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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2 | 칼럼·시평 [문화시평]
모노드라마, 그 불꽃을 찾아서
극단 까치동 <불꽃처럼, 나비처럼> 11월 8일~17일 | 창작소극장
최김병주 작가(2013-12-09 17:07:41)

배우가 없으면 극도 없다
사실 춤을 소재로 하는 작품을 연극으로 하기에는 상당한 무리가 앞선다. 연기뿐만 아니라 춤으로써 무대를 준비한다는 것은 둘 모두를 소화해낼 수 있는 배우가 있느냐라는 문제부터 봉착하게 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춤의 주인공이 다름 아닌 한국 현대무용의 선구자 최승희라니! 제작자(전춘근, 극단 까치동 대표)나 연출가(정경선)가 언론이나 혹은 동료 연극인들에게 <불꽃처럼, 나비처럼>은 김경민(배우, 백제예술대 겸임교수)이라는 배우가 없다면 기획조차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한결같이 말했던 것은 바로 그 부분이 이 작품의 탄생배경이기 때문일 것이다.
최승희는 1926년 일본의 현대 전위무용가인 이시이 바쿠에게서 사사 받은 후 한국의 전통무용을 연구, 현대무용에 접목하여 국내 뿐 아니라 유럽 및 남미에서도 성공적인 순회공연을 했을 정도로 춤에 대한 열정과 실력을 겸했던 실존 인물이다. 초대받은 순회공연 횟수나 대중의 선풍적인 반응으로 따지면 현재의 김연아 보다 더욱 사랑받았던 여성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독립이후 친일행적에 대한 의심과 월북을 한 이후 당시의 뜨거웠던 인기는 연기처럼 사라지고 그 이름만 남게 된다.

< 불꽃처럼, 나비처럼>만을 본 관객이 최승희가 겪어야 했던 시대적 역경이나 월북 이후 닥치게 된 춤 인생의 끝을 제대로 이해하기에는 어려운 점이 존재한다. 이야기의 중요마디를 이루고 있는 부분, 바로 춤을 이해해야만 하는 선과제가 생기게 돼버리는 셈이다.

격동의 시대, 그 밑바닥에서
까치동의 정경선 연출과 최정 작가가 <불꽃처럼, 나비처럼>으로 최승희라는 여성을 무대화 한 이유는 자명하다.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었던 격동의 근대시대를 춤을 통해 꿰뚫고 지나왔던 불굴의 여성을 통해 현대 여성들, 나아가 현대인들의 롤모델로 삼고자 하는 발로일 것이다. 이 이야기는 한 성공적인 춤꾼에 대한 성공 비하인드 스토리가 아니다. 적어도 <불꽃처럼, 나비처럼>은 그런 라인을 따라가지 않았다. 열정은 반드시 역경을 길동무로 삼게 되는 이야기처럼 매력적인 이야기가 또 어디 있던가! 하지만 이 작품은 춤과 연기로 풀어낼 수 있도록 세심하게 계획되고 배려된 무대를 보여주었다.
과연 춤으로 모노드라마를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대뇌 추리세포를 자극하는 - 매우 흥미로운 기대였다. 밀실살인을 어떻게 저질렀을까? 불가능할 것 같은 해결방법을 기대하는 어린 마음 - 기다림이 끝나고 드디어 작품의 정체를 드러낸 순간이 있다. 바로 “난 가장 밑바닥에 있어”라는 독백으로 시작하는 최승희(김경민 분)의 춤 부분이다. 그 춤은 열정만을 절대값으로 삼는 역동의 모습이 아니라, 하나하나 깨달음을 손으로, 발로, 몸통으로, 심장으로, 그리하여 온 몸으로 세상을 향해 차근히 열어가는 정적인 모습이었다. 아- 마치 보던 책을 덮고 제목을 다시 확인하게 되는 것처럼, 이 작품의 키워드는 모노드라마라는 연극이었을 뿐만 아니라 춤이기도 했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정말 무식하게 단순한 비교를 해보자면, 뮤지컬이 노래를 중요한 이야기 전달도구로 삼는 것처럼 <불꽃처럼, 나비처럼>은 춤을 이야기 전달도구로 삼고 있는 것이다.

