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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2 | 칼럼·시평
[내인생의멘토] 서예가 여태명
관리자(2011-02-14 11:23:28)

서예가 여태명 


실천과 작품으로 정신을 깨우치는 스승 - 박병규 서예가 


연일 동장군의 날씨는 매서운 기세로 세상의 모든 만물을 꽁꽁 얼어붙게 하고 있다. 문득 소야스님의 술타령 시구가 생각난다. “날씨야 네가 아무리 추워봐라 내가 옷 사 입나 술 사먹지” 열정과 정열 막걸리 한잔과 정말로 잘 어울리는 분이 있다. 바로 효봉 여태명 선생님이다. 


이 추운 날씨에도 중국에 갔다 오신다고했는데 잘 다녀오셨는지 궁금해진다. 학교가 겨울방학을 하고 자주 뵙지 못하고 있다. 몇 해 전부터 주말이면 함께 한옥마을 거리에서 작은 행사를 하며 전주를 방문하는 외지인들과 만나고 있다. 행사가 끝나고 나면 어김없이 막걸리 집으로 향하여 막걸리 한잔에 목을 축이지만 선생님은 여기저기에서 아는 사람들과 인사를 하느라 잠시도 함께 할 틈이 없다. 


이렇게 늘 선생님은 사람들 틈에서 사람들과 만나면서정(情)을 나누고 있다. 아무리 술을 많이 드셔도 다음날이면어김없이 일상의 일과를 보시면서 하시고자 하는 일, 해야할 일들을 철저하게 하고 계신다. 옆에서 많은 시간을 함께하진 않지만 정말로 부지런하시다는 생각이 든다. 익산의 학교, 김제의 작업실, 전주의 집, 진안 용담의 미술관, 때로는서울 그야말로 쉴 새 없이 움직이시면서 모든 일을 처리하고계신다. 


선생님이 자주 하시던‘열정과 정열’로 사신다는 말이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피할 수 없었던 인연… 호남평야의 한 복판인 시골의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그나마크다는 읍내로 중학교를 진학했지만 한 학년에 4반밖에 없는 중학교였다. 집에서 학교까지는 5km정도, 버스를 타면10분정도 되지만 자전거를 타고 다니기도 하였다. 시골생활이 그렇듯이 나는 도시아이들처럼 문화의 혜택은 거의 받지못했다. 


그래도 읍내의 중학교다 보니 이런저런 특별활동부가 있었다. 정말로 피할 수 없는 인연이라……. 때마침 지금은 고인이 되신 여산 권갑석 선생님께서 교육청에 계시다 교장선생님으로 부임하시면서 특별활동부에 서예반을 신설하였다. 권갑석 선생님은 교육계에 계시면서 우리나라 근현대서예계에서 커다란 족적을 남기신 분으로 지금도 제자들이 왕성하게 한국서예계에서 활동을 하고 있다.나는 당시 어떤 생각에 서예 반에 들어갔는지는 모르겠지만서예 반에 들어가 글씨를 쓰기 시작했다. 선생님께서 한글서예 교본 한권을 주시면서 시간 나시는 데로 실기 지도를 해주셨으며 우리는 주로 그 교본을 혼자서 익히는 방법으로 글씨를 써 나갔다. 


시골학교라 하얀 화선지에 글씨를 쓴다는것은 엄두도 못 내고 신문지에 글씨 연습을 하였고 선생님께서 화선시를 조금씩 사다 주실 때마다 그야말로 금지옥엽으로 아까워서 잘 쓰지도 못했다. 지금 생각하면 아무것도 모르고 정말로 그 한글교본만을 열심히 보고 따라 썼던 것 같다. 나는 그래도 큰누님이 일찍 전주에 살다보니 신문지 구하기는 별로 어려움이 없었다. 어머님이 전주에 다녀오실 때마다 한 아름의 신문지를 가지고 올 때면 나는 커다란 선물을 받은 것처럼 기뻐했던 기억이 있다. 방학을 해서도 또래친구들과의 놀이는 뒷전으로 하고 자전거 뒤에 한 뭉큼의 신문지를 싣고 학교로 향해 글씨를 쓰곤 했다. 


덕분에 나는 시골의 읍·군의 작은 대회든 전주의 큰 대회든 나가면 상을타곤 하였다. 그때는 학교 수업을 공치고 대회에 나가면 점심으로 자장면을 먹을 수 있었기에 그야말로 물 만난 고기격이었다. 몇몇 친구들은 그런 나를 보고 함께 글씨를 열심히쓴 친구들도 있다.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서예와의 인연은 그렇게 작은 나의 발견으로 중학교 시절을 이끌었다.시대가 인재를 만들고 인재는 그 시대를 움직여 나간다고등학교 시절에도 글씨에 대한 생각은 언제나 내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고 있었으나 당시 서예는 일반 학원에서 사숙형태로 이루어지고 있었고, 글씨를 써서는 대학에 과가 없기때문에 그림을 그려볼 생각도 했으나 당시 그림공부를 하기에는 비용이 너무 많이 들었고, 집안 형편상 엄두도 내지 못하였다. 그렇게 나의 고등학교 시절은 조금은 밋밋하게 흘러갔다. 


