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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1 | 칼럼·시평 [서평]
자잘한 일상 버무린 비빔밥
『비빔툰』(홍승우, 한겨레신문사, 2000)
윤희숙(2003-07-03 14:22:12)

신혼여행(honey moon)하면 보통 사람들은 뭔가 분위기 있고 야릇한 상상들을 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실제 첫날밤에 대해 물으면 너무 피곤해서 그냥 잤다느니 그저 그랬었다고 말하는 커플들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우리 부부의 허니문도 일반사람들의 상식을 뛰어 넘는 그런 것이었다. 우스운 얘기지만 우린 첫날밤을 돈 세는 일로 소일했다. 사실 많은 신혼부부들이 그랬을 것이다. 삶이란 것은 이런 식이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해본다. 모든 사람들은 동화 속에서처럼 낭만적이고 환상적인 걸 꿈꾸지만 삶이라는 것, 생활이라는 것이 무슨 이벤트처럼 거창한 것이 아닌 정말 사소하고 작은 일들의 집합체라는 것을 누구도 감히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비빔툰」은 특유의 재치와 유머로 이런 자잘한 일상에 의미를 부여한 여섯 컷(때론 네 컷, 다섯 컷으로 구성되는)짜리 만화다. 「비빔툰」은 한겨레신문에서 종종 만났는데, 다운이와 겨운이 엄마 아빠가 아이들과 함께 지지고 볶으며 사는 모습이 꼭 내 모습 같아 재미있게 보아왔던 만화이기도 하다.

책으로 선보인 『비빔툰』은 '너무 일상적이라 느끼지 못하는 것들, 때로는 지워지는 것들, 그런 감정들을 30대라는 이름 아래 만화로 엮은' 것이란다. 386세대라 일컬어지는 30대의 기록이라는 점이 이 책에 무한한 애정을 갖게 한다. 찬란한 젊음을 사회정의를 위해 바쳤고 이제 사회의 주역으로 떠오를 시기에 또다시 희생양이 되기를 강요당하는 386이라는 이름은 잠깐의 영광 뒤에 우울함이라는 더께를 눌러써야하는 불운한 세대의 전형이 되어가고 있다. 이런 30대 부부가 중심이 되어 부모와 형제, 아이들과 함께 가족이라는 하모니를 이루어 따뜻한 가족애를 느끼게 한다. 그래서 이 책은 각박한 사회로부터 부대끼며 고통받는 이들에게 한숨 돌리고 쉬어갈 수 있는 여유를 제공하고 있다. 그리고 그 여유 속에서 새로운 희망을 어렴풋이 읽어내는 일을 독자들의 몫으로 남기고 있다.

『비빔툰』의 주인공 정보통과 그의 아내 생활미는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캐릭터이다. 이들이 적령기에 만나 연애하고 우여곡절을 겪으며 결혼에 골인하고 새로운 가족관계를 맺고 또 다른 구성원을 창출해내는 과정 하나 하나가 마치 자화상을 보는 듯 어쩌면 그렇게 내 모습과 닮았는지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는 친근한 내용들로 구성돼 있다.

평범한 샐러리맨인 정보통씨가 겪는 사회생활의 어려움, 가장으로써 가져야 하는 무거운 책임감, 그리고 당당한 전문직 여성으로 사회활동을 하던 생활미씨가 결혼과 육아에 발목이 잡혀 그 동안 갈고 닦은 지식과 경험을 사장시켜야만 하는 쓰라림, 이런 것들은 결코 일방적인 희생으로만 단정지을 수는 없다. 그것은 가정 또는 가족이라는 큰 울타리를 꾸려 가는 중요한 버팀목수단이며 그러한 희생을 바탕으로 유지되는 가정 또는 가족은 구성원들에게 충분한 반대급부를 제공하고 있다. 그들은 가정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재충전의 기회를 제공받고 편안함과 안락함을 누릴 수 있다. 한 세대를 두고 보면 부모는 일방적으로 희생하고 자식들은 무조건적인 수혜자인 듯 보여지지만 삶이란 공평하지 않은가. 한 인간은 자식의 역할과 더불어 부모의 역할을 반드시 하게 돼 있다. 그런 관점이 아니더라도 자식이 부모에게 주는 기쁨은 어떤 세속적인 수치로 환산할 수는 없을 정도로 무한한 것이다. 자식이 부모에게 효도하는 기간은 생후 직후부터 세 살까지라 할 정도로 부모는 가장 힘든 육아기간 동안 오히려 자식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기쁨과 행복을 최대한 만끽할 수 있다고 한다.

『비빔툰』에서는 중심에 정보통씨 부부를 두고 부모인 정보원씨 부부, 노처녀인 누나 정보란씨, 아들 다운이 그리고 직장 동료들을 주변인물로 설정하여 폭넓은 세대의 감정과 삶의 애환을 간결하지만 세심하게 표현하고 있다.

이 책의 앞부분인 정보통씨 부부의 신혼여행기에서 신부와의 달콤한 첫날밤을 가슴 설레며 기다리던 주인공이 화장을 모두 지우고 나온 아내의 모습을 보고 까무라치는 상황에 한참을 깔깔대며 웃었다. 『비빔툰』의 매력은 여기에 있다. 한 꼭지 한 꼭지 읽을 때마다 때론 포복절도케 하고 때론 잔잔한 미소를 머금게 하는 그런 장점을 갖고 있다.

모든 언론과 방송매체들이 어려운 경제상황과 혼란스런 정치 판으로 우리의 마음을 무겁게 짓누른다. 하지만 『비빔툰』은 역으로 자잘한 일상을 소재로 힘겨운 사회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가정에서부터 찾아낼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하고 있다. 가족이라는 그릇 속에 가족 구성원이라는 온갖 재료들이 제 각각으로 뒤섞이어 참으로 맛있는 비빔밥을 만들어 내듯, 우리의 삶이 결코 고단하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그리고 그 맛있는 비빔밥을 독자들에게 선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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