춤으로 말하는 이야기
<불꽃처럼, 나비처럼>이 여러 인형을 통해 다른 인물의 이야기를 전개해나가는 형식으로 모노드라마의 자칫 지루해질 수 있는 단순 독백의 흐름을 깨뜨릴 수 있던 점이나, 아기자기한 소품에서 느껴지는 미장센을 덜어내고도 이 작품은 굉장히 흥미롭다. 바로 춤으로 이야기를 전달해준다는 점이다. 적어도 필자가 알고 있는 바로는 이 지역에서는 최초의 시도이다. 하지만 그 부분이 신선한 자극을 주면서도 아쉬운 점을 남기는 부분이기도 했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일반인이 해석하기에 그 친절도가 그리 높지 않았던 까닭이다. <불꽃처럼, 나비처럼>의 중요한 이야기 소구는 아주 확실하게도, 춤이었다. 중심을 잡고 들려주는 이야기는 대부분 춤으로 이루어졌으며, 서술적 이야기의 마디마디를 마감하고 채우는 역할을 춤이 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불꽃처럼, 나비처럼>만을 본 관객이 최승희가 겪어야 했던 시대적 역경이나 월북 이후 닥치게 된 춤 인생의 끝을 제대로 이해하기에는 어려운 점이 존재한다. 이야기의 중요마디를 이루고 있는 부분, 바로 춤을 이해해야만 하는 선과제가 생기게 돼버리는 셈이다. 왜냐하면 이야기로 최승희의 삶을 따라가자니 이야기는 인생사의 중요한 부분만을 징검다리 삼아 흘러가고, 그 사이를 메우고 있는 춤의 상징성을 온전히 이해하기에 나와 같은 잡범인들은 충분히 진화하지 않은 기분을 맛보게 되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에서 이 작품의 태생적 한계가 불거져 나오게 된다. 전에 시도가 되었던 부분이던 아니건 간에 춤+연극이라는 과감한 시도가 바로 이 작품의 생명력이기 때문이다.

더 과감해져라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이 작품은 올리고 싶다고 해서 올릴 수 있는 작품이 아니다. 그만한 배우를 확보해야 한다. 그래서 춤과 연극의 만남은 시대를 막론하고 항상 유니크하고 신선한 시도임에 틀림없다. 이러한 시도들이 더욱 다양한 실험적 과감성과 손을 잡는다면 지역을 대표하는 작품이 될 것이다. 일회적 실험이란 없는 법이다. 작품에 대한 높은 몰입도와 착실한 재공연으로 매번 더욱 수준 높은 작품으로 관객과 만나고 있는 까치동이라면 <불꽃처럼, 나비처럼>은 정말 기대해도 좋을 만하다. 만약 이 같은 ‘때리라고 뺨내놓기’ 같은 종용에도 불구하고 재공연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까치동의 다른 작품으로 아쉬운 마음이라도 달래야하겠지만 말이다.
모노드라마의 기쁜 행보
최근 이 지역의 중견극단들이 정성들여 만든 모노드라마들이 연달아 선보이고 있다. 위에서 소개한 극단 까치동의 <불꽃처럼, 나비처럼>과 문화영토 판의 <염쟁이, 유씨>(정진권 연출/고조영 출연)의 성공적인 앵콜공연은 지역연극의 나침판을 새로 세울 정도로 문화판에 커다란 영향을 주고 있다. 개인적으로 12월 7일에 올라가는 <빨간피터의 고백> (곽병창 극본/정초왕 번역·연출/홍석찬, 서형화 출연) 역시 모노드라마로 제작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지만 홍석찬씨와 서형화씨의 연기 앙상블이 보고픈 마음 또한 크기 때문에 공연 오픈일자만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한가지는 분명하다. 적어도 2013년은 이 지역에서 연극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좋아하는 배우들이 그 매력을 남김없이 보여주었던 행복한 한 해였다. 2014년은 또 다른 매력적인 모습으로 단장한 전북연극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아니 기쁘지 아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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