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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3 | 칼럼·시평
[문화시평] 석지 채용신, 붓으로 사람을 만나다
관리자(2011-03-04 18:28:33)
석지 채용신, 붓으로 사람을 만나다 (2월 15일~3월 27일)

국립전주박물관 잊혔던 조선 전통 초상화 맥의 자랑스러운 복원 - 이철규 예원예술대 교수 

석지(石芝) 채용신(蔡龍臣)1850~1941)은 무관집안출생으로 1886년 고종 37세 때 무과에 급제하여 무관과 군수를 역임한 인물이다.1899년까지 부산진(釜山鎭) 수군첨절제사(水軍僉節制使)를 끝으로 무관직을 그만두고 전주에 내려와 기거 하던 중 그의 일생에 중대한 일이 발생한다. 찬정(贊政) 민병석(閔丙奭)추천으로 1900년태조어진을 모사할 수 있는 어용화사로 불려가게된 것이다. 조석진(趙錫晉, 1852~1920))과 함께주관화사(主管畵師)로 임명되어 태조어진을 모사(模寫) 제작한 그는 그 다음해인 1901년에는 재주를 인정받아, 고종이 직접 본인의 어진제작 명하여 고종의 어진을 완성하였다.

그리고 당시 어진제작 노고로 고종으로부터 남다른 총애와 함께 포상으로 금관조복과 역서(曆書),석강(石江)이라는 호를 하사받고, 벼슬도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 정3품(正三品)으로 승진한 후 칠곡군수와 정산군수를 지내게 된다. 이후 1906년정산군수(定山郡守)를 마지막으로 관직을 그만두고 전라도지방(전주, 익산, 부안, 진안, 정읍 등)에내려와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시작하였다. 마지막 어진화사, 뒤늦은 주목을 받다 그의 생애를 살펴보면 많은 의문점이 생긴다. 

관출신으로 그림을 누구에게 사사 받았다는 기록도 없고, 전문적인직업화가도 아닌 채용신이 어용화사로 태조어진 모사(模寫)와 고종의 어진을 제작하였다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아마타고난 예술적 감각과 재주, 그리고 각고의 노력으로 남다른초상화를 제작했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하는 추측을 할 뿐이다.채용신의 작품은 1943년 화신화랑에서 50여점을 전시되었고, 1951년 일본학자 구마가이노부오(熊谷宣夫)가 채용신을 학계에 처음 소개했으나 그가 다시 세상의 관심을 받기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현대에 들어와 채용신의 초상화작품이 관에서 운영하는박물관에 처음 선을 보인 것은, 내 기억으로는 아마도 90년대 중반 전주국립박물관에서 개최되었던 전북근대작가전에채용신의 초상화작품(이덕응상)이 출품되면서부터이다. 이어 2001년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미술관에서 그의 대표적인 초상화작품 60여점을 모아 대대적인 전시회를 개최하면부터 세간의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다 볼 수 있다.

특히 고종황제를 친히 도사(圖寫)※ 한 마지막 어진화사로서 알려지면서 그 주목도가 더해져 작품의 가치가 더 한층높아졌으며, 그의 일대기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게되었다.본인이 15여 년 전부터 전통초상화에 관심을 갖고 채용신의 작품과 그의 일대기를 공부하면서 의문스러웠던 것은 고종황제(그림1) 어진을 제작한 어진화사로서 그 유명세가 현대에까지 계속 이어질 법도 함에도 묻혀 있다가 재조명을 받게 됐다는 점이다.

채용신은 작품의 양적, 직절인 측면에서도 근대 주요작가로서 자리매김을 해올 수 있는 충분한 당위성을 갖추고 있음에도 2000년도에 들어와서야 여러 학술 및 연구논문들이 발표되고, 전시회가 열리기 시작했다. 이는 그가 조선시대 통틀어 위대한 초상화가로서 충분한 자질과 조건을 가지고 있는 반면 이를 저해하는 요소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학자들은 채용신이 지방에서 주로 활동하였고 작품이 초상화에 집중되었다는 점, 대부분 주문제작을 하다 보니 문중이나 개인소장 작품이 많아 쉽게 세간에서 볼 수 없었다는 점, 그리고정식 직업화가가 아닌 무관출신이기에 동료화가나 중앙화단과의 연결고리가 없었던 점을 들고 있다.

학자가 아니라 전통초상화를 전공한 본인의 입장에서는조금 다른 견해도 제시하고 싶다. 그의 초상화작품들에서 나타나는 기법들을 시대별로 관찰해 보면 어떤 일정한 틀에 치중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한 기법에 친숙해져 있다보니 회화사라는 큰 틀에서 보면 천부적인 손기술과 재주는있되 한 획을 그을 수 있는 과감한 변화와 혁신은 부족했다는 아쉬움이 드는 것이다. 이것이 그의 유명세를 현대까지이어오는 데에 작지 않은 걸림돌이 되지 않았나 싶다. 

