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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6 | 칼럼·시평 [클래식 뒷담화]
베토벤 때문에 시작된 음악사 100년 전쟁
문윤걸 교수(2014-06-03 09:58:08)

세계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100년 전쟁은 잉글랜드 왕국과 프랑스 왕국이 1337년부터 1453년까지 무려 116년 동안 프랑스 땅에서 벌인 전쟁입니다. 이 전쟁은 프랑스 왕권을 장악하려는 잉글랜드와 프랑스 왕권을 지켜 잉글랜드의 영향권에서 벗어나려는 프랑스의 이해관계가 부딪치며 일어난 일이지요. 이 전쟁 기간 동안 수많은 에피소드들이 탄생합니다. 노블리스 오블리쥬의 대표적 사례가 된 칼레의 시민(강력한 잉글랜드군이 항복의 조건으로 시민대표 6명의 처형을 요구하자 칼레의 지도층이 선뜻 처형자로 나선 사건, 로뎅의 작품으로 유명), 그리고 우리가 잘 아는 잔다르크(19살에 마녀로 화형당했지만 1920년에 가톨릭의 성인으로 시성되면서 프랑스의 수호성인이 됨) 이야기 등이 탄생했지요.          


서양음악사에도 이처럼 100년 전쟁이 존재한답니다. 물론 잉글랜드와 프랑스처럼 칼을 든 전쟁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많은 작곡자와 평론가들이 참여한 뜨거운 논쟁이었습니다. 즉 음악과 평론을 통한 전쟁이었지요. 전쟁의 이유는 바로 베토벤 때문이었습니다. 누가 왕위를 계승할 것인가로 시작된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백년전쟁처럼 누가 베토벤의 음악유산을 제대로 계승하고 있는가 하는 싸움이었습니다.  


베토벤은 1770년에 태어나서 1827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 시기 유럽은 격동의 시대였습니다. 정치적으로는 근대사회의 탄생이라는 프랑스 대혁명이 있었고, 경제적으로는 농업에서 공장 중심으로 생산양식이 변화하는 산업혁명이 시작되는 무렵이었습니다. 또한 이러한 정치경제적 변화는 사회적으로 신분제도를 무력화하면서 귀족 대신 부르주아라는 새로운 계급을 지배세력으로 만들었으며 예술양식에 있어서도 이전의 양식들을 종합한 새로운 규칙과 질서를 만들어내던 시기였습니다. 또 서유럽의 문화예술사에 있어 고전주의 양식에서 낭만주의 양식으로 이전해 가던 시기이기도 했습니다(그래서 베토벤을 고전주의 작곡가로 분류해야 하는지 아니면 낭만주의 작곡가로 분류해야 하는지를 놓고 논쟁이 있기도 했습니다). 

베토벤은 당시 유럽에서 가장 존경받는 작곡가였습니다(빈에서 치른 그의 장례식에 2만이 넘는 조문객이 행렬에 참여했다는 것은 이미 말씀드린 바 있지요). 후세의 작곡가들이 왜 베토벤의 유산을 어떻게 계승해야 하는 지를 놓고 다투었는지를 알기 위해 베토벤의 업적을 잠깐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베토벤의 음악세계는 크게 세 시기로 구분됩니다. 초기는 1802년 까지로 이 시기에는 하이든, 모차르트의 영향을 많이 받은 작품을 남겼는데 주로 이전의 작곡 양식, 즉 하이든으로부터 시작되는 고전주의적 양식기법을 바탕에 둔 시기였습니다. 이 시기 작품으로 유명한 작품이 비창소나타, 월광소나타 등입니다. 중기는 1814년 까지로 이 시기에 베토벤은 다양한 질병으로부터 고통을 받으며 난청에 시달리던 시기였습니다. 이 시기에 베토벤은 인간적인 고뇌에 시달리면서도 프랑스 대혁명과 같은 사회적 변화에도 깊은 관심이 있었습니다. 또 양식적 측면에서도 이전의 고전주의적 수법을 자기 나름의 체계로 완성하여 악기 편성을 크게 늘리며 인간의 영웅적인 측면과 고통, 사색적인 측면이 동시에 나타나는 위대한 작품들을 남겼습니다. 대표적인 작품이 영웅, 운명, 전원교향곡과 유일한 오페라 피델리오 등입니다. 후기는 1815년부터로 이 시기 베토벤은 고전주의적 수법을 넘어서 지적으로 더 깊어지는 동시에 양식적 측면에서도 혁명적 변화를 시도해 낭만주의 시대를 열어갔습니다. 

