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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5 | 칼럼·시평
[보는 영화 읽는 영화] <이민자>
관리자(2012-05-14 10:57:38)


 아버지의 이름을 넘어 성찰하는 인간의 이름으로 김경태 영화 평론가 한때 미국은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기회의 땅으로서 제3세계 사람들에게‘아메리칸 드림’을 안겨줬다. 그러나 신자유시대의 도래와 테러와의 전쟁 선포이후, 미국은 유래 없이 폐쇄적인 국가가 되어 가난한 이민자들에게 가혹한 국가로 돌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과거의 영광을 잊지 못한‘벌거벗은 생명’들의 발길은 오늘도 이어진다. 그런 의미에서 올 초 개봉한 한지승 감독의 가족 코미디 <파파>(2012)는 그 아메리칸 드림에 대한 흥미로운 변주로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초인종적이고 비혈연중심적인 가족 가치의 옹호는 미국이 망각해버린 아메리칸 드림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일깨워준다. 그리고 여기, 크리스 웨이츠 감독의 <이민자>(A Better Life, 2011)는 한층 진중하게 물음을 던진다. 진정한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기 위해 우리가 지켜야할 가치는 무엇인가? 미국에서 정원 돌보는 일을 하며 생계를 꾸려나가는 멕시코계 불법이민자‘카를로스(데미언 비쉬르)’는 아들‘루이스(호세 줄리안)’와 단둘이 좁은 집에서 살아간다. 유일하게 딸려있는 방 하나는아들에게 내어준 채, 카를로스는 거실소파에서 매일 밤 고단한 몸을 누인다.카를로스의 소원은 아들이 좋은 직업을얻어 미국사회의 당당한 일원이 될 수있도록, 지금보다 더 나은 환경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많은 돈을 모으는 것이다. 루이스는 그런 아버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학교생활에는 별 흥미가없다. 급기야 동료학생을 때려 정학을맞기에 이르지만 아버지에게 미안한 기색조차 보이지 않는다. 그는 아버지의잔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침대에 누운 채 등을 돌린다.대략적인 줄거리만 보고서 <이민자>를 먼 타지에서 자식을 위해 온갖 희생을 무릅쓰는 불법이민자 아버지의 무한한 부성애와 이를 뒤늦게 깨달은 탕아의막심한 후회를 포착한 가족 신파쯤으로치부해서는 안 된다. 이 영화는 카를로스가 불법이민자이자 아버지이기에 앞서 윤리적 인간으로서 스스로를 배려하고 성찰하는 과정을 세심하게 포착한다.단적인 예로, 그는 자신의 생명과도 같은 트럭을 훔쳐간 동료 이민자를 겨우찾아내지만, 그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것조차 용납하지 않는다.특히 영화 초반부의 한 시퀀스는 성찰하는‘산보객’으로서의 그의 심성을 느린 호흡으로 담아낸다. 그가 팍팍한 일상에서 잠시나마 여유를 만끽할 수 있는시간은 출퇴근길의 트럭 안에서이다. 일터를 향해가는 트럭 안에서 그는 세상과거리를 두고 사람들을 넌지시 관조할 수있다. 그는 차 창밖으로 다양한 계층과인종집단들의 일상을 따뜻한 눈빛으로바라본다. 그것은 부러움의 눈길이자 호기심 어린 눈길이기도 하다. ‘꽃사슴 고기’라는 간판이 선명한 한국인 식당 앞에서 티격태격 몸싸움을 하는 한 무리의동양인, 랍비 복장을 한 유대인 가족의 행차, 그의 응시를 위협적인 시선으로 되받아치는 멕시코 갱스터들, 서핑을 즐기는 남자와 애완견과 조깅을 하는 여자 등등. 여유롭게 삶을 즐기거나 아등바등거리며 사는 인간 군상들의 모습 안에서 생의 의미를 곱씹는다. 이처럼 그는 생활고에 시달리면서도 주변에 시선을 돌리며 반성할 수 있는 자세를 견지하고있다. 