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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 | 칼럼·시평 [문화시평]
잡종의 시대에서 진정한 자아 찾기
창작극회 정기공연-빨간 피터 키스를 갈망하다
이상복 교수(2014-02-05 14:41:38)

‘안녕들 하십니까?’ 라는 유령이 우리 사회를 떠돌고 있다. ‘안녕들 하십니까?’ 라는 인사는 우리가 안녕하지 못한 시대에 살고 있다는 증거이다. ‘안녕 하냐’라는 익숙한 인사말이 이제는 도발이 되었다. 시대가 도발을 요구하고 있다. 2013 12 7일부터 15일까지 공연된 ‘창작극회’의 <빨간 피터 키스를 갈망하다> (정초왕 번역/연출, 곽병창 작) 역시 하나의 도발이었다.


<빨간 피터 키스를 갈망하다>는 아프리카 원숭이 ‘빨간 피터 Rotpeter’의 인간되기 과정에 대한 보고인 카프카의 <어느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에 독일로 입양된 한국 여인 ‘순이’의 이야기가 교직된 작품이다. 전체적으로 <빨간 피터 키스를 갈망하다>는 두 이야기를 교차시키면서 이른바 “중간형태인물”의 문제를 반성한다. 빨간 피터는 ‘원숭이-인간’이고, 순이는 독일인-한국인 (순이-헬레네)로서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다. 이런 혼란과정에서 피터는 순이에게 키스하고 싶어 한다. 키스는 사랑의 은유이다. 피터는 사랑의 감정을 통해 완벽하게 인간으로 변신할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이 성공할 수 있을 지에 대한 대답은 열린 상태로 막이 내린다.


<빨간 피터 키스를 갈망하다>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띠는 것은 ‘키스’이다. 이 작품에서 키스는 욕망의 또 다른 이름이다. 여기서 욕망은 단순한 성적 욕망이 아니라, ‘나는 누구인가?’라는 자신의 근원에 대한 반성이다.

5년 전 아프리카에서 포획된 빨간 피터는 살아남기 위해 ‘출구’를 찾는다. 그에게 출구는 인간처럼 되는 것이다. 인간처럼 말하고 술 마시고 행동하는 것이다. 그는 훈련에 훈련을 거듭하여 버라이어티 쇼에 출연하게 된다. 그는 학술원에서 어떻게 원숭이가 인간이 되어 가는지 보고한다. 이 과정에서 그는 자신이 원숭이이기를 원하는 지 인간이 되기를 원하는 지 고민하게 된다.

순이는 학술원 원로회원인 프란츠 박사의 딸로서 어릴 때 한국에서 독일로 입양된 인물이다. 피터가 보고를 하는 동안 순이는 피터의 간식을 챙겨주기도 하고, 피터의 보고에 대해 부연 설명을 해주기도 한다.

피터는 자신이 원숭이-인간이라는 사실에 괴로워한다. 그것은 원숭이와 인간의 냄새가 뒤섞여 있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장면으로 형상화된다. 순이 역시 자신의 정체성의 혼란을 호소한다.

“저는 헬레네라는 독일 이름을 가지고 독일 옷을 입고 독일 음식을 먹는 독일인이며 서양인입니다. 그러나 몸은 한국인입니다. 모순입니다. 모순이었습니다.

그녀는 이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출구를 찾는다. 그것은 철저하게 독일 여자가 되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 “그 때에야 저는 알았습니다. 저는 엄마 아빠에게 결코 완벽한 아이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순이는 양부모에게 사랑을 구하지만, 그것으로도 자신의 정체를 찾을 수 없다. 결국 순이는 피터에게 “나는, 나는 누구인가요?”라고 묻는다.

피터와 순이는 정체성을 상실한 인간의 알레고리이다. 피터는 “누군가와 사랑에 빠지고 서로 키스를 나누게 될 때, 마침내 인간세상으로 진입하는 그 마지막 빗장이 열릴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순이는 “인간들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행하는 수많은 폭력과 강압”을 알고 있기 때문에 사랑에 대해서도 확신이 없다. 피터는 ‘원숭이-인간’의 모순을 통해 인간 ‘선험적 근원상실’을, 순이는 ‘순이-헬레네’라는 분열을 통해 ‘경험적 근원상실’을 표현한다. 

<빨간 피터 키스를 갈망하다>는 사랑을 통해서 상실한 정체성을 되찾을 수 있는지 관객에게 묻고 있다. 그 답은 관객의 몫이다.


<빨간 피터 키스를 갈망하다> 무대는 단순하다. 왼쪽에 피터가 갇혀있던 우리가 있고, 대칭으로 오른쪽에 순이의 공간으로 티 테이블과 의자가 놓여 있다. 중간에 피터의 공간을 표현하는 상자가 놓여있다. 그 곳은 피터의 버라이어티 쇼 공간이기도 하다. 소극장의 협소한 공간을 확장하기 위해 객석을 학술원 보고장으로 편입시킨다. 피터의 쇼 공간을 영상으로 확장시켜 무대공간의 협소함을 극복하려 했다. 그러나 작품에 내재하는 우화적 의미를 관객에게 전달하기에 무대와 객석의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 이 연극이 추구하는 생소화 효과는 ‘이상하다’라는 의심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무대와 객석의 거리를 확보할 수 없었던 이번 공연에서는 ‘이상하게’ 인식되어야 할 내용들이 바로 관객들 앞에서 전개되었기 때문에 ‘이상하지 않게’ 전달되고 말았다. 너무 가까운 무대는 관객에게 일체의 환상을 허용하지 않았다. 인간이 되어가는 원숭이의 보고에서 원숭이를 찾기가 어려웠다.


창작극회의 공연은 언제 보아도 노련하다. 그래서 너무 익숙하다. 그만큼 신선한 느낌이 적다. 이번 공연에서 피터(홍석찬 분)와 순이(서형화 분)의 연기는 안정적이었다. 두 사람의 연기는 작품의 의도를 충분히 관객에게 전달했다. 그러나 연기가 안정되었다는 것은 다르게 이야기하면 연기의 특색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굴곡진 피터와 순이의 삶을 표현하는데 좀 더 ‘날 것’이 필요했다.

전체적으로 이번 공연은 너무 사실적이었다. ‘원숭이-인간’인 피터는 너무 말을 유창하게 했다. 입양아로 뿌리의 혼란을 느끼는 순이는 너무 안정된 모습이었다. 순이의 의상, 말투, 몸짓이 마치 숙달된 여자 사무원처럼 형상화되어 뿌리가 잘린 인물과는 거리가 있었다. 피터와 순이의 몸짓이나 말짓, 그밖에 의상 등을 좀 더 양식화시키고 부분적으로 과장했다면 공연이 전체적으로 활력을 얻을 수 있었을 것 같다.


이 시대는 모든 것이 혼종화 되고 잡종화된 세상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점점 우리의 근원을 상실해가고 있다. 내가 누구인지에 대해 반성하는 것이 낯설어진 세상이다. 이런 시대에 <빨간 피터, 키스를 갈망하다>는 진정한 나를 찾아가는 길이 무엇인지를 질문했다는 점에서 의미있는 공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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