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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3 | 칼럼·시평
[서평] 돈의 달인, 호모 코뮤니타스 - 고미숙 지음
관리자(2011-03-04 18:32:14)

돈의 달인, 호모 코뮤니타스 │ 고미숙 지음 


그녀의 상상력이 현실이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 이휘현 KBS전주방송총국 PD 


배고프고 마음 시리던 대학원생 시절의 일이다. 평소 가깝게 지내던 교수님으로부터잠시 보자는 연락을 받았다. 무슨 일인가 싶어 연구실로 급히 찾아가니 뜻밖의 선물이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 서울의 모 대학으로 자리를 옮기게 된 교수님이 나에게 매혹적인 제안을 했던 것이다.급하게 이사를 하게 되어 서울의 아파트를 구하지 못했는데, 5개월 후 쯤 이사할 계획이니 그 때까지 자신의아파트에 대신 들어와 살라는 것이었다. 


아파트 관리비및 가스비 전기세 수도세 등 모든 거주 비용의 일체도교수님 자신이 부담하겠다고 했다. 나야 마다할리 없었다. 스물 네 평짜리 새 아파트에서 젊은 남자 혼자 경제적인 부담 없이 생활을 영위할 수 있다는 데 누가 마다하겠는가.대신 그 교수님은 조건을 하나 달았다. 아파트에서열심히 공부해 좋은 석사 논문을 하나 쓰라는 것이었다. 그 전부터 교수님은 내가‘공부의 달인’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여러 차례 피력하신 바 있었다. 나는 그러겠다고 했다. 그리고 며칠 후 대학 기숙사에 있던 짐을 새로운 거처로 옮겼다. 그렇게 서른 살 청년의흥겨운 아파트 생활이 시작되었다. 


지금에 와서 회상해보아도, 그 때 만큼 행복했던 적이 없다. 아파트 곳곳에쌓여 있던 책과 음반들. 베란다 창 너머 황방산 자락이아름답게 펼쳐져 보이는 아담한 거실은 내 최고의 안식처였다. 몸과 마음 모두 최상의 건강 상태를 유지하던시절이었다….문득, 8년 전의 그 시절을 떠올리게 된 것은 고미숙의 책 <돈의 달인, 호모 코뮤니타스>를 읽고 나서다.진짜배기‘공부의 달인’고미숙의 이름이야 익히 알고있었지만, 나는 그 동안 그녀의 저작에 손을 대본 적이한 번도 없었다. 딱히 싫었던 것은 아니고 그다지 읽고싶다는 기분이 들지 않았던 탓이다. 


잘은 모르지만,‘수유+너머’의 사람들에게서는 항상‘배고픈 공부장이’의 이미지가 떠올랐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사실 알고 보면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이었는데 말이다. 여하튼, 황방산 자락 아파트에서의 다섯 달을 빼면 배고픔반 서러움 반의 대학원생 시절을 보낸 터라, 나는‘수유+너머’사람들의 책을 통해 또‘궁상맞은 시절’의추억(?)을 환기하고픈 마음이 추호도 없었던 것이다.그런데 이번에는 사정이 달랐다. 공부벌레 고미숙이‘돈’에 대해 이야기 하다니. 그것도‘돈의 달인’이라니! 공부만 하는 줄 알았던 그녀에게도 재테크의 노하우가 있었단 말인가? 


진정 공부(토익 공부, 고시 준비하는 것들 말고, 진짜 공부!!)만 죽어라고 하면 돈은 저절로 따라온단 말인가? 이런 신선한 물음이 나를 사로잡았다. 그런 궁금증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나는 이책을 단숨에 읽어버렸다. 고미숙이라는 공부장이에 대한 막연한 이미지 탓에 사실 굉장히 딱딱한 논문형 글이 아닐까싶었는데, 그건 말 그대로 기우였다. 책은 일단 재미있었다. 생활 언어로 축조된 파닥파닥 살아 숨 쉬는 문장들이나를 사로잡았던 것이다. 거기에 저자 고미숙의 개인적 체험들이 절절하게 녹아있다 보니 읽는 재미가 배가 되었다.