첫 번째 대학에 실패한 나는 재수를 하기 시작했고 글씨에 대한 생각은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대학의 원서를 쓸 무렵 대학에 처음으로 서예과가 신설된다는 소식을 알게 되었고 나는 대학진로를 다시 생각하기에 이르렀고, 진로를 변경하겠다고 하는 나에게 집안에서는 심하게 반대를 하였다.그렇게 해서 두 번째 대학진학도 실패를 하고 방황하고 있던나에게 집에서 허락을 하게 되었고 누님 지인의 소개로 여태명 선생님을 만나게 되었다. 


선생님께서는 전주에 시내 중심가에서 서예학원을 운영하고 계셨고, 대학입시반을 신설하여 이미 제1기 서예과에 학생들을 입학을 시키고 다음 연도를 대비한 입시반이 운영되고 있었다. 그렇게 글씨와의 인연은 선생님과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나는 세 번째 만에 서예과 2기생으로 대학에 진학을 하게 되었다. 선생님께서는 누구보다도 빠른 선견으로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서예과 입시 반을 신설하여 인재들을 육성하기 시작했고 상당한 숫자의 학생들이 선생님 문하에서 공부하여 서예과에 들어가게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선생님께는 서예과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고 대학교서 계속 가르침을 받게 되었다. 


당시 항상하시던 말씀이 입시공부 때 했던 공부는 단지 입시를 위한공부였으니 모두 잊어버리고 대학에서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라는 말씀이 지금도 기억이 난다. 그만큼 대학 서예과는기존의 사숙관계로 이루어지던 서예를 대학의 정규 학과에서 여러 선생님들에게 체계적인 수업을 받게 되어 당시 서예계에 커다란 이목이 집중되고 있었고 서예도 하나의 학문으로 자리를 잡아가게 되었고 서예과에서는 서예계의 새로운인재들을 만들어 배출하게 되고 그 인재들은 이미 서예계의한 축으로 시대를 움직여 나가고 있다. 


예술인으로서 동반자 우리가 알고 있는‘콜롬버스의 달걀 세우기’라는 신대륙을발견한 이야기가 있다. 남이 한 것을 뒤에서 보면 누구라도간단하게 할 수 있지만 그것을 처음으로 한다는 것은 정말로어렵다는 말이다. 역사적으로 한 예술가가 새로운 것, 자기만의 길을 개척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주관적인 사고가 대중의 객관성을 확보하기란 어쩌면 모든 예술가들의 바람일지도 모른다. 


언젠가 한옥마을에서 한글서예 특강 때 하신 말씀이 생각난다. 어느 나이드신 분이 한글을 선생님같이 그렇게 써도 되냐는 질문에 지금의 글씨를 쓰기까지의 여정을 이야기 하신 적이 있다. 선생님의 자서(自書)에보면 이런 글이 있다.“선비연하는 태도로 그들에게 독야 청정할 만큼 감정이 무디지 못해많은 시간들을 번뇌로 마음을 괴롭히다가 제가 만난세계가 바로 백성들의 글씨였습니다.


도자에 각인된 한글, 서간에 나타난 그 고졸한 숨결, 거기에는 비록 기교는없으나 절제된 균형이 있고, 자연스러움이 있고, 호탕한 기상이숨어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거기에는 삶이있고고통이있고,‘ 사람’이살아숨쉬고있었습니다.장고소리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장고를 쳐대는 사람의 모습도같이 어우러져 있는 격이었습니다.”이러한 백성들의 글씨를 고전으로 삼은 선생님은“고전, 즉옛것은 도서관과 같다. 


우리가 공부하다 모르는 부분이 있으면 도서관에 가서 책을 찾아보듯이 옛 일반 백성들의 좋은글씨를 선별하여 연구하고 새로운 것을 시도해 보다가 막히면 고전을 다시금 펼쳐서 공부하고 또 새로운 것을 찾아 시도해 본다.”고 하셨다. 지금의 글씨 공부는 고전을 공부하는단계에만 오래 머무르고 있지 도서관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있다는 말이었다.


이렇듯 선생님은 언제나 옛 것을 연구하고새로운 것을 찾으려고 스스로 노력하시는 모습으로 언제나내 곁에 제자들 곁에서 함께하고 있다. 제자들과 자리를 할때면“어떻게 해라”라는 말씀보다는 스스로 행동으로 작품으로 보여주고 있으며 언제나 제자와 스승의 사이가 아니라동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예술인의 동반자로서 함께 하시자고 한다. 언젠가 선생님께서 서로들 나이가 들었을 때 시골의 정자나무 아래에 모여서 막걸리 한잔 기울이자는 말씀이생각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제는 건강을 조금은 챙기시기를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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