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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 | 칼럼·시평 [이슈]
우리가 다시 얻은 위대한 문화유산, ‘장수가야’의 실체
장수 대규모 가야고총군 발견
곽장근 군산대학교 교수(2012-01-05 13:49:40)

가야는 기원을 전후한 시기부터 6세기 중반까지 영남 서부지역에서 호남 동부지역에 걸쳐 존재했던 소국들의 총칭이다. 그런 가야를 소개할 마다 따라 붙는 수식어가수수께끼의 왕국혹은비운의 왕국이다. 이유는 김부식에 의해 편찬된『삼국사기』에서 가야의 역사를 다루지 않았기 때문이다. 본래부터 가야의 역사 기록이 없었는지, 김부식이 가야사를 외면했는지 아직은 없다. 다행히 80년대부터 실체를 조금씩 드러낸 가야의 역사와 문화는 삼국과 어깨를 견줄 만큼 우수한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가야의 역사 기록이 발견되고 있지 않아, 여전히 시대구분도사국시대 아닌삼국시대 통용되고 있다.



가야계 소국으로 발전했던 장수가야


우리나라의 국토를 동서로 갈라놓는 백두대간 산줄기 서쪽에 장수가야가 있다. 장수가야는 가야 영역의 북서쪽 경계로 줄곧 백제와 국경을 맞댄 어려운 상황에서도 가야문화를 기반으로 가야계 소국으로까지 발전했다. 그렇다면 가야계 소국으로 성장할 있었던 결정적인 원동력은 무엇인가? 하나는 영호남의 상징적인 관문인 육십령 장악과 다른 하나는 진안고원 일대에 그물망처럼 갖춰진 내륙교통망을 직접 관할했다는 점이다. 백두대간과 금남호남정맥 산줄기가 장수군 외곽을 병풍처럼 든든하게 감싸준 천혜의 자연환경도 빼놓을 없다. 백제의 중앙과 섬진강유역을 최단거리로 연결해 주던 한성기 백제의 간선교통로가 장수군을 통과하지 않는 지정학인 이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장수가야의 존재가 처음 알려진 것은 1993년이다. 그해 군산대학교 박물관에서 문화재 지표조사를 실시하는 과정에 장수군 천천면 삼장마을 주민들의 결정적인 제보가 있었다. 마을 주민들의 매장문화재에 대한관심과 제보로 가야토기편이 1500 동안 잠에서 깨어났다. 지금 돌이켜보면 삼장마을 주민들이 장수가야를 알리고 빛낸 최고의 고고학자들이다. 당시 밭둑에서 우연히 발견된 가야토기편은 동전만한 크기로, 외면에는 가야토기의 상징적인 문양인 물결무늬가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이를 계기로 장수군과 문화재청으로부터 지원을 받아 장수가야의 분묘유적을 중심으로 발굴조사도 간헐적으로 추진됐다. 지난 10월에는 장수가야의 실체와 역사성을 조명하기 위한 39 한국상고사학회 전국학술대회도 장수읍 현지에서 열렸다.현재까지의 지표조사에서 발견된 장수가야와 관련된 문화유적은 종류가 매우 다양하다. 가야계 문화유적 분묘유적이 가장 많은 양을 차지하고 있다. 가야계 수혈식 석곽묘는 냇돌과 깬돌을 이용하여 장방형 석곽을 만들고 시신과 유물을 부장한 다음 대형 개석을 덮고 봉분을 씌운 구조이다. 장수군에 산재된 석곽묘 중에서 가장 관심을 것은 역시 고총(高塚)이다. 고총은 봉분의 직경이 20m 내외되는 대형무덤으로, 주인공은 가야의 지배자 혹은 지배층으로 추정된다. 가야계 고총은 대체로 사방에서 눈에 보이는 산자락 정상부에 입지를 두었는데, 그것은 봉분을 산봉우리처럼 보이게 함으로써 주인공의 권력과 권위를 극대화하려는 의도가 담겨있다. 장수군 일대에 가야계 고총은 장계분지에 120 기와 장수분지에 80 기가 남아있다. 여태껏 백제문화권에 속했던 곳으로만 인식된 호남지방에서 가야계 고총이 무더기로 발견된 것은 장수군이 처음이다. 영남지방에서도 단일 지역 내에 200 기의 가야계 고총이 밀집된 곳이 거의 없을 정도로 매우 이례적이다. 장수 삼봉리·동촌리 가야계 고총군에서 4080 기의 고총이 무리를 이루고 있는 점에서 장수가야가 상당한 기간 동안 존속했을 가능성도 암시해 주었다. 동시에 장수가야가 백제에 정치적으로 복속되지 않고 발전했다는 결정적인 증거이다. 장수 화양리 고총은 봉분의 직경이 30m 이상으로 당시 장수가야의 강력했던 힘을 한껏 전해준다. 장수 삼봉리·동촌리 가야계 고총을 대상으로 학술발굴이 이루어졌다. 결과 봉분의 평면형태가 장타원형으로 서로 인접된 다른 고총과는 얼마간의 거리를 두었으며, 봉분의 가장자리에서 호석을 두르지 않은 것으로 밝혀졌다. 봉분의 중앙에 주석곽이 자리하고 주변에는 13 내외의 순장곽이 배치된 다곽식이다. 장수가야의 가야계 중대형 고총은 봉분의 평면형태가 장타원형을 띠고 있으면서 가장자리에서 호석시설이 발견되지 않아 영남지방의 고총과 뚜렷한 차이를 보였다. 그러나 운봉고원에 지역적인 기반을 두고 가야계 소국으로 발전했던 운봉가야의 지배자 무덤인 남원 월산리·두락리 고총과는 서로 긴밀한 관련성을 보였다.



