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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7 | 칼럼·시평 [티비토피아]
한국형 히어로의 탄생
드라마 개과천선 김명민
박창우 대중문화 블로거(2014-07-03 12:44:26)

‘X맨’, ‘스파이더맨’, ‘아이언맨’ 등…. 수많은 헐리웃 히어로물을 보며 우리나라에도 이런 괜찮은 영웅대작 하나쯤 있으면 어떨까 하는 상상을 해봤다. 물론 그이유가 헐리웃 영화의 영웅들이 미국의 세계관을 대변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영웅이라는 것이 그 탄생배경을 무시할 수 없듯, 2차세계대전이나 세계대공항, 혹은 돌연변이 연구나 핵실험처럼 우리와 동떨어진 곳에서 출발하는 게 아닌 보다 가까운 곳의 소재로 만들어졌으면 하는 바람에서였다.

혹자는 지난해 인기리에 방영된 <별에서 온 그대> 속 도민준(김수현)을 ‘한국형 히어로’로 꼽기도 한다. 시간을 멈추거나 텔레포트(순간 이동)와 같은 특수한 능력을 갖췄을 뿐 아니라,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 자신을 헌신하는 순애보적 사랑까지 보여주며 시청자의 마음을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어디까지나 드라마 속 설정처럼 ‘외계인’일 뿐, ‘한국형 영웅’이 될 수는 없다. 그런 식으로 상상력이 빚어낸 산물을 영웅이라 칭한다면, 헐리웃 히어로에 버금가는 영웅 따윈 얼마든지 만들어낼 수 있다.


적어도 ‘한국형 히어로’라는 수식어를 붙일 정도가 되려면, ‘홍길동’이나 ‘각시탈’처럼 그 캐릭터의 시대적 배경이 명확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 조선시대의 타락한 양반이나 일제시대의 친일파처럼 영웅이 맞서 싸워야 할 ‘악당’이 구체화되기 때문이다. 악당으로부터 고통 받는 민중을 대변하고 그들의 편에 서서 싸우는 것이 영웅물의 기본적인 서사라는 점에서, <별그대> 속 도민준 ‘한국형 히어로’에 한참이나 비켜 선 듯 보인다.

그렇다고 해서 ‘홍길동’이나 ‘각시탈’이 좋은 대안인 것은 아니다. 그들은 우선 생명력이 너무 짧다. 무릇 상업적인 문화콘텐츠 속의 영웅이란, 끊임없이 가공하고 변형됨으로써 새로운 이야기 거리를 만들어내야 하는데, ‘홍길동’이나 ‘각시탈’은 그 한계가 너무 뚜렷하다. 시대적 배경이 명확한 것은 좋지만, 역으로 그 시대에 갇혀 있는 캐릭터들이다.

또한 헐리우드 영웅물에 익숙해져 있는 우리나라 대중들에게 ‘홍길동’과 ‘각시탈’은 어딘지 모르게 허전해 보인다. 그것은 마치 아이언맨의 슈트와 각시탈의 탈을 비교하는 느낌이다.


그렇다면, ‘한국형 히어로’는 헐리웃 영화의 히어로와는 문법 자체가 달라져야 하지 않을까 싶다. 때리고 부수고, 하늘을 날아다니며 심지어 번개를 치는 그런 히어로물이 육체적 능력을 극대화시켰더라면, 새로운 ‘한국형 히어로’는 악당(?)에 맞서 정서적·논리적 능력으로 맞서 싸우면 어떨까? 바로, MBC <개과천선> 속 김석주(김명민) 변호사처럼 말이다.


잘나가는 대형로펌의 에이스 변호사였던 김석주는 한때 속물의 극치를 보여줬으나, 기억을 잃고 난 뒤에는 자신의 변론 능력을 정의의 편에 서서 사용하고 있다. 그는 자본과 권력의 희생양이 될 수도 있었던 사람들을 극적으로 구해낸데 이어, 최근에는 중소기업 편에 서서 대형은행과의 한판 승부를 준비 중에 있다. 정치-언론-자본이 총 집결된 ‘권력공동체’에 맞서 김석주 변호사가 내세울 수 있는 무기는 오직 법과 논리뿐이다. 그에게 초능력은 없다. 그럼에도, 정의의 편에 서서 오로지 법과 원칙으로 변론을 펼치는 그의 모습은 시청자에게 알 수 없는 쾌감을 선사해준다.


그것은 아마도 지금 우리의 어깨를 짓누르는 ‘악당’들의 실체와 무관하지 않을 거 같다. 일찍이 김어준은 다음과 같이 말한바 있다.

“과거 군사정권은 조직폭력단이었어. 힘으로 눌렀지. 그런데 이제는 금융사기단이야. 돈으로 누른다. 밥줄 끊고 소송해서 생활을 망가뜨려. 밥줄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 힘으로 때리면 약한 놈은 피해야 해. 그건 부끄러운 게 아니야. 피하고 뒤에서 씨바 거리면 돼. 그런데 밥줄 때문에 입을 다물면 스스로 자괴감이 들어. 우울해져. 자존이 낮아져. 위축돼. 외면하고 싶어. 그러니까 지금 이 시대가 필요로 하는 건, 위로야…”


위로가 필요한 시대, 정의의 편에 서서 변론을 하는 <개과천선> 속 김석주 변호사는 어쩌면 그가 가진 변론 능력 자체가 ‘초능력’이 아닐지 모르겠다. 설령, 그가 법정에서 이기는 것이 대중에게 있어선 하나의 ‘판타지’와 ‘정신승리’에 그치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런 ‘영웅’하나쯤 있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사기가 판을 치는 시대, 뚜렷한 증거를 제시하며 “완전히 사기입니다”라고 일갈하는 김석주 변호사는 분명, ‘한국형 히어로’가 틀림없다. 앞으로 보다 다양한 작품에서 김석주 변호사의 변형된 캐릭터를 볼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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