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킵 네비게이션


분야별보기

트위터

페이스북

2014.1 | 칼럼·시평 [문화칼럼]
40년만의 귀향
김병종 교수(2014-02-05 13:49:47)

귀향이란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돌아간다 함은 떠나왔다는 뜻이고 떠나온 삶은 “부랑의 삶”이다. 부랑의 삶. 그렇다. 나는 40년 이상 부랑의 삶을 살아왔던 것 같다. 늘 “이곳 아닌 저곳”을 바라보았고, “멀리, 더 멀리”를 꿈꾸었다. 그런데 곰곰이 내 자의식의 한 풍경을 들여다보면 그 같은 부랑의 삶을 부추긴 원심력에 “고향의식”같은 것이 있었던 것 같다. 어찌 보면 모순된 이야기인데 “그리워하면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 의식인 것이다. 이런 복잡한 의식이 작용하게 된 데에는 내 고향 남원이 아주 작은 소읍이었다는 데에 기인한다. 산은 높고 물길은 유장한 곳이었지만 나는 “갇히운 듯한” 의식 속에서 유년을 보냈다. 30분만 걸어도 시내의 끝에서 끝에 닿고 마는 곳. 늘 보게 되는 그만그만한 얼굴들. 누구네 아들이 군대 가서 헌병이 되고 누구네 딸이 세무서 다니는 아무개 집 아들과 혼인했다는 정도의 소식들. 무엇보다 읽을거리에 기갈이 들려 있었지만 그 허기를 채워줄 만큼 책들은 충분하지 않았고 미술관이나 화집 같은 것 또한 꿈도 못 꾸었다. 물론 그 허기를 도도한 자연의 기운과 사시사철 바뀌는 그 색들이 채워주기는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였다. 그러나 “멀리 더 멀리”를 마음 저 밑으로부터 부추긴 것은 환영받지 못한 내 재능이었을 것이다. 그 당시 그림 잘 그리고 글 잘 쓰는 것은 엄하게 경계해야 될 안 좋은 조짐 같은 것이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상을 받았지만 그 두꺼운 종이로 종이비행기를 만들어 푸른 보리밭 저 멀리 날려버리고 집에 오곤 했다.

 

나는 중학교 2학년 때 이미 알베르 까뮈와 도스토예프스키로부터 이노우에 야스시, 그리고 니체와 노자 같은 것을(물론 번역본들이다) 읽었다. 물론 금병매와 꿀단지도 읽었다. 집 부근에 지금 백제대학 문예과에 재직하고 있는 시인 박환용의 집이 있었고 한약방을 했던 그 집 서재에는 문학소녀였던 그의 누나와 장성한 형들이 보는 책들이 벽 사면에 가득했는데 그것들을 거의 다 읽었을 뿐만 아니라 구절구절들을 암송하고 다니기도 했다. 예컨대 ‘이방인’의 “오늘 엄마가 죽었다.”라는 첫 구절에서부터 “그러면 안녕, 한동안 우리의 것이었던 여름의 태양이여.” 까지, 그리고 백치의 “무이수킨”공작의 말더듬 흉내와 레마르크의 “개선문”의 구절들, 앙드레 지이드의 “법왕청의지하도”의 구절들을 중얼거리고 다녔다. 왜 그랬을까. 외로움. 지독한 외로움 때문이었다. 감성의 날은 반짝거렸지만 고향에서는 그 비늘을 펴고 날아오르려 해도 받아줄만한 사람도 여유도 없었다. 그래서 침울하고 울적했다. 외롭고 슬펐다. 심지어 봄이면 아지랑이 속에 흐드러지게 피는 자운영의 그 아스라한 보랏빛도 슬펐고 지천으로 핀 노란 개나리도 울고 싶었다. 우리 집 가까이에 안숙선, 옥선 자매가 있어 판소리 연습하는 것이 담 넘어 가랑가랑 들려오기도 했지만 심지어 그런 가락마저도 외로움을 깊게 했다. 그 시절은 유난히 구슬픈 상두군의 요령 소리와 함께 쟁그랑 쟁그랑 문 앞으로 손종을 치며 상여 멀어가는 일도 많았고, 그 황홀한 꽃상여를 볼 때면 마치 삶의 죽음이 그냥 낮잠 속의 한바탕 꿈 같다는 느낌도 들었다.

 

