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킵 네비게이션


분야별보기

트위터

페이스북

2015.11 | 칼럼·시평 [문화칼럼]
울림에 떨림으로 응답하는 지역문화
김수우(2015-11-16 15:18:18)

무엇이 문화인가요. 어떻게 하면 좋은 글을 써나요. 사랑이란 무엇인가요. 어떤 예술이 훌륭한가요. 종교는요. 철학은요. 오래 전부터 종종 부딪히는 질문들이다. 나의 대답은 점점 간단해지고 한 가지로 함축된다. '사물의 음성을 듣는 거지요.' 
언제나 우리에게 말을 건네고 있는 사물들. 그 목소리를 듣는 것이 문화이고 예술이다. 사물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능력이 사랑이고 종교이며 좋은 글을 쓸 수 있는 방법이다. 듣는 능력이 있어야 상상하고 공감하고 응답한다. 듣는 능력이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이다. 들음이 없으면 어떤 울림도 만들 수 없다. 문화도 예술도 응답의 형식이기 때문이다. 사물의 목소리를 잘 들을 줄 안다면 어떤 타자의 목소리도 명료하게 다가온다. 사물의 세미한 떨림에서 우리는 우주를 감지할 수 있다. 자연은 그런 파문과 진동을 말한다.

예전에 파미르 고원을 횡단한 일이 있었다, 한여름인데도 설산이 둘러싼 고원을 고물버스로 종일 달렸다. 버스가 잠시 멈춰 내렸더니, 발밑에 노란색 보라색 자잘한 꽃잎들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다. 미세한 꽃송이들이 그 거대한 풍광을 품고 있었던 것. 인적도 없는 곳에서 말이다. 가슴 찡한 발견이었고 우주란 그런 소소한 목소리와 몸짓들로 구성된 광대함임을 이해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그리스인 조르바』에 울려나오는 조르바의 목소리를 듣는다.

"나는 세 부류의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요. 소위, 살고 먹고 마시고 사랑하고 돈 벌고 명성을 얻는 걸 자기 생의 목표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또 한 부류는 자기 삶을 사는 게 아니라 인류의 삶이라는 것에 관심이 있어서 그걸 목표로 삼지요.(중략) 마지막 부류는 전 우주의 삶을 목표로 하는 사람입니다. 사람이나 짐승이나 나무나 별이나 모두 한 목숨인데, 단지 아주 지독한 싸움에 휘말려 들었을 뿐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요. 글쎄, 무슨 싸움일까요? …물질을 정신으로 바꾸는 싸움이지요."

물질을 정신으로 바꾸는 싸움. 메토이소노(거룩하게 되기)이다. 물리적, 화학적 변화를 넘어 영적인 에너지에 닿는 힘, 그것이 생명이다. 유감스럽게도 우리의 문화현실은 반대로 정신을 물질로 바꾸는 싸움을 하고 있다. 모든 예술과 문화가 산업화되면서 기능적, 소비적이 되어버렸다. 학습자, 생산자, 소비자, 유통자까지 한데 몰린 중앙집중화는 정신을 물질로 바꾸는 도구적인 현실을 그대로 보여준다. 들을 줄도 응답할 줄도 모르는 삶이다.

지역문화는 그 반대이다. 물질을 정신으로 바꾸기 위하여 싸운다. 고단하고 외롭게 따뜻하게 빛난다. 문화는 어떤 성과로 재단할 수 없고 어떤 수치로 진단할 수 없다. 문화예술은 유용함의 세계가 아니라, 무용지용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 무용이 삶과 꿈을 을 듣게 하고 응답하게 한다. 지역문화를 가꾸는 사람들은 숭엄한 자연, 우주의 삶을 읽는다. 하여 물질을 정신으로 바꾸기 위해 지독하게 싸울 수밖에 없다. 내가 속한 지역에서 우주의 떨림을 감지한다. 보이지 않는 세계는 엄연한 현실이 된다.

