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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3 | 칼럼·시평 [서평]
『서양과 동양이 127일간 e-mail을 주고받다(김용석/이승환)』저항과 포용의 철학자, 그들의 뜨거운 '시대 읽기'
김의수 전북대 교수·철학과(2003-03-26 16:50:51)

'방향성을 상실한 채 급변하는 시대에 철학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위기의 사회현실과 전망이 불투명한 미래에 대해 철학자들은 해답과 방향을 제시해야 하지 않는가.' '미래사회에 대한 해답은 서양에 있는가, 동양에 있는가.' 교양이 있는 시민들의 이러한 요구와 질문에 대해 서양철학자 김용석 교수와 동양철학자 이승환 교수는 각각 분명한 해답을 제시한다.
동양철학자와 서양철학자의 대담집인 이 책은 우선 현대적 감각이 묻어나는 책 이름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끈다. 그리고 저자들의 화려한 경력과 저서들의 무게가 독자들에게 기대와 신뢰를 갖게 한다. 무엇보다도 서양사상과 동양사상의 마주침이라는 사실에 독자들은 관심과 매력을 느낄 것이다. 그런데 독자 대중은 과연 이 대담 내용을 쉽게 이해하고 참신하다고 느낄 것인가?
그것은 무엇보다도 독자들이 처음부터 어떤 기대와 자세로 접근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방송의 상업주의에 영합하여 화려하게 TV 엔터테이너로 등장했다가 다양한 사람들(주부, 영문학자, 동양철학자, 서양철학자 등)로부터 혹독한 비판을 받고는 야반도주하듯 갑자기 사라져 버린 김용옥 교수 때문에 - 그는 애초부터 동양철학의 기본 덕목을 결여한 사람이어서 언행이 엇물리고 일관성 없이 좌충우돌했다 - 어쩐지 씁쓸하던 공간이어서 독자들은 선뜻 기대를 갖기보다는 좀 조심스러운 접근을 할지도 모른다. 그건 오히려 잘 된 일이다. 본래 철학이란 다 지은 밥을 입에 떠 넣어 주는 것이 아니며, 신중한 접근은 독자에게 더 큰 것을 얻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김용석 교수와 이승환 교수는 수준 높은 철학적 대화를 나눈다. 그리고 자주 첨예한 대립을 보이며 논쟁을 벌인다. 그것을 따라가며 함께 음미하는 독자들은 현실성 있고 중요한 철학적 논제들을 많이 만나게 된다. 그리고 서양과 동양이 제시하는 다양한 해결의 길들을 보게 된다. 다만 두 사람의 대담은 그 표현들이 거칠지 않아서 때로는 정말 논쟁을 하는 것인지, 그냥 점잖게 덕담을 나누는 것인지 딱 부러지게 구분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치열한 논쟁이라고 해서 꼭 감정을 개입시키거나 거친 언어를 사용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언론에 흔히 등장하는 논쟁들이 솔직성을 빙자하여 감정싸움으로 비화하는 것은 기본이 안 되어 있는 현실의 투박성에 원인이 있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 큰 목소리로 제압하려는 수준 낮은 토론의 자세에 기인하기도 한다.)
한국의 독자 대중들은 아직 강한 표현과 극적인 요소가 들어 있는 책에 쏠리는 경향이 있다. 그런 점을 감안한 것은 아마도 서양과 동양을 대비시킨 이 책의 제목일 뿐, 두 철학자는 그런 태도가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한다. 두 사람 공히 전근대와 근대의 대비를 강조하고, 현대가 노정하는 문제들의 극복을 추구한다. 따라서 두 사람은 동양철학자와 서양철학자로서 대립한다기보다는 보편성과 특수성에 대한 입장, 현실비판의 관점과 정도의 차이, 그리고 비중을 현재에 두는가 미래에 두는가에 따라 나뉜다. 우리는 흔히 진보적인 서양철학자와 보수적인 동양철학자를 머리에 떠올리게 되지만, 이 책의 주인공들은 오히려 그 반대이다. 비판과 저항의 태도를 보여주는 이승환 교수와 넓고 긴 안목과 포용성을 강조하는 김용석 교수의 만남이다.