열네 살 무렵에는 삶의 모서리 같은 것이 얼핏 보이는 것 같은 느낌이었고 어느 날 작정을 하고 유서 비슷한 긴 글을 일부러 어머니가 보기 좋은 곳에 두고 나갔지만 자정이 되어도 날 찾는 기색 같은 것은 없었다. 밤의 서리를 맞고 들어오니 어머니는 흘낏 쳐다보면서 “밥 안 먹고 어딜 싸돌아다니느냐?” 는 한 마디가 고작이었다. 그러다가 열일곱 살이 되던 해 새벽 찬 밥을 비벼먹고 열 세 시간 완행열차를 타서 내린 용산역이 내 기나긴 “부랑의 삶”의 출발점이 되었다. 그런데 기이한 것은 그런 떠도는 삶의 중심을 잡아주는 것이 바로 고향, 어머니, 혹은 그와 비슷한 그 어떤 원소 혹은 에너지 같은 것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도화지에서의 상처나 그와 비슷한 것을 당할 때면 나는 고속버스나 기차로 어머니의 고향 집으로 가곤 했다. 그이가 끓여주시는 매운 민물새우탕과 쑥국 같은 것으로 저녁을 먹고 함께 잠자리에 누워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다 보면 이미 치유는 시작된 것이다. 내 어머니는 내 나이 열두 살에 남편을 먼저 보냈지만 맹세코 단 한번도 힘들다거나 외롭다는 말씀을 입 밖에 내지 않는 대찬 분이셨다. 무엇보다 놀라울 정도의 유머 감각을 지닌 분이어서 삶의 어려운 국면들을 우스개 몇 마디로 넘기곤 했다. 이제는 어머니가 떠난 지 오래이고 어머니가 거하던 그 고향집은 스무 해 가까이 빈집으로 잡풀만 우거져 있다. 그러고 보면 고향이란 어머니의 다른 말이기도 했다. 얼마 전 내려가 한밤 중 녹슨 철 대문 틈으로 우리 집 마당이며 어머니의 방을 보고 돌아서는데 울컥하고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어둠속에서 손수건을 눈으로 가져가는데 “제발 좀 징징대지 마라. 이 엄살쟁이야. 어렸을 때부터 그러더니 평생을 그러는구나.”하는 책망의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나는 “알았어. 엄마” 하고 어둠 속에서 혼자 웃었다.

 

2007년 일이었다. 일군의 사내들이 내 작업실 초인종을 눌렀다. 무슨 기업 소속이라고 했다. 평생 만든 내 모든 작품을 사겠다고 했다. 사서 회사 자산으로 창고에 두겠다고 하여 큰 액수의 돈을 제시했다. 그 해에는 미술품이 투자 대상이 되었고 미술에 관한 모든 정보와 가격 등이 미친 듯이 날뛰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사내들이 등 너머로 한 소년이 서 있었다. 열 두셋쯤 될까 말까한 소년. 밥보다도 읽을거리 볼거리에 허기진 소년. 그래서 밤이면 몰래 “비운의 왕비 달기”, “검은 꽃잎이 질 때” “빨간 마후라”, “안시성의 혈투”, “엘시드”같은 총 천연색 극장 벽보들을 뜯어와 화집처럼 황홀하게 보곤 하던 그 소년의 모습이었다. 외롭고 슬픈 소년, 내 그림은 누군가의 창고에 처박아 둘 것이 아니라 저 소년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섬광처럼 단호하게 뇌리를 쳤다. 나는 그럴 생각이 없다며 사내들을 문간으로 배웅했고 그들은 떫은 표정으로 작업실을 떠나갔다.

 

그렇다. 내가 귀향한다면 그것은 그저 옛날이 그리워 과거로 회귀하는 귀향일 수 없다. 그랬다간 징징댄다고 내 옛날 어머니가 문간에 발도 들여놓지 못하게 하실 것이니, 돌아가면 나는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다. 무엇보다 색채에 허기지고 읽을거리에 배곯은 50년 전의 내 모습의 아이들과 만나고 싶다. 30년 세월을 온실 속의 화초처럼 길들여지고 온갖 응원을 받으며 미술학교에 온 아이들을 가르쳤으니 이제는 야생의 들풀 같은 그 시골 소년을 만나고 싶다. 손잡아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다며 가르치고 함께 구경도 하며 해설도 하고 싶다.  

 

바야흐로 귀향의 시대이다. 도시에서 상처받고 실패한 허다한 삶들이 고향행 열차에 고단한 몸을 싣는다. 물론 고향은 도회의 삶에 지친 우리 모두를 보듬고 껴안아 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무슨 상처와 실패의 보상 때문에 내려가려는 것이 아니다. 내가 늘 마음으로 빚진 한 소년, 늘 부채로 남아 있던 그 소년에게 빚을 청산하려 내려가고 싶은 것이다. 상장을 접어 종이비행기로 날려버린, 누구에게도 응원 받지 못한 재능을 숙명처럼 옆구리에 끼고 완행열차를 탔던 그 소년에게 빚을 갚고 싶은 것이다. 잘난 도회지 아이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마음껏 소리 질러 응원해 주고 싶은 것이다.

 

쓰다 보니 다시 울컥해진다. 엊그제 <문화저널>이 내게 <40년만의 귀향>이라는 제목을 주면서 글을 써보라고 했다. 제목을 받아든 순간 다시 어머니 생각이 났다. “자네가 무슨 대단한 인물이라고 몇 년 만의 귀향 어쩌고야.” 살아계셨다면 분명히 톡 쏘아댔을 것이다. 어머니가 안 계셔서 다행히 이 제목으로 그냥 쓰게 된 것이다. 그런데 쓰다 보니 자꾸만 울컥해지게 되어 좀 신경질이 난다. 평소 <문화저널>이 참 기특하고 장한 잡지라고 받아볼 때마다 속으로 놀라곤 했는데(왜냐면 창간 때 속으로 길어야 3년 못 간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이제 보니 남의 심사를 슬쩍 뒤집어 놓는, 참 나쁜 잡지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귀향할 것이다. 우선 몸보다 마음을 먼저 보낼 것이다. 그 곳, 한시도 잊어본 적이 없는 그 소년이 서 있는 곳으로.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