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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 | 칼럼·시평 [문화칼럼]
조화롭고 정의로운 사회, 그것은 꿈인가?
김요한 전북대학교 교수(2013-01-04 15:01:50)

12월 19일 대한민국은 박근혜 후보를 18대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나는 다른 후보를 지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독재자의 딸이 대통령에 당선됐다는 사실은 엄청난 충격이었다. 정의로운 사회에 대한 나의 직관이 잘못됐단 말인가? 친일이나 유신은 절대악이라는 나의 생각이 오류였던가? 그렇지만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나의 생각과는 달랐다. 누구의 직관이 옳은 것인지 난 알 수가 없었다. 심지어 직관들을 판별해줄 올바른 기준이라는 것이 우리사회에 존재하는지에 대해서도 회의가 들었다.

역설적이지만 2012년 한해 우리 사회에는 ‘정의’에 관한 많은 담론들이 형성되었다. 이런 담론들은 4.11 총선과 12.19 대선에서 직접적인 표심으로 분출되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사회의 기본구조가 공정하지 못하며 정의의 원칙이 무너져가고 있다고 한탄했다. 그러나 선거 결과들은 약속이나 한 듯 모두 내게 불의를 상징했던 여권의 압승으로 이어졌다. 정의를 말하면서 불의를 청산하려고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고 나는 그들을 비판했다. 우리는 ‘정의’라는 말을 서로 다르게 정의하고 있는 걸까? 과연 정의로운 사회란 무엇인가?

2500년 전 플라톤의 <국가>에서 소피스트인 트라쉬마코스는 정의란 단지 주어진 한 사회의 지배 권력들에 의해서 강요된 법에 붙여진 이름에 불과하며 이 법은 통치자 자신의 이익에 이바지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정의는 강자의 이익을 강화시키는 것, 즉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 아니나 다를까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도 지배계급은 정의라는 미명하에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불의한 모습들을 노출하고 있다.

불행하게도 그들이 자행한 불법과 불의가 ‘자유민주주의’, ‘경제발전’, ‘세계화’라는 미명하에 묵인되고 오히려 정의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목자가 양들의 선을 위해서 목양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살찐 양들을 팔아 이익을 남기기 위해서 양들을 푸른 초장으로 인도한다면 거짓 목자라고 비난을 듣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사회 현실은 이런 거짓 목자들이 오히려 훌륭한 목자라고 칭송을 받고 있다. 지배계급은 언제나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서 국민들에게 잘못된 정의 개념을 심어주고 이를 악용하고 있다. 강자의 이익을 옹호하는 거짓 선지자들의 외침 때문에 우리의 정의감이 점차 왜곡되어지고 있다. 그렇지만 우리의 직관은 친일과 유신 헌법이 불의한 것이고 무고한 시민들을 빨갱이로 몰아 살육하는 것은 올바르지 못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옳음보다 이익이라는 좋음을 우선시하게 되면 예기치 않은 문제들이 발생하게 된다. 개인의 이익이든 강자의 이익이든 이익을 더 많이 창출하는 것이 옳은 것이 된다. 이 관점에 따르면 만일 친일과 유신이 국가의 경제발전을 가속화시킬 수 있다면, 만일 한 지역의 시민들이 무참하게 죽어도 다른 지역의 시민들이 그 때문에 더 행복해질 수 있다면, 우리는 더 많은 이익을 위해서 그 부조리들을 용납해야한다. 그 자체로 선도 악도 존재하지 않는다. 단순히 다양한 직관들만이 존재하고 그 중에서 최대 이익을 산출할 수 있는 직관만이 옳은 것으로 간주된다. 따라서 정의가 이익을 대변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약육강식의 본능이지 진정한 정의가 아니다. 정의가 보수이든 진보이든 이익을 대변하는 순간 우리 사회는 극심한 이데올로기 전쟁터로 변하게 된다. 이 때문에 우리는 지난 총선과 대선에서 세대가 지역 간 이데올로기적 대립을 경험했다. 이런 대립은 소모전으로 정의로운 사회의 구현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처럼 우리의 직관적 통찰은 좌우를 막론하고 정의로운 사회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기에 너무 불완전하다. 그것은 단순히 선입견에 기초한 양육 또는 부적절한 교육 또는 매스미디어의 결과물에 불과할 수 있다. 보수이든 진보이든 아무도 자신의 판단이 옳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익만을 추구하는 정의와 우리가 생각하는 도덕적 정의감 사이에는 명백한 불일치가 존재한다. 아무리 다수가 행복하다고 하더라도 노예제도가 있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인간을 노예로 만드는 것은 그 자체로 나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서도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정의의 직관들이 존재한다. 물론 이것도 정당화될 수 없는 단순한 직관에 불과하다. 우리의 직관들은 여전히 불완전하고 모호하며 서로 갈등을 빚는 수많은 사례들에서 무엇을 행해야 할지에 대한 명확한 답변을 제시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보수의 직관과 진보의 직관만으로는 결코 사회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며 직관에만 머물러 있으면 우리 사회에는 영원한 대립만이 존재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조화로운 사회를 유지하면서 정의로운 사회를 꿈꿀 수 있을까? 그 방법은 우리의 상식적 직관에 크게 벗어나지 않으면서 이익만을 추구하는 사회 구조를 중화시킬 수 있는 정의 개념을 수립하는 것이다. 이것을 마련하는 것이 상생을 위해서 다음 5년 동안 우리와 지배 계급이 해야 할 과제이다. 단순한 직관에 의존하면 보수와 진보라는 대립되는 직관들 때문에 충돌이 불가피하며 이익만을 옳음으로 간주하는 공리주의는 우리의 도덕적 직관과는 너무 동떨어져 있다.

미국의 철학자 롤스는 <정의론>에서 이익에 집착하는 세계관을 벗어나 불충분한 직관에 기초하지 않으면서 정의로운 사회의 기본 구조를 세워보려고 시도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리 사회가 협동체계라는 점이다. 협동하기 위해서는 모두가 이성적으로 동의할 수 있는 규칙을 마련하고 이를 기초로 사회 기본 구조를 확립해야만 한다. 이제 어떻게 정의로운 규칙을 마련할지는 다시 우리의 냉철한 이성에 달려 있다. 보수나 진보나 정의로운 사회에 대한 단순한 직관을 내려놓고 소모적 투쟁이나 비난이 아니라 머리를 맞대고 철저하게 이성적이며 정의로운 사회 기본구조를 만들어 나갈 때이다. 더 이상 우리사회가 지역적인 대립이나 수구보수이나 종북 좌파사이의 대립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2013년 한해는 어떻게 하든지 직관에 의존하는 보혁의 갈등을 치유하고 냉철하게 이성적으로 화합과 상생의 사회 기본구조를 마련할 수 있는 출발점이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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