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킵 네비게이션


분야별보기

트위터

페이스북

2011.4 | 칼럼·시평
[문화칼럼] 인간의 지성은 진화한다
관리자(2011-04-12 15:49:41)

인간의 지성은 진화한다 - 이남곡 장수 좋은마을 대표


나는 지금까지 혼자 여행해 본 일이 거의 없다. 아마도 앞으로는 가끔 그럴 것 같아서 혼자 하는 여행을연습도 할 겸 마침 마음을 내서 남도(南道)의 봄을 만나려 훌쩍 떠났다. 오늘은 강진에 있는 다산초당에 들렸다. 꼭 한번 와보고 싶은 곳이었다. 그냥 떠나기가 아쉬어 일박을 하기로 하고 친절한 민박집 주인의 컴퓨터를 빌려 부탁받은 글을 쓴다. 왠지 이 글 제목과 어울리는 분이 바로 이곳에서 200여년 전에 그 왕성한 저술활동을 하셨다는 생 각이 들어 감회가 특별한 것 같다. 근래 나는 반지성적인 경향이 우리 사회에 알게 모르게 꽤 퍼져 있고 때로는 위험할 정도로 느껴질 때가 있다. 사실 인류가 이 지구 상에 출현한 이래 다른 존재와 구별되는 진화를 해 올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높은 자유(自由)욕구와 지적(知的)능력에 힘 입은 것이다. 


자연적(물질적) 제약으로부터 자유를 확대해 온 것도, 사회적 제약으로부터 자유를 확대해 온 것도 이 자유욕구가 동기가 되고 지적능력이 추진력이 되어서 이룩해 온 것이다. 마침내 인류는 보통의 사람들이 인간의 관념이 갖는 부자유의 원천인 아집(我執)으로부터의 자유를 추구하는 단계에까지 진화해 왔다고 생각한다. 아집은 자기중심적인 완고한 관념이다. 이 완고함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자유인 것이다. 이것은 과거에는 특별한 성인의 세계였으며, 종교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보통의 인간지성의 세계로 되고 있는 것이다. 이 역시 그 자유욕구가 동기가 되고, 그의 지적능력 즉 지성이 추진력으로 되어 확대되는 자유인 것이다.


이것은 당연한 발전이며 그 동안 인간의 고도한 행위능력과 자기중심적 가치체계의 모순 때문에 발생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핵심적인 영역인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저항하고, 이것을 거부하는 흐름들이 있다. 우선 생각되는 것은 과거 마르크스레닌주의로 대표되던 완고한 관념이 북한의 개인숭배로 왜곡되어 마침내 삼대세습의 시대착오적 망령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현실적으로 우리의 삶과 진보를 위협하는 것으로 되고 있다. 사실 마르크스 자신은 대단히 과학적인 사람이어서 과학 그 자체는 완고함과는 거리가 먼 것인데, 이것이 이른바 공산당의 권력을 위한 무오류의 사상이론으로 되면서 가장 완고한 종교의 하나로 되었다. 나는 근래 논어를 뒤늦게 접하고, 공자 사상의 탁월함 특히 인간 지성에 대한 태도에 감동을 받고 있는데, 왜 과거에 그렇게 알아보려고도 하지 않고 비판 반대하였는지 자괴감을 느낄 때가 많다. 나의 태도가 옳지 않았던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지만, 공자의 사상이 왕조 시대 권력을 합리화하는 수단으로 이용되어 완고한 관념으로 변질된 것도 그 이유의 하나였다고 생각한다.


요즘 중국에서 공자 바람이 불고 있는데, 또 다시 국가의 권력 이데올로기로 굳어져 공자와는 관계가 없는 반지성적 완고관념으로 변질되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또 한 가지는 종교계의 완고 관념이다. 사실 이것이 역사적으로 세계분쟁의 큰 원인으로 되어 온 것이 사실이고, 지금도 중동을 비롯한 세계도처에서 평화를 위협하는 핵심 원인의 하나로 되고 있는 것이다. 자기가 믿는 신(神)이나 교리(敎理)가 절대적으로 옳으며, 다른 신이나 교리는 잘 못되어 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다종교국가로서 그 동안 종교 간의 평화공존이 이루어져 온 전통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대단한 문화국민이라는 긍지를 갖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요즈음 일부 종교인들의 공격적 태도가 우려를 갖게 한다. 나는 특정 종교를 신봉하지는 않지만, 모든 고등종교와 종교인들을 존경하고 있는 사람인데, 이 공격적 태도가 결국 반지성적 태도로부터 나온다고 생각한다. 불성(佛性)이나 영성(靈性)은 인간의 가장 고귀한 지성(知性)이다. 그런데 이것을‘인간의 지성 밖에 있는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면, 그래서 진리는 인간 지성을 초월해서 오는 것이라고 생각해 버리면‘내가 믿는 것이 곧 진리’로 되어버리고 만다. 원천적으로 다른 사람의 생각은 받아들일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사실 자기가 생각하는 것이 진리에 부합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사실을 잘 보면 믿는다는 것은 결국 자기의 판단력을 믿는, 즉‘지성’안에 속하는 것이다.


인간 뇌수의 작용인 것이다. 이것을 애써 부인하는 것은 마치 그것을 인정하면 신성을 모독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그것은 신성을 모독하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오히려 인간의 불완전한 지적능력을 가지고, ‘이것이 신성이다’라고 단정하는 완고한 관념이 신(神)이 실재(實在)한다고 할 때 오히려 신(神)을 모독하는 것으로 될 것이다. 불성이나 영성은 가장 숭고한 인간의 품성이지만, 이것을 지성과 분리시키려는 반지성적 태도는 결국 해를 끼칠 뿐이다. 또 하나는 요즘 일부 급진적인 사람들 가운데‘지금까지 인류가 걸어온 길이 과연 진보인가?’라고 하면서 문명 자체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입장이다. 많은 사람들이 인간중심적인 자연에 대한 약탈적 개발이 지금 인류가 봉착하고 있는 총체적 위기의 원인이라는 생각에 동의를 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을 깨닫고 그 해결을 자연과의 조화를 바탕으로 하는 새로운 문명을 창조하는데서 찾으려고 하는 것 또한 인간의 지성이다. 자연생태계의 조화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것과 우주 자연계 안에서 인간의 특성을 이해하고 그것을 잘 살리려는 것은 서로 모순되는 방향이 아니다. 문명 이전의 원시부족의 아름다운 생활(생각하기 나름이지만, 문명의 세례를 이미 받은 사람이 과연 그와 같은 생활에 적응할 수 있을까?)은 보호되어야할 대상인지는 몰라도 미래의 대안은 아니다. 과도한 문명부정과 원시문화에 대한 동경은 지성적인 태도라고 보기 어렵다. 보편적인 것은 더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인류가 우주자연계의 암세포와 같은 역할을 그만두고, 그 특성을 잘 살려서 우주자연계의 신경세포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인간의 지성 또한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진화하는 것이다. 그 종착점이 어딘지는 몰라도 아마 우리가 신성(神性)이나 불성(佛性)으로 부르는 그 곳이 아닐까!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