베토벤이 사망하자 누가 베토벤을 계승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생겼습니다. 많은 음악가들이 베토벤의 음악적 유산을 계승해 갔는데 이 과정에서 베토벤의 장점 중 어떤 면을 계승하느냐에 따라 두 부류로 확연히 입장이 갈렸습니다. 한 부류는 하이든 이후 발전해 베토벤에게서 정점을 이룬 절대음악적 전통(악기를 중심으로 한 관현악의 조화로운 소리가 만들어 내는 음의 구성에 집중하는 것)을 이어가려는 입장이었고, 다른 한 부류는 베토벤이 시도한 음악적 혁신, 즉 후기 베토벤이 창조해낸 음악적 기법과 양식이 당시로서는 기존의 음악적 어법을 혁신적으로 변화시키며 만들어진 것으로 보고 그의 혁신적 의지를 계승한다는 입장이었습니다. 후기 베토벤은 고전주의적 경향에서 낭만주의적 경향으로 변화해 가는데 이 과정에서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시도로 보일 만한 여러 작품들을 남겼습니다. 그 대표적인 작품이 바로 합창교향곡이지요.   

먼저 베토벤이 완성한 절대음악적 전통을 계승한 음악가는 멘델스존, 슈만, 브람스, 부르크너, 드보르작, 말러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반면 베토벤의 혁신적이고 도전적인 의지를 계승한 음악가들은 리스트, 바그너, 스메타나, 러시아 5인조 같은 국민음악파들이었습니다. 전자는 낭만주의 작곡가에서 신고전주의 작곡가로 이어지고, 후자는 낭만주의 작곡가에서 후기낭만주의 작곡가로 이어집니다.   

사실 슈만, 브람스, 리스트, 바그너는 모두 비슷한 시기에 살면서 서로 얽히고 설킨 관계에 있었습니다. 브람스는 슈만의 제자이면서 슈만의 아내 클라라를 평생 사랑했고, 리스트는 브람스의 피아노 연주 실력에 반해서 브람스를 제자로 들이고 싶어 프로포즈를 했지만 브람스로부터 거절을 당했으며, 슈만은 리스트의 연주 실력은 높이 평가했지만 리스트의 바람기와 쇼맨십을 아주 싫어했고, 브람스와 바그너는 당대의 라이벌로 양 진영을 대표하는 작곡가로 늘상 부딪쳤으며, 리스트와 바그너는 음악적 성향에서는 매우 비슷해 가깝게 지냈지만 바그너가 이미 결혼한 리스트의 둘째 딸 코지마와 바람이 나면서 원수같은 사이가 되었습니다.  

슈만과 리스트는 처음에는 아주 친한 사이였습니다. 서로의 작품에 대하여 평을 써주기도 하고 또 서로에게 작품을 헌정하기도 했을 정도였으니까요. 그런데 두 사람의 관계에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은 멘델스존에 대한 평가 때문이었습니다. 슈만은 멘델스존의 보수적인 경향을 옹호한 반면 리스트는 멘델스존에 대해 혹평하는 비평을 발표했습니다. 리스트의 혹평에 대해 슈만이 즉각 반박 의견을 냈고 둘의 관계는 악화되었습니다. 이후 자유분방한 성격대로 혁신적인 음악세계를 추구하던 리스트는 음악적 진보파와 가까워지고 슈만은 멘델스존을 중심으로 하는 신고전주의 음악가들과 어울리게 됩니다. 하지만 슈만이 정신병원에 입원하자 리스트는 존경의 표시로 슈만의 음악을 극찬하는 평론을 쓰기도 했습니다.    

음악사 100년 전쟁은 브람스와 바그너에 이르러 최고조에 달했습니다. 두 사람은 완전히 상반된 예술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브람스는 베토벤처럼 절제된 음악을 통해 인류의 보편적 예술로서 순수한 음악의 감동을 찾아가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였으며, 바그너는 베토벤의 혁신적인 음악적 변화에 기초하여 끊임없이 새로운 시도를 계속해 혁명적이고 미래지향적인 새로운 음악을 찾아내는 데 주력하였습니다. 이 두 사람을 추종하는 음악가들은 서로를 비판하는 데 열을 올렸습니다. 브람스의 제자들은 바그너의 제자들이 식당에 들어오면 음악적 무뢰배들과 같이 식사할 수 없다며 자리를 박차고 나갔고, 바그너파들은 브람스를 가리켜 시대적 조류를 모르는 태고의 유물이며 교향곡은 베토벤에게서 이미 다 끝났는데 여태 무슨 교향곡을 쓰고 있냐고 비판했다고 합니다(하지만 지금 브람스의 교향곡은 거의 베토벤급 대우를 받고 있습니다).     

베토벤의 음악을 어떻게 계승하는 것이 옳은가에 대한 갈등은 사실 음악가들이 베토벤의 수제자가 되기 위해 생겨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베토벤이 워낙 뛰어난 업적을 남긴 작곡가였고 베토벤 이후의 음악가들이 베토벤의 업적을 기초로 공부하면서 베토벤을 넘어 자신의 음악세계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생겨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우리는 다양한 음악의 세계를 갖게 되었습니다. 당시 유행했던 변증법처럼 갈등이 변화와 창조의 원천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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