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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9 | 칼럼·시평 [문화시평]
젊은 시각, 무한한 자유로의 행보를 위하여
서신갤러리 <젊은 시각전>
이상조 전북대 교수/미술학과(2003-07-03 15:52:51)
어떤 분이 물었다. “지역미술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지금 보는 유형의 미술이 지역에서는 집단화의 현상을 보이고 있는데 이것을 지역미술의 정체로 인정할 수 있나요?” 나는 그 날 분명히 그 분께 “아니오”라고 말씀드렸다. 지역에서 수 십 년을 변화없이 이어온 한 양식의 작품들이지만, 그 양식의 집단화 현상은 지역미술의 한 단면은 될 수 있으나 지역 정체성에는 미칠 수 없다고. 
미술의 역사를 되 집어 볼 필요도 없이 미술은 생명체와 같아서 살아 움직이고 있다. 다양한 가치와 신념이 더불어 공존하는 다원화된 오늘의 사회상황에서조차 변하지 않는 카리스마는, 더 이상 우리의 사고를 지배해선 안 된다.
서신갤러리에서 35세 미만의 젊은 작가들을 대상으로 8월 한달 간 기획 전시하는 ‘젊은시각전’은 ‘변하지 않는 카리스마는, 더 이상 우리의 사고를 지배해선 안 된다’는 명제의 의미를 높이고, 지역 미술의 다양한 흐름을 반영하며, 아울러 새로운 세기를 이끌어 갈 작가 층의 형성을 기대하는 갤러리의 의도가 돋보이는 전시회이다. 전년도와 마찬가지로 이번 전시도 3인의 작가가 연속적으로 개인전을 이어가는 형식을 기획함으로, 젊은 작가들의 시각을 집중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어느 시대이건 각 시대는 저마다의 지배적인 특성과 각별한 관심사 그리고 주도적인 이념을 갖는다. 만일 그러한 이념이 존재하지 않는 시대가 있다면 그 시대상은 어떠할 것인가? 오늘, 이 시대에 펼쳐지는 혼돈과 이념 부재의 현상을 아직도 세기말적 현상의 연장이라고 치부해 버릴 것인가? 아니면 이 시대에 나타나는 갖가지 징조 속에서 미래를 위해 우리가 찾아볼 수 있는 무엇인가를 찾아 길을 떠나는 일이 옳은 일일까? 이념 부재의 현상은 기존 질서의 붕괴와 해체의 수순을 밟으며, 오늘날 그 징조가 여러 양태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붕괴와 해체의 이면에는 새로운 질서의 탄생이라는 역설적인 징후를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이 우리가 눈을 밝히고 찾아야 하는 우리의 미래인 것이다. 
이 지역 미술의 혼돈 현상도 예외 없이 붕괴와 창조라는 역설적 구도를 보이고 있다. 따라서 새로운 모색이 있어야 새롭게 탄생할 수 있다는 자각이 필요하다. 이것이 우리가 젊은 시각에 관심을 갖고 기대하는 이유이며 ‘젊은시각전’ 이 지역에서 획득한 당위성이다. 
이번 ‘젊은시각전’에 참여한 3인( 김정인, 채성태, 조해준)의 시각은 모두 경중의 차이는 있으나 기존의 질서-예술, 도덕, 사회, 문명 등-에 대한 부정 혹은 저항에서 시작되고 있는 것이 흥미롭다.(채성태의 도드리는 지역 한국화단이나 보수적 성격의 한국화가들의 방법론을 부정하고 있다) 이러한 기존 질서에 대한 부정은 창조의 절대적 자유를- 미학적, 윤리적, 사회적 제약 없는-갖는다. 따라서 그들은 낯뜨거운 포르노그라피를 관람객의 코앞에 쳐 박거나(김정인의 골목), 자신의 거웃이 들어 난 것도 아랑곳 않고(조해준의 오래된 창조의 기억) 흥겨워한다. 이들의 한편 뻔뻔스럽기까지 한 창조의 자유를 누리는 태도는 그들이 인식했건 안 했건 젊은이들만이 갖는 특질이다. 또한 이 젊음의 특질은 때론 포악하리만큼 거칠게, 때론 무모하리만큼 커다란 작품의 규모로, 때론 얼토당토하지 않는 것 같은 상상력으로 힘차게 기존의 예술을 밀어 부친다. 아무튼 이들이 충격은, 그들의 논리나 방법론에 다소의 억지와 무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서신 갤러리의 기획의도에 똑 떨어지는 것이었다.
