 지난 지금 흔해 빠진 책이고, 윤기가 흐르는 시설에 기자재 등을 갖추고 손짓하는 도서관들이 많이 있지만 이런 도서관 말고 나만의 아지트, 따뜻한 스토리가 있는 텃밭 같은 도서관을 가꿀 때가 되었다.  

조란 지브코비치의 『환상도서관』은 『해리포터』 시리즈나 『반지의 제왕』 등의 환타지 소설을 접해본 사람들에게는 재미있게 읽혔겠다. 스팸메일을 귀찮게 여기다 우연히 클릭하여 보게 메일- 주인공인 작가가 과거에 출간한 책은 물론 미래에 집필할 책까지 미리 있는, 한번 보고 나면 내용이 영원히 사라져 버리는 가상도서관, 책을 제아무리 치우고 없애도 다시 채워지는 집안도서관,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인간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는 야간도서관, 영원히 책을 읽어야만 하는 끔찍한(?) 형벌이 기다리는 지옥도서관, 펼칠 때마다 새로운 책이 속속 나오는 초소형 도서관 내가 상상한 도서관과는 다소 거리가 기발한 소재를 다루고 있다. 

서명과 목차를 포함한 여섯 편의 단편소설 제목이 나를 사로잡았지만, 게오르그 루카치의문제는 리얼리즘이다라는 문구에 외경심을 갖고 살아온 내가 이해하기에는 버거웠다. 전혀 어려울 것도 없었는데 그랬다. 지금의 나는 어렸을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던 내가 아니다. 나름대로 골라서 읽는 편에 속한다. 이런 장르의 소설을 거의 읽어본 적이 없어서인지 아니면 환타지라는 장르를 비하한 적이 있었는지 새삼 주변을 돌아본다. 건조하고 경직된 삶을 살아온 내가 느껴진다. 대체 이런 소설을 작가는 살이나 먹었는가,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 못하는 사람은 아닌가, 그의 이면이 궁금하여 들여다보니 딱히 파악할 수가 없다. 후기에 실린 인터뷰가 그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1990년대 세르비아인의 비극-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그는 환타지 소설들을 썼다고 했다. 그러나 세계환타지문학 대상을 탔으면서도 정작 자신은 환타지 작가로 불리는 것이 싫다고도 했다. 전쟁의 공포를 잊기 위해 어찌됐든 살아남아야 했기에 그는 썼을 것이다.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건물이 파괴될 현실과 먼먼 이야기들은 상상력에 날개를 달게 했고 상상력은 그를 고통에서 건져주었을 것이다. 사실 나는 그가 좌로 걸었는지 우로 치우쳤는지 극단의 민족주의자 밀로셰비치 대통령에게 손을 들어줬는지 어쨌는지 알지 못한다. 다만 그가 먹고 살기 위해 소설을 영어로 번역하여 판매하고자 했지만 에이전트가 있어야만 출판할 있다는 미국식 논리에 좌절했다는 것과, 가까스로 나타난 에이전트는 그에게 환상소설 따위 말고 보스니아 내전 연쇄강간 등의 자극적인 소재로 소설을 쓰면 출판해 주겠다고 권유받았으나 끝내 거부했다는 것만 뿐이다. 

나는 조란 지브코비치가 자랑스럽다. 20세기 발칸반도를 발칵 뒤집어 놓았던 세르비아. 자기들에게 맞지 않는 종교를 말살하고 인종청소를 하고자 했으므로 전全 세계인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당하는 나라의 작가였지만 더럽혀지고 분열된 조국을 팔아 상품이 되어 가판에 서는 것을 거부한 그가 아름답다. The Library』를『환상도서관』이라고 이름표를 그럴듯한 번역에 속아서 읽었다는 생각은 저만치 달아난다. 피비린내 풍기는 현실을 도피하기 위해 공상에 빠져 소설이라고 단정했던 시선을 거둔다. 

  오랫동안 나는 리얼리즘만을 고수하며 다양한 작품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살았다. 하지만 내가 꿈꾸는 환상도서관이 만들어지면 문제는 달라지리라 믿는다. 거꾸로 들여다볼 시간이 창창하니 그나마 다행이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