스와미 웨다라는 인도 현자의 음성은 문화의 방향을 잘 보여준다. "촛불은 부드러운 미풍에도 꺼진다./ 그것은 바깥에 있는 것에 의해 점화되기 때문이다./ 반딧불이는 폭풍에도 빛을 잃지 않는다./ 그 빛이 자기 안에 있기 때문이다."

문화예술은 바깥에 촛불을 켜는 일이 아니다. 바깥에 아무리 촛불을 많이 켜도 작은 바람에도 쉽게 꺼진다. 아무리 거창하고 화려해도 일시적이다. 문화란 반딧불이처럼 자기 속에 존재하던 빛을 스스로 발현시키는 일이다. 이 빛은 어떠한 폭풍에도 한결같이 자신을 밝힌다. 바로 우주의 작업이기 때문이다. 이 빛은 모든 사람에게 근원을 환기시킨다. 문화예술에 대한 예산이 많아지면서 바깥에 켜는 촛불이 너무 많아졌다. 여기저기 축제가 넘쳐나고 너도나도 모여 환호하고 소비한다, 하지만 사회는 불신과 불안으로 술렁이고 폭력이 깊어진다. 이웃은 커녕 가족조차 믿기 어려워 자꾸 보험만 드는 현실이다. 

자기 안의 빛이란 무엇일까. 그건 신념과 꿈으로 어우러진 존재감이다. 그건 소유가 아니라 존재이며, 소비가 아니라 나눔이며, 덧셈이 아니라 뺄셈이며, 곱셈이 아니라 나눗셈이다. 근원을 기억하는 능력이며 흔쾌히 손해를 보면서 하나의 조화를 창출해내는 에너지이다. 지역문화가 고단하고 외롭긴 해도 별처럼 당당해야 할 이유이다. 그 별빛을 우리는 이상理想이라 부른다.

왜 이상을 말하는 목소리가 없는가. 왜 모두 단편적인 현실원칙에만 매달려 있는가. 왜 눈에 보이지 않는 현실은 인정하지 않는가. 이상을 가진다는 것은 아름다운 비전으로 빛나는 일이다. 이상을 가진다는 것은 욕망보다는 가치를 선택하는 것이고, 편리함보다는 즐거운 불편을 선택한다는 말이다. 이상을 가진다는 것은 자본이 몰린 중앙이 아니라 자기의 골목을 지킨다는 말이다. 우리 사회는 이상을 잃었다. 합리화된 자본주의는 이상주의라는 별빛을 희미하게 지워나가기 때문이다. 밤하늘에서 길을 읽을 수 있는 별빛은 인류에게 아름다움이었고 위로였고 약속이었고 예지였다. 이러한 이상의 상실은 이 시대 젊은이들을 '헬 조선'이라는 절망에 닿게 했다. 

문명이라는 피할 수 없는 야만에서 문화는 탐욕과 소비로 흘러간다. 거품이 된 일상에 익숙해진다. 하지만 진정한 문화는 맑은 눈물이 모이는 자리여야 한다. 넓고 깊은 귓구멍에는 맑은 눈물이 모인다. 맑은 눈물이 모인 자리는 우주의 울림으로 그득해진다. 지역문화의 귓구멍은 중앙보다 훨씬 넓고 깊다. 충분히 듣는 자라야 물질을 정신으로 바꿀 수 있다. 반면 녹슨 지남철에 달겨붙은 녹슨 못 같은 욕망의 문화는 귓구멍이 가늘고 좁은 대신 입만 아구처럼 벌어졌다고나 할까. 

듣는 귀는 우주적 생태를 이해한다. 듣는 문화는 지역을 지켜낸다. 듣는 예술은 자기 안에 빛을 켠다. 듣는 삶은 응답하는 사회를 만든다. 조르바의 목소리는 단호하게 계속된다.  

"두목, 음식을 먹고 그 음식으로 무엇을 하는지 대답해 보시오. 두목의 안에서 그 음식이 무엇으로 변하는지 대답해보시오. 그러면 나는 당신이 어떤 인간인지 일러 드리리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