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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7 | 칼럼·시평 [클래식 뒷담화]
돌직구 음악가, 바렌보임
문윤걸 교수(2014-07-03 12:45:18)

2001년 7월 7일, 이스라엘을 발칵 뒤집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예루살렘 축제에 베를린 슈타츠카펠레교향악단(국립오페라극장 교향악단)을 이끌고 온 지휘자 다니엘 바렌보임(Daniel Barenboim, 1942년 11월 15일~)이 앙코르곡으로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 서곡을 연주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의회는 바로 교육문화위원회를 열고 바렌보임이 사과할 때까지 이스라엘의 모든 문화기관들은 바렌보임을 문화적 기피인물로 선언하고 배척할 것을 결의합니다. 하지만 바렌보임은 만약 내가 바그너를 엉터리로 연주했다면 사과하겠지만 다른 이유로는 사과할 이유가 없다고 강경하게 맞섰고 이스라엘의 문화예술계는 물론 전 유대인 사회, 그리고 세계의 문화예술계의 핫 이슈가 되었습니다. 

  이유는 바그너의 음악에 대한 유대인들의 지울 수 없는 기억 때문이었습니다. 바그너는 600만 유대인을 살해했던 히틀러가 가장 사랑하고 존경하는 인물이었습니다. 바그너(Wilhelm Richard Wagner, 1813년 5월 22일~1883년 2월 13일)는 19세기말 위대한 음악적 업적을 남긴 작곡가로 지나친 자신감과 괴팍한 성격, 대단한 야심을 가진 인물이었습니다. 특히 그는 독일의 신화에 등장하는 영웅들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독일 고유의 문화적 전통을 부활시키는 메가톤급 오페라를 연이어 작곡하면서 비스마르크의 등장과 독일 통일로 유럽의 변방에서 유럽의 중심으로 정치적 힘을 키워가던 독일의 자부심이 된 인물입니다. 

  위대한 게르만 민족을 부르짖던 히틀러는 독일 민족의 우수성을 음악에 담아 민족정신을 고양하는 데 기여한 바그너를 너무나 좋아했습니다. 바그너 음악축제인 바이로이트 음악축제에 매년 방문했으며, 나치당 집회에서는 바그너의 ‘마이스터징거 서곡’으로 집회를 시작했고, 교향곡 ‘지그프리드 목가’를 제2당가로 사용하였으며, 나치군대가 행진할 때는 ‘니벨룽겐의 반지’에 나오는 ‘발퀴레의 기행’을 행진곡으로 사용하는 등 바그너의 음악을 즐겨 사용했습니다(2차대전 막바지 베를린이 연합군에게 함락되기 직전에 독일 라디오가 방송했던 음악 역시 바그너의 죽음을 애도하는 안톤 브루크너의 ‘바그너에게 바치는 송가’였을 정도입니다). 유대인들이 바그너의 음악을 끔찍하게 생각했던 것은 이 때문만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유대인들을 학살했던 아우슈비츠 수용소 등에서도 바그너의 음악을 즐겨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으로 가스실에서 유대인들을 학살할 때 ‘탄호이저’ 3막에 등장하는 ‘순례자의 합창’이나 ‘뉘른베르크의 명가수’ 등을 틀어 놓았던 것입니다. 상황이 이러하니 홀로코스트의 희생자 유가족들이 많은 이스라엘 국민들에게 바그너의 음악은 끔찍하고 가혹했던 히틀러 시대를 떠올리게 만드는 악마의 소리 같은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스라엘의 심장과 같은 도시인 예루살렘의 축제에서 바그너의 음악이 연주되었으니 이스라엘 국민들이 받았을 충격은 충분히 짐작이 갑니다. 특히 다니엘 바렌보임은 이스라엘 국민들이 매우 자랑스러워 하는 음악가였으니 아마도 배신감마저 들었을 겁니다. 그런데 사실 다니엘 바렌보임은 이미 오래전부터 바그너의 음악을 이스라엘에서 연주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사태를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바렌보임은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나 10살 때 이스라엘로 이주해 온 유대인이었습니다. 그의 부모는 나치를 피해 아르헨티나로 이주했고, 2차대전 후 이스라엘이 건국되자 예루살렘으로 다시 이주할 만큼 철저한 시오니스트(유대인 민족주의자)였습니다. 어려서부터 피아노 신동으로 이름 높았던 바렌보임도 이러한 부모님의 정신을 물려받아 중동전쟁이 일어나자 모든 연주 스케줄을 취소하고 조국 이스라엘로 달려가 전쟁에 참여할 정도로 애국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바렌보임을 유대계가 적극 지원했고 세계적으로 명성을 높여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바렌보임은 자신의 삶을 크게 변화시킨 한 인물을 만나게 됩니다. 그가 바로 팔레스타인 출신의 세계적인 석학인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W. Said, 1935년 11월 1일~ 2003년 9월 24일)입니다. 에드워드 사이드는 <오리엔탈리즘>이라는 명저로 유명한데 두 사람은 민족과 사상의 경계를 허무는 우정을 나누면서 사회문제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고 보편적인 인류애를 실천하는 예술가로 변신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유대 민족주의자였던 바렌보임은 이스라엘 국민으로서는 최초로 팔레스타인 국적을 취득했고, 사이드와 함께 이집트, 이란, 이스라엘, 요르단, 레바논, 팔레스타인, 시리아 등 중동지역 연주자로 구성된 ‘서동시집’(West-Eastern Divan) 오케스트라를 창단하는 등 유대인의 관점을 벗어나 세계인으로서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갖게 되었습니다.    

