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킵 네비게이션


분야별보기

트위터

페이스북

2015.5 | 칼럼·시평 [문화칼럼]
축제와 축제성에 대한 고찰
유진규(춘천마임축제 전 예술감독)(2015-05-07 10:33:12)

축제에서 축제성을 말하는 것은 모순이다. 왜냐하면 축제는 축제성을 갖고 있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에게 인간성이 있느냐고 묻는 것과 같다. 요즘 인간이 오죽 인간답지 않은 일을 많이 하면 그런 질문을 하겠는가? 마찬가지로 요즘 축제에 오죽 축제성이 없었으면 그런 말이 나올까?

1998년 춘천마임축제에서 심우성 선생의 ‘남도 들노래’를 외국 공연자와 같이 보면서 일어났던 일을 잊지 못한다. 그에게 저 공연은 한국의 전통을 현대화한 작품이라고 이야기했더니, 그는 그 말의 뜻을 알아듣지 못했다. 전통을 현대화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는 거다. 왜냐하면 전통은 당연히 현대화하게 되는 것이지, 억지로 현대화되는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이렇게 말도 안되는 일이 우리에게 벌어지게 된 것은 단절된 전통 때문이다. 일제는 강점기를 거치면서 축제를 포함한 우리의 문화활동을 식민문화정책에 따라 ‘미신’ 혹은 ‘미개’란 이름으로 억압하거나 금지했다. 해방 후 그것을 미처 수습할 틈 도 없이 한국전쟁으로 민족분단의 혼돈을 겪었고, 그 후 군사독재가 문화의 모든 것을 억압하고 왜곡하였다. 이러한 역사적 질곡을 극복하지 못한 우리는 이 시절에 다시 우리나라 축제에서의 축제성에 대하여 묻고 있는 것이다.
나는 우리나라에서 축제다운 축제를 꼽으라면 한 손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축제가 갖추어야 할 첫 번째 조건은 일상으로 부터의 일탈이다. 이것이 없으면 축제가 아니므로 축제란 단어 자체를 쓰면 안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1000여 개가 넘는 축제들이 축제란 단어를 쓰고 있다. 이는 행사와 축제를 구분하기 못하기 때문이다.
요즘 거리공연 축제가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일상에서의 일탈은 거리에서 하는 공연만으로도 이루어진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사실과 다르다. 대로에서 벌어지는 엄청난 스케일의 공연이든, 골목에서 벌어지는 작은 공연이든 모든 거리공연은 극장공간으로 부터 벗어났다는 공연의 일탈이지, 관객의 일탈은 아니다. 관객의 일탈은 의식의 변화로부터 가능하다. 그 의식의 변화를 어디서 이끌어 낼까?
축제는 1년에 한 번씩 허용된 혁명이다. 축제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여야 한다. 우리의 마을 대동제나 유럽의 바보제에서 혁명이 아니면 불가능한 권력의 뒤바뀜을 가상현실에서나마 가능하게 해주었다. 그것은 권력자가 축제꾼들을 통해 민중에게 베푼 고도의 통치술이었다. 서민들은 그들의 합작품을 모른 척 받아들이면서 권력의 희화화를 미친 듯이 즐겼다. 이것은 국가와 사회를 이상적으로 이끈 무언의 통치술이었다. 하지만 불행히도 우리 민족에게는 이러한 전통이 강제로 단절된 것이다.

축제의 회복 가능성을 보여준 2002년의 함성
축제 관객의 핵심은 마니아들이며, 그들은 공동체 의식을 가지고 있다. 그 공동체는 대단한 것이 아니라 단지, 밤의 추위와 쏟아지는 잠과 시간의 무의미함과 공동으로 싸워나가는 공동체라는 것이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이것은 일탈의 열정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그리고 이것을 소수의 마니아만을 위한 축제라고 생각한다면 2002년 월드컵 때 전국 곳곳에서 며칠 동안 밤을 지새며 대~한민국! 을 외쳤던 우리의 모습을 떠올려 보면 그것이 일상을 일탈한 축제의 모습이며, 절대 소수의 마니아만을 위한 축제가 아니었음을 알 것이다. 붉은악마는 억눌렸던 우리민족의 축제 혼이 그대로 살아있음에 미친 듯 공감하면서 그 모습을 전 세계에 자랑스럽게 보여주었다. 하지만 축제가 열정적 자발성으로 가득차면 군중적 열광으로 치달을 수 있지만 행정력, 자본력, 대중매체, 그리고 정치가 개입하는 순간 열기는 순식간에 식어버리고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관변행사로 전락하고 만다는 것을 붉은악마의 변화가 여실히 보여 주었다.
아직도 우리의 권력들은 사람들이 모여서 밤을 지새우며 광적인 신명풀이를 하는 것을 불안해하는 것 같다. 하지만 붉은악마와 촛불집회로 살아있음이 확인된 우리의 축제성를 살려나가면 축제정신은 없고 이름뿐 인 이 땅의 축제들에게 새 생명을 불어 넣을 수 있을 것이다. 이 기운을 다시 일으키기 위해서 모든 축제들은 어떤 방법을 쓰던 사람들을 북돋아서 집단신명을 느낄 때까지 해방감을 느낄 때 까지 이끌어 주어야 한다.
  
이제 다시 축제다운 축제의 부활을 위해 몇 가지를 제안한다.

첫째,  순수한 목적으로 축제성을 되살리고자 하는 축제는 주위의 어떤 세력과도 타협하지 말아야 한다. 그 순수한 축제성을 지지하는 사람들과 함께 끝까지 지켜나가야 한다.
둘째,  관, 기업, 대중매체, 정치집단은 순수한 축제성을 지켜나가는 축제들을 자신의 목적에 이용하려 하지 말고 우리 민족의 사라진 축제성의 부활을 위해 조건 없는 지원을 해야 한다.
셋째,  축제장에서 집단적 신명으로 권력이나 기득권층을 무력화 시키는 행위와 사회적인 금기를 포함한 모든 자유로운 표현행위에 대해 함께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이루어져야 한다.
넷째,  축제성이 없는 축제들은 앞으로 축제라는 이름을 쓰지 말아야 한다. 행사의 목적과 특성에 맞는 이름을 찾아 정체성을 확실히 밝히는 것이 혼돈을 막는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