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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7 | 칼럼·시평 [문화시평]
삶의 영역을 넓히고자 하는 그들의 노력
이승우(미술평론가)(2015-07-02 17:28:28)

전북 청년 2015전은 도립미술관이 야심차게 준비한, 그리고 진행 중인 프로젝트이다. 거기에서 선발된 4인의 청년작가는 어쩌면 우선은 축복받은 작가들이다. 가능성을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의 작품이 비상한 관심을 받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선 그들에게 찬사를 보내는 첫 번째 이유는 간단하지만 잘 지켜지지 않는, 어디서 본 듯하지 않은 그림들을 한다는 것이다. 어디서 본 듯하다는 것은 개성이 없다는 말과 같다. 미술은 아름다운 것이라는 오해는 이제 버릴 때이다. 미술은 독창성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창조는 항상 서툴다는 피카소의 말도 한번 새겨들어야 한다.


김성민은 본인에게는 결코 즐거운 일은 아닐 테지만 관객에게 거울을 비추어 인생살이의 불편함을 보여주고 있다. 물론 자신의 느낌일 테지만 말이다. 도립미술관 학예팀장 이문수의 지적처럼 "인간의 나약함과 절망감을 끌어내기 위해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다. "나약함", "절망감", "거친 숨"같은 단어를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은 매의 눈으로 보고 열정적 인간의 뜨거운 심장으로 느낀 것이리라. 여기서 "거친 숨"은 분노일 것이다. 김성민에게는 나약함과 함께 분노가  있다. 세상 안쓰러운 것들에는 스스로도 나약해지는 연민의 마음이, 인간의 비겁함에는 절망하고 활화산처럼 분노한다. 김성민의 그림 "화가 엄택수", "수줍음"에서는 연민이, "피에타"에서는 절망이, "bone"에서는 분노가. "텅 빈 생각"에서는 좌절이 보인다. 식상한 표현일지 모르나 한층 업그레이드 된 새로운 표현주의이다.


이주리는 그 흔한 대학원을 거치지 않고도 혼자 잘도 생각하고 그린다. 초기 작업은 별로 군상이 나타나지 않더니 요즘은 그로테스크하달만큼 역동적인 군상을 주제로 한다.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을 보고 그 모습 그대로 몸짓을 하자면 몸이 불편하기 짝이 없다. 오른쪽 턱을 괴고 있는 오른 손 팔꿈치가 왼쪽 무릎 위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로댕이라고 왜 오른쪽 무릎 위에 놓아야 편한 자세가 되는 것을 몰랐을까만 왼쪽으로 몸을 비틀어야 역동감이 더 표현되기 때문이다. 편한 상태로 다시 돌아가고픈 것을 역동성이라고도, 전문적으로는 동세(movement)라고 한다. 이주리가 처음으로 남자 누드를 시작할 때는 모델이 있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러나 지금은 모델이 없을 것이다. 그 어려운 포즈를 취해줄 모델이 과연 있을까? 아니면 기본적인 포즈만 취하게 한 뒤에 동작을 응용했지 싶다. 마치 관념 산수처럼 관념을 응용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김성민과 이주리의 공통점은 남자 누드를 그린다는 것이다. 고래로 많이 보아왔던 여인의 누드가 아닌 남자의 누드가 신선함을 넘어 충격적으로 느껴진다면 그들은 이미 절반은 성공한 것이리라. 그리고 누드란 벗은 상태가 아니고 아직 입지 않은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벗었다는 것은 수치심을 동반하지만 입지 않았다는 것은 원초적 관능이기 때문이다.


탁소연은 "무명씨"의 연작을 했다. 무명씨란 유명인의  반대말 정도로 생각하면 큰 무리가 없을 듯싶다. 그러나 대한민국에서, 아니 탁소연은 중국에도 오랜 세월 체류하였으니 거기도 포함, 기왕이면 그녀가 간접 경험한 지식과 상식까지 합해서 까지 생각해봐도 유명인과 무명씨의 관계를 병적일 정도로 비대칭적이고 비상식적일 것이다. 말하자면 민방위 교육장에 세계적인 화가나 철학자가 피교육자로 앉아 있어도 민방위 교육자는 원전의 경제성과 안전성을 한 치의 머뭇거림 없이 강요하는 강사에게 자신 앞에 앉아있는 모든 사람은 무명씨다. 유명 배우가 땀을 닦은 손수건에는 열광하지만 무명씨의 피눈물이 묻어있는 손수건은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다.  내가 누군가에게 무명씨로 취급받을 때 그 모욕감과 낭패감은 제어하기 어렵다. 종내에는 부당하고 억울하다는 느낌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만화 캐릭터에 불과한 뽀로로 마저 이미 사회 지도층이 된 이 마당에 닥치고, 무조건 찬양하고, 복종하는 그야말로 무명씨들을 회화화 했다는 것 자체가 그 조그만 체구에 여린 모습을 생각해보면 가당치도 않은 일이다. 그 가녀린 체구에 용암이 있었을 줄이야. 그러면서도 탁소연은 그러한 무명씨들에게도 무한한 애정을 보인다. 마치 한 소설가가 "이름 없는 들꽃이 지천으로 피어"라는 표현을 질책하였듯이 세상에 이름 없는 꽃이 어디 있겠는가. 무지하거나 관심이 없어서 모룰 뿐이다. 사람에 이르면 더 말해 무엇하랴. 그 배려와 섬세함이 돋보인다. 그러나 역으로, 절대적으로 그럴 일이 없고, 그래서는 안 되는 일이지만 만약에 유명인이 아니니까 용모가 아름다울 필요도, 구체적으로 묘사하지 않아도, 미완성인 채로 두어도, 부분적으로 뭉개지고 번져도  되는 편리함 때문, 단순한 그것 때문이라면 탁소연은 너무나 영리하다.


김병철은 그의 스승인 이건용에게서 많은 것을 얻은 작가다. 현대에서는 이미 사라진  도제교육의 현장을 보는 것 같다.그의 작업들을 보노라면 "작품이 무엇인지 알고자 한다면 감각적 경험을 이성적 사유로 바꿔야 한다"는 말이 절로 생각난다. 그림을 그리거나 자신만이 알 수 있는 어떤 것을 만들거나 설치해서 3차원 공간을 다 이용한다. 그냥 벽에  걸어 놓은 작품이거나 일정한 장소에 놓는 미술이 아니라 마치 가구를 배치하듯 전시장에 오브제를 배치한다. 그래서 전통적인 조각이나 그림은 그 작품 하나로 끝나기 때문에 전시 장소 어디에 갖다 놓아도 같은 작품이지만 그의 작업은 작품을 설치하는 장소 또한 중요하다. 그것이 설치 미술의 가장 중요한 특성이다. 그리고 그것을 미술적인 용어로 장소특수적(site-specific)이라 한다. 관객과의 거리를 좁히고, 관객이 작품을 보고 반응하는 모습까지가 자기 작품의 일부가 될 것이다. 우리가 기왕에 알고 있던 시각예술에서는 외모가 중요했다면 김병철의 미술은 그 안에 들어있는 의미를 더 중시하는 것이어서 "미술이 과연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으로 20세기부터 서양미술의 궤도를 바꾸는 의식의 혁명에서 부터 시작한 것이니 이 또한 전통이 되어가고 있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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