  2001년 7월, 예루살렘 축제 연주에서 마침내 바렌보임은 바그너의 음악을 정규 프로그램으로 연주할 결심을 합니다. 그러나 이 계획은 두 달 전 들통이 났고 이스라엘 정치가들과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의 강력한 항의 때문에 결국 연주포기 약속을 합니다. 그러나 포기할 바렌보임이 아니었습니다. 연주회에서 정규 프로그램을 마치고 앙코르를 요청받자 객석을 향해 “저는 지금부터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 서곡을 연주할 예정입니다. 듣기를 원치 않으시는 분들은 나가주십시오”라고 정중히 말했습니다. 객석에서는 불만과 야유가 터져나왔고 많은 사람들이 자리를 박차고 나갔습니다. 그러나 과반수 이상이 남았고, 연주를 마치자 큰 박수가 터져 나왔습니다. 

  이 연주회 후 바렌보임은 이스라엘의 골칫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3년 후인 2004년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울프상 수상자로 바렌보임을 선정합니다. 바렌보임이 유대인의 우수한 음악성을 널리 떨치고, 인류애를 실천하는 이스라엘이 낳은 위대한 음악가라는 것이 선정 이유였습니다. 어쩌면 일종의 화해 제스처라고도 보여집니다. 그런데 바렌보임은 더 큰 소동을 일으켜 이스라엘을 발칵 뒤집어 놓았습니다. 울프상 시상식은 이스라엘 의회에서 성대히 거행되었고 대통령으로부터 상을 받은 바렌보임은 연단에 올라 수상소감을 발표했습니다. 그런데 이 수상소감이 이스라엘 정부를 향해 날리는 돌직구 같은 것이었습니다. 

  바렌보임은 이 자리에서 모든 접경국, 그 국민들과 평화와 우호를 유지할 것을 다짐한 이스라엘의 독립선언문을 인용한 후 “남의 땅을 점령하고 그 국민을 지배하는 것이 독립선언문 정신에 부합하는가, 독립이라는 미명하에 다른 나라의 기본권을 희생시키는 것이 정당한가, 우리 유대민족이 고난과 박해의 역사를 보냈다고 이웃 국가의 기본권을 침해하고 그들의 고통을 모른 척 하는 것에 면죄부가 주어지는가, 지금 이스라엘의 군사적인 분쟁 해결방식이 정당한가 라고 질문한 후 왜 진작 인도주의적 해결책을 찾지 못했나 자신을 꾸짖는다”라는 연설을 했습니다. 그러자 그 자리에 있던 이스라엘의 교육문화장관이 일어나 “바렌보임은 이 시상식 자리를 국가를 공격하는 기회로 삼았다”며 비판했습니다. 시상식 이후 바렌보임은 가뜩이나 바렌보임을 마땅치 않아 하던 이스라엘의 민족주의자들로부터 매국노라는 비판을 받습니다. 

  그들은 바렌보임의 과거사를 들추이며 비난을 가해왔습니다. 바렌보임은 젊은 날 영국 국민들의 뜨거운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천재 첼리스트 자클린 뒤 프레(Jacqueline Du Pre, 1945~1987)와 결혼했습니다. 뒤 프레는 부모의 결혼반대에도 불구하고 유대교로 개종할 정도로 바렌보임을 사랑했는데 뒤 프레가 다발성 경화증으로 서서히 근육감각이 마비되는 병마와 싸우는 사이 러시아 출신 유대인 피아니스트 엘레나 바쉬키로바와 동거하며 두 아이를 낳았고, 이 사실을 숨긴 채 이혼을 요구했던 전력이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병든 아내를 버리고 바람이나 피운 남편이 세계 평화를 논할 자격이 있느냐는 비난이 쏟아졌습니다. 

  하지만 바렌보임은 이에 굴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자신의 신념을 실천하고 세계 곳곳에서 평화 콘서트를 펼쳐갔습니다(2011년 우리나라 비무장지대 임진각에서 베토벤 9번 합창을 연주하기도 했습니다). 그러자 바렌보임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이스라엘에서 바그너를 연주하는 음악가들도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바렌보임은 지금도 세계인을 향해 “신념과 용기로 하고 싶은 일을 할 뿐”이라며 음악과 편견, 음악과 정치, 음악과 평화라는 묵직한, 그리고 누군가에게는 불편한 돌직구를 계속해서 날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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