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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3 | 칼럼·시평
[서평]『밤은 책이다』이동진 지음
관리자(2012-03-07 16:10:33)

책무지, 마음을 경작하는 쟁기질

장미영 전주대학교 교수


독서라는 행위는 읽고 있는 순간들의 총합이 아닙니다. 독서는 바깥세상의 흐름에서 벗어나 책 속에 구현된 세계 속으로 뛰어들 때 시작되지만, 책 속의 세계에서 언뜻 일렁이는 어떤 그림자의 의미를 다시금 이 세상에 되비쳐 볼 때 비로소 완성되기도 합니다. 책읽기란 결국 철조망이 촘촘하게 쳐진 뻘밭 같은 세월 속을 헤쳐 나가는 우리의 서툰 포복술 같은 것인지도 모릅니다. - 이동진, 『밤은 책이다』, 8쪽 中-


책을 먹는 애벌레


‘꽃무지’라는 곤충이 있다. 아름다운 이름처럼 이 곤충은 꽃가루를 먹고 자란다. 꽃무지들은 꽃에 모여서 꽃과 꿀을 섭취하며 애벌레에서 어른벌레가 된다.이동진은 꽃무지를 떠올리게 하는 사람이다. 꽃 대신 책을먹는, 책무지 정도로 이동진을 소개할 수 있겠다. 영화평론가로 널리 알려진 저자는 다양한 책을 섭렵하기로도 유명하다.여러 방송과 매체를 통해 책에 대한 남다른 사랑을 토로했던저자는 자신의 말을 입증하려는 듯 77권의 책을 인용하고 감상을 적은 토막글을 모아 책으로 펴냈다.이동진의『밤은 책이다』는 책을 향한 저자의 허기와 갈증을드러낸 독서 에세이다. 장르 구별 없이 능란하게 읽어낸 저자의 독후감에 외골수 독자들은 탄성을 지른다. 1만 권이 넘는 책을 닥치는 대로 사들이고도 여전히 덥석덥석 책을 집어 든다는저자의 독서 스타일은 뚜렷한 목적 없이 진행되는 만성적인 습관처럼 여겨진다.그러기에‘시간과 연민, 사랑에 대하여’라는 책의 부제 또한목적지향적인 느낌이 없다. 풍부하고 풍성한 느낌을 줄 뿐이다. 저자가 주장하는 인문학적 소양이란 양적으로 풍성하고 질적으로 풍부한 독서에서 길러진다는 메시지를 주는 듯하다.이동진이 문학, 음악, 영화, 여행 등 문화 전반을 가로지르며문화를 가지고 놀 수 있게 된 것은 이처럼 다채로운 책을 먹고자랐기 때문이구나. 오늘의 그를 만든 요소가 무엇일까에 대한의문에 새로운 해답을 발견한 느낌이다.

촉각으로 책읽기

책 읽는 밤이란 비 오는 밤, 눈 오는 밤과 같이 마음을 움직인다. 사랑하는 사람이 사랑 받는 사람에게 낮은 음성으로 속삭이듯, 『밤은 책이다』는 감성적이면서 수다스럽다. 밤을 잊은그대에게 보내는 늦은 밤 라디오 목소리 같기도 하다.

도스또예프스끼의 <백야>는 그의 소설들 중에서도 가장 아름답고 서정적인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는 초기작이지요.‘감상적 소설, 어느 몽상가의 회상 중에서’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이 러브 스토리 중에서 너무도 사랑했던 여인 나스젠까로부터 결별을 고하는 편지를 받은 직후의 주인공의 격렬한 내면이 담긴 마지막 부분을 읽어보겠습니다. 나스젠까는 이 편지에서 결국 옛 애인과 결혼하기로 결심했다고 밝혔지요.(154쪽)

이 책은 책 한 권을 단숨에 읽어내려야 직성이 풀리는 속독지향형 독자에게는 맞지 않다. 남의 서재를 몰래 들여다보는 심정으로 이 책을 대하는 독자는 엿보기의 긴장감이 없어 맹숭맹숭한 느낌을 받을 지도 모르겠다. 무릎을 치면서 욕조를 뛰쳐나가는 아르키메데스 식의 지적 희열이나 새로운 발견을 기대하는 독자 또한 이성적인 날카로움을 찾기 어려워 싱겁다고 할 것이다. 『밤은 책이다』라는 표제처럼 이 책은 잠들기 직전 깊은 상념에 빠져드는 시간을 마련해주는 책이다. 그래서 이 책은 앞에서부터 차근차근 읽어 내려가기보다는 순서 없이 손에 잡히는 대로 여러 날에 걸쳐 기분 따라 한 편씩 읽는 편이 더 좋은 책이다. 이 책은 어떤 대상이나 현상을 보고 즉각적으로 느끼는 깨달음의 세계, 즉 직관으로 시작하여 직관으로 끝나기 때문이다.직관의 사이사이에서 켜켜이 일어나는 상념들의 바스락대는몸부림을 온몸으로 받아낼 수 있는 독자라야만 깊은 밤 달빛 아래 눈처럼 곱게 피어나는 독서꽃의 진한 향을 맡을 수 있다. 떠나보낸 날들, 돌이키지 못할 날들, 맞아들일 날들을 조용히 더디게 떠올릴 수 있는 독자라야만 이 책에서 한 땀 한 땀 공들여쓴 어휘들과 문장들의 진한 맛을 알아차릴 수 있다. 이동진은『밤은 책이다』를 통해 몸으로 읽는 촉각적 책읽기를 선보인 것이다.


복고 취향


어떠한 강요도 받지 않고 어슬렁거리며 책밭만을 누빌 수 있는 현대인이 얼마나 될까.『밤은 책이다』는 자본주의체제의 무한경쟁사회에서 치열하게 살아야하는 일터의 일꾼들에게는 공상을 즐기는 배부른 자의 복고 취향쯤으로 읽힐지도 모르겠다.『밤은 책이다』를 독파하고 나면 느긋하게 책밭을 산책하며여유롭게 책들을 구경한 19세기의 책 관광객이 된 듯한 기분이든다. 원 없이 책 여행을 한 것 같다.저자가 이끄는 대로, 글자 표면 아래 깊숙한 곳, 즉 내면의 세계에 도취되었다가 빠져나온 순간은 가슴이 텅 빈 것처럼 허허롭다. 유난히 경기침체의 기운이 을씨년스럽게 다가오고‘월가를 점령하라(Occupy Wall Street!)’는 구호 아래 신자유주의의 기조 전반을 뒤흔들고자 나선 젊은이들의 분노가 빠르게 확산되고 있는 오늘날, 『밤은 책이다』는 뜬금없이 분위기를 잡는생뚱맞은 책처럼 보인다.현실이 각박할수록 산수화가 번창했다던가. 산수화는 낭만적이며 상징적인 동경의 대상이었다. 그래서 숨어살던 지식인들이 세속보다는 자연을 벗 삼고 자연과 정담을 나누는 현실도피적인 생활의 하나로 산수화를 즐겼다던데.『밤은 책이다』도 산수화 못지않게 공상적이고 낭만적이다.각박한 현실을 바꾸려면 우선 책밭에서 스스로의 마음을 비옥하게 경작해야 한다고 자조하면서 허허로움을 달래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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