이승환 교수의 주장엔 힘이 들어있다. 서구중심주의, 문화제국주의에 대한 저항에서부터, 한국사회에 대한 예리한 분석과 비판 그리고 구체적인 신자유주의 대학정책 비판에 이르기까지 동양철학자에게서 찾아보기 쉽지 않은 날카로움과 무게를 동시에 확인하게 된다. 그리고 그는 서양철학을 모르는 동양철학자가 아니다. 어떤 영역에서는 서양 철학자보다도 더 깊은 식견을 보이기도 한다. 이승환 교수는 유가, 도가, 불교의 사상들에서 새 시대의 대안 사상이 될 인간과 인간의 관계,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대한 이론들을 찾아낸다. 특히 그는 권위주의로 형이상학을 주입하려 하지 않고, 사회과학적 자료들을 기초로 설득력 있는 철학이론들을 내보인다.
그에 비해 김용석 교수는 온화하고 박식하며 다양한 문화현상에 대한 이해와 적용 능력이 훌륭하다. 서양 사상에 대한 총체적인 이해를 강조하고, 서양의 학자들을 기준도 없이 우연한 계기에 따라 과장 소개하는 한국의 지적(출판계와 학계) 풍토를 지적한다. 때로는 서양의 사상을 너무 옹호한다는 인상을 주기도 하고, 한국의 현실 상황과 맥락을 모른 채 보편성만 강조한다는 지적을 받을 법도 하지만, 기본 개념들에 대한 지식과 논리적 원칙에 충실한 토론 등이 돋보인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모더니즘을 넘어선 철학적 주제들에 대한 소개와 우주적 관점의 미래철학에 대한 기획이 기대를 걸게 한다.
물론 두 사람은 약점을 드러내기도 하고, 한 권의 책으로 담기에는 주제가 많아 독자들이 시원하게 느낄 만큼 논쟁을 계속하지 못하고 중단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가 하면 각자 자신의 생애를 보여주는 신변 이야기들과 한국인들과 서양인들의 생활문화 이야기들도 많이 포함하고 있어서 재미있고 유익한 정보를 제공한다. 수양과 인격을 강조하는 이승환 교수가 솔직하게 털어놓은 자신의 일상은 너무도 바쁘고 피곤한 것이다. 그래서 안식년에는 수개월간 지리산 사찰에 들어가 책을 읽고, 또 종종 수묵화를 그리기도 한다.
한 마디로, 이 책은 동양의 전통과 고전철학을 강조하고 거기에서 현재의 한국과 지구가 안고있는 문제들의 대안을 찾으려는 비판적 동양철학자와 우주적 관점에서 보다 넓은 안목과 희망을 강조하면서 비판보다는 이해에 비중을 두며 미래의 철학을 추구하는 서양철학자의 대담이다. 김용석 교수는 원자력 발전소가 적은 이태리를 소개하기도 하고, 첨단 과학과 철학적 상상력의 만남을 강조하며, '안전의 철학' '사이의 철학' '탈지구성의 철학'을 주장한다. 이승환 교수는 지구탈출 대신 기꺼이 지구에 남겠다고 말하면서, 땅에 뿌리를 내리고 땅으로 돌아가겠다고 선언한다. 윤리를 거부하는 친구 경제학자를 비판하고, 눈을 씻고 살펴봐도 '양심적 지성'이 보이지 않는 한국의 정계·재계·학계·언론계 현실을 한탄한다.
이 책의 장점은 철학적 대화 내용의 폭과 깊이가 상당한 수준이지만, 대화(토론) 방식이어서 지루하지 않고 역동성을 느끼게 한다. 그 대신 체계적으로 서술하는 것이 아니므로 골자를 파악하는 일이 간단치 않다. (물론 그것을 찾아가는 것도 또 하나의 재미이다.) 대담집을 다 읽고 난 후에 필요한 부분을 다시 정독하거나 저자들의 이론을 자세히 알기 위해 그들의 책과 논문을 더 읽기로 마음먹는 독자는 철학하는 삶에 동참하는 행운을 선택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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