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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5 | 칼럼·시평 [문화시평]
초연의 운명을 생각하다
연극 <탈>과 <민들레 아리랑>
정초왕 전북대 독어독문과 교수(2013-05-02 16:01:24)

밑져야 본전이요, 꿩 먹고 알 먹는 창작초연작품
요즈음, 어디에서든, 연극하는 이들이라면 ‘창작초연작품’을 무대에 올리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쯤은 알고 있다. 본디 연극이란 것이 공동체의 예술로서, 더불어 사는 삶의 문제를 놓고 관객과의 소통을 추구하는 매체인 만큼, 나누고자하는 ‘지금 이곳의 이야기’들은 의당 ‘새로운 그릇’에 담길 수밖에 없을 터이다. 게다가 어느 분야이든 예술가란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데서 자신의 존재의미를 찾으려 하지 않던가. 그러니 작업하는 과정 내내 자부심과 내적인 동력을 잃지 않을 수 있어서 또한 좋을 것이다. 창작초연작품은 또한, 민간극단인 경우, 문예진흥기금 등의 지원 제도를 통해 일정 정도의 제작비를 보장 받을 뿐 아니라, 연극제 등의 경선에 출품하면, 초연작이 아닌 작품들과의 경쟁에서 절대적인 이점을 누릴 수 있다. 경선에서 뽑혀 전국대회에 나가게 되면 그에 따른 지원금도 받게 되고, 평론가들과 저널리스트들의 호의적인 공연비평까지 기대할 수 있다. 그러니 지역의 극단들은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도 창작초연작품을 선호할 수밖에 없다. 속된 표현을 빌리면, 밑져도 본전이고, 잘되면 ‘꿩 먹고 알 먹고’인 셈이다. 제29회 전북연극제(4월 9일~15일)에서 최우수작품상을 받은 <문화영토판>의 ‘민들레 아리랑’(백민기 작, 연출)이 창작초연작품인 것도 당연한 일로 생각된다. 연극제 이후에도 공연이 되고 있기에 4월 17일 저녁공연을 보았다. 이 연극은 지금 우리 사회의 현안이랄 수 있을 다문화 가족 구성원의 갈등과 애환을 다루면서, ‘함께 품고 가야 할 가족’이라는 틀 내에서 화해와 희망의 불씨를 찾아내고자 한다. 군더더기가 없진 않았으나 극적 짜임새가 있었고, 안정된 연출력에다가 연기 앙상블도 괜찮아서, 일부 배우들의 연기력의 편차를 가다듬는다면, 전국연극제에서도 능히 상을 받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여하튼, 한때 이곳의 창작극 전통이 잠시 끊기다시피 했던 시절에 현장에 발을 디뎠던 필자가 보면 때론 격세지감이 느껴지기도 할 만큼, 요즈음에는 다수의 지역 극작가들이 썼거나, 혹은 극단 구성원이 자체적으로 구성한 창작초연작품들이 부단히 지역 무대에 오르고 있다. 그것이 꼭 앞서 언급한 현실적인 이유들 때문만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재정지원을 당근으로 한 정책적 제도적 뒷받침이 지역 연극의 창작극 활성화에 지대한 기여를 했다는 사실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그렇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 조금만 더 관심을 갖고서, 이 같은 외형적인 성장의 껍질을 들춰보면, 아이러니하게도 창작초연작품들이 거의 예외 없이, 몇 차례의 단발공연 이후, 그저 공연연보의 한 자리만 차지하고 말 뿐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극단 관계자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하나같이, 초연작이 아니면 재정적 지원을 받기 어려운 이유가 가장 크다고들 한다. 그렇다면, 발전 가능성이 있는 우수한 작품을 선별하여, 수정 보완이나 재해석을 통해 ‘더 좋은 작품’으로 재탄생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주는 방식으로, 제작지원 시스템이 보완 개선되어야 마땅하리라.