원래 남의 인생 엿보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지 않은가.허나 안타깝게도(?) 이 책에서 고미숙은 부자가 되는 테크닉을 설파하지 않는다. 알고 보니 애초에 그럴 마음도 없었다. 대신 돈을‘잘 쓰는’방법을 이야기 한다. 그렇다고여기서 말하는‘돈을 잘 쓰는 테크닉’이 우리가 익히 짐작하는 그런 것하고 같은 것이냐, 하면 그게 또 그렇지 않다.고미숙이 이 책을 통해 전하고자 하는 바를 인용해 보자면이렇다.문제는돈이아니라,‘ 돈의용법’이라는것. 어떻게쓸것인가? 어떻게 변용할 것인가? 어떤 관계와 활동을 창조할것인가? 창조와 리듬과 강도가 높아질수록 증여의 힘 또한‘세’진다. 창조와 증여 사이의 어울림과 맞섬!돈에 관한 모든 것이‘교환가치’로만 대접받는 이 살벌한자본주의의 시대에, 고미숙이 설파하는 돈의 달인이란, 알고 보니‘증여’의 달인이었다. 


정확하게 등치되는 풀이라고할 수는 없으나 좀 더 생생한 언어로 표현하자면‘베풂’정도라고 할 수 있을까.큰 욕심 부리지 말고 자신이 만족할 만한 삶에 필요한 최소한의 돈만 소유하라. 그 잉여의 산물들은 또 다른‘최소한의 만족’을 필요로 하는 빈 곳에 투자하라. 그렇게 소탈한‘안분지족安分知足’의 성채들이 잉여의 돈들에 의해 차곡차곡 완성되어 나아가면, 적어도 이 세상은 지금보다는훨씬 행복해질 것이다. 내가 독해한 이 책의 요지는 대충이런 것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정리하고 보니‘고미숙의 자본론’, 참 아름답다. 돈의 흐름에 연료가 되어주는 것은 소유욕이 아니라 바로 아낌없이 주는‘사랑’이라는 거 아닌가.그런데 자신이 소유한 돈을 교환가치가 아닌 증여가치로업그레이드 시키는 일이란 결코 쉽지 않다. 사랑마저도 기브 앤 테이크가 보편화 된 이 시대에 조건 없는‘순수 증여’의 경지가 얼마나 현실 속에서 실현될 것인가 하는 회의감이 앞서는 것도 그 때문이다. 


고미숙은 자신과 자신 주변의몇몇 실례를 통해 증여의 현실화를 강변하지만, 그녀 같은사람, 이 세상에 그리 많지 않다. 그렇다고 증여가 아예 비현실적인 방법론이라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우리 주변에서도 곰곰이 들여다보면 증여의 징후들은 여기저기서 포착되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가 그걸 쉽게 알아채지 못할 뿐이다. 당장 나만 해도 그렇다. 이 글의 서두에서 얘기한 좋은증여의 사례가 있지 않은가.하지만 저자 자신의 주변 몇몇 사례나 해외 사례 몇 건으로 이 자본주의라는 무시무시한 체제에 대한 대안을 제시한다는 건 좀 허망한 일이다. 


더군다나 고미숙을 둘러싼 생활환경은 우리 같은 범인(凡人)들의 눈에는 일상적인 것이라기 보단 매우 특별한 그 무엇으로 비친다. 쉽게 말해 논리를 위한 표본 추출이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다는 얘기다. 표본의 양도 빈약하고. 좀 더 많은 시간과 고민, 다양한 표본과 사회적 상상력이 보태어졌더라면, 마르셀 모스의 <증여론>을 뛰어넘는 대작이 나왔을 법 한데, 그저 범작에 머무른 듯 해 좀 안타깝다. 훗날 두툼한 개정판이 나오길 바라는 것도 어쩌면 이 때문일 것이다.그래도, 이 책 속에는 촌철살인의 문장이 하나 서슬 퍼렇게 살아 숨 쉬고 있는데, 나는 이 한 문장만으로도 도서 구입비가 아깝지 않았다! 책의 주제와는 다소 거리가 있지만,독자 여러분들에게 이 문장 하나 만큼은 꼭 인용해 보여드리면서 글에 마침표를 찍고자 한다.대학에서 취직공부 하지 마라. 그건 자신의 청춘을 모독하는 바보 같은 짓이다! -7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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