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킵 네비게이션


분야별보기

트위터

페이스북

2011.1 | 칼럼·시평
故리영희 선생님을 추모하며
관리자(2011-01-06 14:31:39)

故리영희 선생님을 추모하며 


 나는 슬퍼하지 않았다 - 정도상 소설가 

故리영희 교수 걸어온 길 

1957년 합동통신 정치부 기자 1965년 조선일보 외신부 부장 1972~1995 한양대학교 신문방송학 교수 1987년 미국 버클리대학교 한국현대사 초빙교수 1989년 주한외국인협회 자유언론상 1995년 한양대학교 언론정보대학원 대우교수 1997년 한겨레신문 비상근이사, 고문 1999년 제4회 늦봄통일상 2000년 제4회 만해상 실천상 2006년 제1회 단재언론상 및 제1회 기자의 혼상 2007년 제9회 한겨레통일문화상 2008년 후광 김대중 학술상 2010년 별세 

1990년의 어느 날, 프랑스 영화 <까미유 끌로델>을 보았다. 영화가 시작된 지 오래지 않아 파리의 골목마다에서 사람들이쏟아져 나오며 소리를 질렀다. “빅토르 위고가 죽었다.” “위고가 죽었다.” 어린 꼬마들도 사람들 틈에 섞여 골목을 뛰쳐나가며 빅토르위고의 죽음을 파리 시민에게 알리고 있었다. 1885년 5월이었다. 까미유 끌로델이 텅 빈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던 그장면이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인터넷이 없던 시대, 거장의 죽음은 사람들의 발과 목청으로전해졌었다. 그러나 지금은 미디어가 신속하게 거장의 죽음을전달해준다. 컴퓨터 모니터 화면에서 가볍게 접하게 되는 거장의 죽음은 그래서 더 서글펐다. 바로 옆 사람의 생생한 목소리에 담긴 어떤 슬픔이나 아쉬움이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거장의 떠남 시대의 거장들이 하나 둘, 곁을 떠나고 있다. 문익환, 김대중, 김수환, 리영희라는 이름에는 한 시대가오롯이 담겨 있다. 기억하건데, 그들은 언제나 시대와불화(不和)했다. 시대가 그들을 불화의 밀실로 유폐시켰지만, 그들은 굴하지 않고 광장의 한 복판에 서 있곤했었다.

얼마 전, 리영희 선생께서 불귀의 객이 되었다. 돌아오지 않는 나그네가 되어 시대의 우상(偶像)을 뒤에 두고 떠나고 말았다. 리영희 선생은 떠나기 전, 우상의시대가 되돌아온 것에 대해 한탄했었다.‘거장이 떠났다’라는 말은 그의 언어가 죽었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시대와 불화하면서 거장들은 시대의 변화를 촉구하는 패러다임의 변화를 언어로 표현했다. 그들의 언어는 단순히 언어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사람들에게 전달되었고, 사람들은 기꺼이 변화를 위한행동을 수용했었다. 더 이상 거장의 언어를 듣고 볼 수없다는 것은 시대적 손실을 뜻한다. 

2010년 12월 5일리영희의 언어는 그 존재를 마감했다. 그 이전까지 리영희의 언어는 그 시대와 불화하며 존재했었지만 이젠더 이상 존재할 수 없다. 물론 과거의 언어를 찾아 그의미를 되새김질할 수는 있다. 그렇지만‘지금 여기의언어’는 더 이상 생산되지 않을 것이다. 오늘 리영희선생의 부존재(不存在)가 뼈저리게 아픈 것은 바로 이때문이다. 유랑의 거장 리영희 선생은 유랑자였다. 그 이름도 황량하고 쓸쓸하게 느껴지는 평안북도 삭주에서 출생하여 온 생애를 유랑하면서 보냈다. 그의 유랑은 지리적인 것이 아니라 언어적이며 동시에 철학적이었다. 기득권이나 욕망에 안주하는 자를 정착민이라고 부른다면, 리영희는삶의 다른 조건이나 지평을 추구하며 시대의 곳곳을떠돌았다.진실이 그 가치를 획득하는 순간은 언제나 그것의불편함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랑자들은 진실을 직시한다. 

반면에 권력자들은 진실을 왜곡하고, 정착을 꿈꾸는 대개의 민중들은 진실을 알고자 하지 않거나 혹은 외면해버린다. 불편한 진실과 직면하는 순간 기득권을 포기하고 시대와 불화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유랑자들은 끊임없이 민중의 귀에 진실을,그 불편함을 속삭인다. 그러기에 제도나 시스템 혹은법률로 권력이나 권위를 소유하고자 하는 자들은 유랑자들의 존재 자체가 늘 버거웠다.

유랑자들은 먼 곳을 향한 사색과 관조를 추구하며미지의 세계로 나아갔다. 미지의 세계를 유랑하면서성을 쌓고 인간에 대해 고문, 감옥행, 암살, 학살, 전쟁등을 일삼는‘권력의 사적 소유자’들에게 언제나 싸움을 걸어왔다. 민중들과 학생들은 서서히 진실과 만나게 되고 잠들어 있던 거대한 몸을 깨웠다. 4.19, 5.18,6.10으로 불리는 그 항쟁의 도화선을 붙잡고 불을 붙인 최초의 인간은 언제나 유랑의 거장들이었다. 

리영희 선생 역시 유랑의 거장들 중한 사람이었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 무엇을 추모할 수 있을까? 거장들의 유언과 유산을 정리하면서 슬픔에 빠지는것을, 나는 경계한다.언제든지 전면전으로 바뀔 수 있는 일촉즉발의 포성들, 포성을 둘러싼 강대국들의 숨가뿐 계산, 인권이라는 이름을 가진 반인권, 대법원의 판결에도 불구하고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지 않는 자본의 욕망들,고도성장의 그늘에서 밥을 굶는 어린아이와 노인들,이주노동자들과 외국인 아내들의 슬픈 눈빛, 그리고보통의 사람들에게 드리운 경제적 공포를 망각할 권리가 내게는 없다.적어도 문화를 통해 상처를 바라보는 사람이라면,언어를 통해 미지의 세계를 가닿고자 하는 지식인이라면, 세계의 변두리를 유랑하며 거장들이 남긴 씨앗들을 돌보고 가꾸어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추모가 되지않을까? 그것이 유랑자 리영희 선생이 떠나는 것을 바라보면서도 슬퍼하지 않았던,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지않을까?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