용인가 이무기인가, 전주시립극단의 창작초연작품 ‘탈’
관립극단에서라면 창작초연작품의 운명이 다를까. 구성원들의 창작 욕구와 소명의식을 충족시키는 동시에, 그들을 재정적으로 지원하는 주체인 시민관객들에 대한 의무를 다한다는 의미에서 창작초연작을 올릴 터이니 말이다. 다른 곳은 모르겠으되, 전주시립극단의경우엔 지역의 민간극단들과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지역 극작가의 창작초연작이 개작이나 재해석이 되어 다시 공연된 예를 찾아보기 어려웠다. 지난 3월 말에 공연된 창작초연작품 ‘탈’(김정수 작, 류경호 연출)에 관해 이야기해보도록 하자. (꽤 많이 분석을 했으나, 지면의 제약이 아쉽다.)‘탈’은 갑작스럽게 죽은 주인공이 염라대왕의 조건부 허락을 받아, 자신이 살아야 할 이유를 찾기 위해, 삼일간의 말미를 얻어 돌아오지만, 결국 자신의 죽음을 되돌리는데 좌절하고 마는 내용이다. 작품의도에 따르면 ‘탈’은 이중적이다. 주인공은 젊었을 때 ‘탈’춤을 추며 불의와 맞섰고, 나이가 들어가면서는 탈(‘가면’)을 쓰고 세속에 젖어들었다. 개인적 비극과 시대, 혹은 세대의 문제가 어우러지는 수작이 될 수 있었다고 보이나, 이러저러한 이유들로 인해서, 실제 공연의 결과는 그러지 못했고,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 격으로, 언론의 혹평(?)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이 작품이 ‘용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초연작으로 끝나고 만다면, 미래의 ‘용’이 그냥 묻혀버리고 마는 결과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재미있게도, 이 글을 쓰는 동안 도착한 4월호 문화저널의 ‘클래식 뒷담화’에 ‘초연에 실패한 명작들’에 관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하고 싶은 연극’, ‘살아 숨 쉬는 창작으로서의 연극’을 위하여
창작초연작품을 무대에 올린다는 것은 언제나 ‘도전’이자 ‘모험’이기도 하다. 공연성과가 좋지 않을 경우, 내부적으로도 분란의 불씨가 될 수 있다. 짐작할 수 있는 시나리오는 많지만, 문제가 생긴다면 결국은 모든 것을 ‘공동책임’으로 인식하는 데서부터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야 할 것이다. 극작가나 연출가, 한 사람에게서 모든 것이 단박에 나오리라고 기대했다면, 연극이라는 예술의 특성을 잠시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갈고 다듬어서 더 나은 작품으로 재탄생시켜야할 책임은 구성원 모두에게 있으니, 공동 작업을 통해, 연습과 공연이 되풀이되는 과정에서, ‘언제나 완성을 향해 가는 도상에 있는 것이 연극’이라는 걸 명심한다면, 창작초연작의 도전과 모험이 주는 결실의 달콤함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지원금에 목을 맬 필요가 없는 공공극단으로서, 시민관객들에게 한 첫 약속을 마침내는 지키는 모습을 보여주기를 기대해본다. 우리 지역의 연극인들에게 창작초연작품을 무대에 올린다는 것이 거의 ‘짝사랑’에 불과한 것처럼 생각되던 시절도 있었다. 그 시절은 또한 지역 연극판에 몸담은 젊은 연극인 지망생들이, 자나 깨나, ‘밥벌이를 하면서 늙을 때까지 연극을 할 수 있게 되는’ ‘실현 불가능해 보이는 꿈’을 꾸던 때이기도 했다. 너무도 당연하겠지만, 연극을 밥벌이의 수단으로 본 것이 아니라, ‘하고 싶은 연극’, ‘살아 숨 쉬는 창작으로서의 연극’을 계속할 수 있는 그런 생계수단이 필요했던 것이었다. 가난하지만 현장을 지켰던 연극인들의 열정이 ‘짝사랑 같은 꿈’을 ‘현실’로 만들어, 시립극단의 상임단원들은 연극을 하며 최소한의 생계를 해결하는 전업연극인이 될 수 있었다. 일자리를 얻지 못해 전전긍긍하는 요즘 젊은 세대들이 그자리를 ‘하고 싶은 일 하면서 밥벌어먹는’, 그야말로 ‘꿈의 일자리’로 보지 말란 법도 없다.그만큼 지켜보는 눈들도 매서울 테니, 연극판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안쓰러운(?) 대접을 받던, 좋았던 시절은 지나갔을지 모른다. 전주시립극단은, 이른바 ‘초심’을 다시 한 번 되새기면서, 지역의 가난한 민간 극단이 초연으로 끝낼 수밖에 없었던 창작극까지 끌어안아, 더 나은 작품으로 재탄생시키는 책무를 기꺼이 떠맡아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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