전통 초상화 기법을 완성한 화가 석지 채용신의 초상화작품의 작품세계를 논하기에 앞서먼저 조선시대 초상화에 대한 성격과 시대적 배경(근대~19세기중엽부터 20세기중엽)을 먼저 파악해보는 것이 순리이며, 채용신의 초상화작품을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이되리라생각한다.조선시대의 초상화는 수와 질적, 양적인 면에서 괄목할 만한 발달을 보여 왔으며 진전(眞殿)제도로 인해 왕의 초상화가 지속적으로 제작되었고 일반사대부로까지 확대되어 사묘(祠廟)에 봉안되었다. 이외에 승상(僧像)초상도 적지 않게 제작되어 조사당(祖師堂)을 조성 봉안하였다. 

이렇듯 조선시대의 초상화는 대부분 숭모(崇慕)의 대상으로 제작되었다.고려양식을 그대로 이어받은 조선전기 및 중기 초상화의특징이 뚜렷한 필선과 선염에 의한 명암처리라면, 후기에는서양화법의 영향으로 음영법(陰影法)과 요철법(凹凸法)이 도입되면서 의습선이 점점 사라지고 명암이 대신하게 된다. 특히 안면부분을 무수한 세필로 중첩하여 명암을 주는 기법이활성화돼 조선말기 채용신에 이르러 그 절정을 이루게 된다.또한 기법면에서도 전신사조(傳神寫照)라는 화론아래‘터럭하나라도 똑같지 않으면 그 사람이 아니다(一毫不似便是他人)’라는 명제를 가지고 놀랄만한 발전을 가져온 시기였다.채용신의 초상화작품에서 나타나는 기법과 특징은 첫째,얼굴부분의 뛰어난 관찰력과 이를 바탕으로 극세필로 안면의 육리문(肉理紋)을 묘사하는 표현기법. 둘째, 배채(背綵)시안면부분에 호분(胡分)을 칠해 얼굴 부분을 현실감 있게 표현한 점. 셋째, 직접성을 강조하기위하여 정면상을 주로 그렸다는 점. 넷째, 바닥에 화문석 돗자리를 주로 그렸으며 제작년도에 따라 그 기울기가 다르다는 점. 다섯째, 손과 신발의 묘사를 적극적으로 했다는 점. 여섯째, 1900년대 초에는구한말 우국지사(최익현, 황현, 전우, 이병순, 기우만, 이덕응 등)들을 주로 제작하여 조선의 독립을 독려하였다는 점을들 수 있다.이러한 기법과 특징들이 비교적 잘 나타나있는 대표작으로는 이번 전시에 출품되지 못했지만 한말의 거유였던 황현(黃玹)(그림2)과 이덕응(李德應)상(그림3)을 들 수 있다. 

대상인물의 생김새뿐 만 아니라 인격까지도 표현한 채용신 평생의 작품관을 대변해 주는 탁월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이렇듯 채용신은 조선시대 초상화의 원칙이라 할 수 있는전신사조(傳神寫照)를 비교적 충실히 수행한 대표적인 작가로 고종어진까지 제작한 탁월한 작가였다.반면 노년에는 공방을 차려 사적 계급에 관계없이 명령과요청에 따라 다양한 계층의 초상화를 제작하였다. 특히 1920년 이후 제작되는 초상화들은 사진술을 결합(노년에 거동이어려워 사진으로 주문을 맡아 집에서 작업하였다는 기록이있음)하여 초상화를 제작하다보니 내면묘사의 심미나 기량도 점점 떨어지게 되는 데 이 점이 채용신의 작품세계를 평가할 때에 아쉬움으로 작용한다는 점을 간과 할 수는 없을것이다. 더 많은 연구와 조사가 필요하다 채용신은 격동과 변혁의 시대를 살았던 화가이다.

또 한국전통 초상화의 기법을 완성한 작가이다. 어진화가이면서 대중초상화를 제작한 작가이다. 무관이면서 전문직업화가를 능가하는 뛰어난 기량의 소유자이다. 한국회화사상 초상화를가장 많이 제작한 작가이다. 이러한 그의 업적에 비해 과소평가되어 온 것 또한 사실이다.다행히도 최근 채용신의 작품세계에 대한 많은 연구와 평가가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전통초상화에 대한 연구가 아직다양성과 전문성을 담보하지 못하고 있는 환경에서 그에게다가갈 때에는 더 많은 신중함이 필요하다. 필자는 위에서 언급한 채용신이 과소평가된 이유들을 명쾌히 밝힐 수 있는 방향으로 연구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만 그에게 쏠린 이 뒤늦은 관심을 그가 응당 받아야할 정당한 평가로바꿀 수 있으리라 믿기 때문이다.마지막으로 채용신의 초상화 작품을 10여년 만에 한곳에서 만날 수 있도록 전시를 기획한 박물관 관계자에게 깊은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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