장수가야, 봉수 산성의 왕국


흔히 봉수는 (:횃불) (:연기)로써 변방 급한 소식을 중앙에 알리던 통신제도이다. 우리나라에 신식우편 전기통신이 도입되기 이전까지 일반 국민들의 개인정보를 전달하지 않고, 오직 국가의 정치·군사적인 전보기능만을 담당했다. 그리하여 가야계 고총과 함께 가야계 소국의 존재여부를 가늠해주는 고고학적인 증거이다. 전북 동부지역에 집중적으로 배치된 80 개소의 봉수가 장수군을 여러 겹으로 에워싸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처음 발견된 삼국시대 봉수들로 존재만으로도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아직까지 차례의 발굴조사도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백제의 동태를 파악할 목적으로 장수가야에 의해 봉수망이 구축된 것으로 판단된다. 한편 장수가야의 존재를 고고학적으로 증명하기 위해서는 고총군과 인접된곳에 규모가 산성이 있어야 한다. 장계분지와 장수분지 서쪽에 포곡식 산성인 장수 침령산성과 합미산성이 있다. 성돌은 대부분 두부처럼 방형 혹은 장방형으로 다듬었는데, 후백제 견훤의 왕성인 전주 동고산성 성돌과 모양이 거의 비슷하다. 현재의 성벽은 가야토기편과 백제토기편, 삼국시대 기와편이 성돌과 성돌 사이에 끼여 있는 점에서 견훤에 의해 증축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견훤이 잠시 올라 쉬었다는왕바위 장수 합미산성 동쪽 기슭에 자리하고 있어 가능성을 증명해 준다. 장수가야의 존재를 암시해 주는 포곡식 산성들로 장수가야에 의해 초축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백제는 웅진으로 도읍을 옮긴 이후 정치적인 혼란에 빠지면서 갑자기 영향력을 상실한다. 그러나 대가야를 비롯한 가야의 소국들은 5세기 후반부터 급성장하면서 주변지역으로 영향력을 확대해 나갔다. 무렵 장수가야도 백제의 정치적인 혼란기를 틈타 교통의 중심지이자 전략상 요충지인 금강과 섬진강 상류지역으로 진출을 모색한다. 진안군과 임실군, 충남 금산군 일대에서는 가야계 분묘유적이 새롭게 등장했지만 가야계 고총으로는 발전하지 못했다. 그리고 교통의 중심지이자 전략상 요충지인 진안군 주천면과 임실군 관촌면, 금산분지에 산성 봉수가 집중적으로 배치된다. 아마도 장수가야의 진출과 그에 따른 백제를 방어하기 위한 방어체제의 구축으로 여겨진다. 장수가야는 백제 선진문물의 수용과 대가야와의 교류관계를 바탕으로 5세기를 전후한 시기에 등장해 가야계 소국으로 발전하다가 6세기 초엽 백제에 복속된다. 웅진 천도이후 백제가 정치적인 혼란에 빠졌을 장수가야의 서북쪽으로의 진출이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하여 백제 무령왕대인 6세기 전반기부터 삼족토기 백제토기가 장수군 가야계 분묘유적에 부장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산봉우리의 남쪽 기슭에다 입지를 장수 무농리·침곡리 전형적인 백제고분도 곳곳에 만들어진다. 백제에 정치적으로 복속된 이후에는 내륙교통망이 사통팔달했던 장계분지에는 백이[]군이, 장수분지에는 우평현이 설치되었다. 우리는『삼국유사』에 등장하는 6가야의 존재만 기억하고 있는데, 일본이나 중국의 문헌에 등장하는 가야는 수가 20 개를 넘는다. 금관가야와 대가야, 소가야 등은 70년대부터 학술조사가 활발하게 이루어져 실체가 상당부분 밝혀졌다. 최근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장수가야의 경우만 유일하게 모든 것이 베일 속에 드리워져 있다. 더욱이 삼국시대 백제문화권에 속했던 곳으로만 인식된 전북지역에서 발견됐기 때문에 가야사에 대한 인식전환이 요구된다. 앞으로 장수가야의 실체를 밝히고 알리는 장수군과 전라북도 행정당국의 정책적인 지원과 함께 지속적인 관심이 절실히 요망된다. 동시에 21세기문화의 전쟁시대 장수가야의 정체성이 담긴 가야문화유산을 미래의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기 위한 보존대책 정비방안도 조속히 마련됐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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