김정인은 어둡고 후미지고 숨기고 싶은 우리 사회의 뒷골목을 관객들의 면전에 까발렸다. 우리의 이면에서 은밀히 진행되어 오는 향락적인 거래와 욕지기나는 일상의 한켠을 갤러리의 강한 조명 속에 드러내 보이고 있다. 도덕과 질서에 대한 강한 부정은 때론 인간 정신에 반항하고 그 소산물의 가치를 거부하는 허무주의를 낳는다. 그녀가 갤러리의 강한 불빛 속에서 공론화 하고자 했던 것은 무엇일까? 젊은 한 때의 반항인가? 아니면 허무의 냄새를 피우는 교만일까? 김정인의 작업이 비슷한 유형의 다른 작업들과 구분되는 시점이 바로 이대목이다. 그녀의 작업을 소비 향락적인 물질문명의 삶에 대한 반성적 시각이며, 문명 비판적이라는 미학적인 접근도 가능하겠지만 이는 그녀의 진실을 모르는 상투적 접근이다. 그녀가 ‘작가노트-어떤 풍경’에서 잔잔히 기술한 그녀의 속내는 인간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다. 골목길을 배경으로 등장하는 인물들을 보자, 안내개에 이끌려 가는 정장한 맹인 안마사, 희미한 불빛에 숨어 애무에 정신 없는 남녀와 이들을 응시하는 또 다른 남자와 여자. 방뇨하거나 비틀거리는 취객. 김정인은 그곳에서 ‘사람을 만나고 있다’ 모든 관람객을 당황케 한 음란물에 가까운 포르노그라피 속의 여자조차도 ‘우리 이면의 삶의 모습이기에’ 강한 갤러리의 조명 아래서도 부끄럽지 않고 오히려 ‘마음이 시원하다’.
채성태의 작업은 외견상 부드럽고 부침이 없다. 그러나 그의 작업에는 이 지역 한국화단에 대한 거대한 음모가 도사리고 있다. 하지만 건방을 떨지 않아 모습이 보기도 좋다. 하기야 건방을 떨면 어쩌겠는가마는. 그가 살아온 ‘궁벽한 오지’의 자연을 닮아 작품은 자연 친화적이기도 하며 반면 까탈스럽기도 하다. 그는 한국화의 오랜 전통적 방법과의 절교를 시작으로 그의 특질을 드러낸다. 그의 작업은 끝이 모호한 단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작업의 과정이 확연히 드러나는 화면의 구조가 물성을 드러내고 방법론을 강조하는 그의 컨셉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그러나 예술은 현실과의 역동적 관계를 가질 때에 그 의미를 더한다. 그의 작업에 지독한 장인정신이 배어 있음에도 작가의 뚜렷한 조형 의식이 읽혀지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조해준은 ‘한 인간의 영적 태도가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 어떠한 영향을 미치게 되는지 탐구하고 사색하는 일’을 그의 예술의 밑바탕으로 삼고 있다. 이러한 상상력은 어찌 보면 황당하게 느껴지나 ‘사물은 화학적 물질의 결합체라는 시각에서 벗어나, 영이라는 정신적 요소에로의 접근을 추구’하려는 자세는 논리적으로 타당하고 칭찬해 주고 싶다. 조해준의 이런 상상력은 콜럼버스의 달걀과 다름 아니다. 
인간의 상상력과 그 실현을 추구하는 인간의 노력은 문명의 발달을 가져 왔다. 그러나 문명의 발달이 인간 행복의 높은 지표가 되지 않는다. 비교해 보라. 현대에서 아귀다툼하며 의?식?주를 해결하는 우리와, 오염되지 않은 해변에 누워 끼니때에 맞춰 물고기를 잡아 식사를 하는 원시인의 행복 지수를???. 
애초의 인간 시각의 조그만 차이가 거대한 결과를 초래한다. 필자가 조해준의 상상력에 관심을 갖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그가 지금 작품으로 드러낸 의식은 그의 많은 수사적 노력에도 불구하고 물성을 너머 정신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음을 본다. 경계하라. 돌진하는 영. 다스려라. 그 파장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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