그에게 트럭은 더 많은 돈을 벌게해주는 수단,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있다. 그가 여동생에게 아쉬운 소리를하면서까지 돈을 빌려 트럭을 사려고 했던 또 하나의 숨은 이유인 것이다. 카를로스의 이런 태도는 미국 사회를 바라보는 아들과의 견해 차이 및 그로 인한 갈등의 증폭을 통해 두드러진다. 아들 루이스가 보기에 미국은 적자생존의 법칙이 지배적인 사회이다. 그래서 그는 너무나 당연하게 아버지의 트럭을 훔친 또 다른 이민자에게 무참히 폭력을 휘두른다. 그가 보기에 하류계층인 멕시코계 이민자가 미국사회에서 무시당하지 않고 살 수 있는 최선의 길은 온 몸에 위협적인 문신을 새긴 갱단이 되는 것이다. 어차피 공평한 경쟁이 불가능한 사회라면, 물리적인 폭력을 써서라도 권력을 쟁취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루이스가 아버지에게 가난한데 왜 자신을 낳았냐고 묻는 것은 예정된 수순이다. 적자생존의 정글에서 약자의 자식은 강자의 먹잇감일 뿐이기 때문이다. 카를로스는 뒤늦게 이 질문에 대답을 한다. 살아가기 위한 목적이 필요했다고. 그는 아들을 낳았기 때문에 아버지가 된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되기위해서(아버지라는 신분을 얻기 위해서)아들을 낳은 것이다. 미국에 첫 발을 내딛는 순간, 사회로부터 불법이민자로 낙인찍힌 그가 자신만의 냉철한 도덕률을 세우고 살아가기 위한 준거점이자 타협점으로서 자식이라는 존재가 꼭 필요했던 것이다. 카를로스는 불법체류자이기에 당연히 운전면허증도 없다. 따라서 그가 추방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경찰차의 사이렌을 무시하고 트럭의 액셀러레이터를 더 세계 밟아야만 하지만, 그는 순순히 정지한다. 그는 불법 이민자라는 신분에 어울리지 않게, 지나친 비폭력주의자일뿐만 아니라 너무나 투철한 준법정신을 가지고 있다. 그의 이런 본성만을 본다면,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그 어떤 미국시민보다 더 모범적인 미국시민이다. 그러나 그가 미국 땅에 있는 한 아무리 선행을 하며 노력해도 그의‘원죄’는 씻기지 않는다. 그는 너무나‘도덕적인 죄인’이라는 모순된 정체성에 결박된다. 이제 그는 그 모순된 정체성을 고유한 성찰의 도구로 삼는다. 주디스 버틀러는 2006년 봄에 캘리포니아의 주요 도시에서 집회의 권한이 없는 불법 이민자들이 자신들의 권리 보장을 요구하는 대규모 거리 시위를 벌인것에 주목하며‘수행적 모순’이라는 개념을 도출한다. 그녀는 권리가 없는 이민자들이 그 권리를 행하는 수행적 모순이 역동적인 창조의 공간을 열어젖힌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법적으로 표현의자유가 없지만, 표현의 자유를 요구하기위해 자유롭게 말하고 있다. 이것은 변혁적인 급진 정치를 실천하고 폐쇄적 민족주의를 넘어서기 위한 몸짓이다. 권리가 없는 이민자가 권리를 행사하듯이,권리가 없기에 의무도 없는 불법 이민자인 카를로스가 시민으로서의 의무에 최선을 다하는 수행적 모순으로 윤리적 기준을 세운다. 전자가 외적 저항의 정치학이라면 후자는 내적 성찰의 윤리학이다. 그러한 내적 성찰은 민족주의를 넘어선 공동체가 평화로운 공존을 하기 위해 필요한 최소 가치를 구현하는 근간이다.결국 카를로스는 아들에게 돈을 많이벌어 미국에 정착하는 것, 그 이상을 가르쳐주고 있다. 그에게는 시민권을 얻어‘합법적인 미국시민’이 되는 것 이전에‘윤리적인 인간’이 되는 것이 더 중요한것이다. 영화의 마지막, 그가 멕시코 동료들과 또다시 미국의 국경을 넘기 위해북으로 이동할 수 있는 용기의 근거가바로 거기에 자리 잡고 있다. 그는 사회가 부여한 불법이민자라는 신분보다 자신이 스스로 구축한 윤리적 인간이라는신분에 더 큰 가치부여를 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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