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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2 | 칼럼·시평 [문화칼럼]
어느 시골작가의 잘난 척
정도상(2016-02-15 09:30:16)

 

 

익산으로 이사를 와서 짐보따리를 내려놓은 지 삼 년째에 들어섰다. 짐보따리를 내려놓기만 했을 뿐, 풀지는 못했다. 지상의 거처를 마련하는 일이 생각보다 늦어졌기 때문이다. 마당에 있는 나무 한 그루와도 이야기를 나누고 언제 뿌리를 옮겨야 좋은지 협상을 하다 보니 꽤 늦어졌다. 아무 때나, 사람의 마음대로 옮겨 심으면 나무들은 예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하게 몸살을 앓는다. 대부분의 나무들은 옮겨진 땅에서 몸살만 앓다가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말라버린다. 나무를 옮기려면 미리 이야기를 해줘야 한다. 나무한테 이야기하는 방식은 다양하다. 미리 뿌리에 신호를 보내 이사를 간다고 해야 정작 옮겼을 때, 몸살을 덜 앓는다.
마당 한 가운데의 나무를 담벼락 쪽으로 다섯 걸음 옮기는 데에도 이처럼 자연의 순리를 따지고 대화를 나눠야 탈이 없다. 그 때문에 거처를 짓는 일이 예상보다 늦어지게 된 것이다. 그러니 비용도 만만치 않게 많이 들어갔다. 하지만 비용의 문제가 아니라 나와 함께 살아가야 할 꽃이며 풀, 나무며 땅에게 허락을 구하는 시간이 반드시 필요했다. 그 시간을 정해준 것은 노모(老母)였다. 땅과 나무를 함부로 다루다가 동티(動土) 날 것을 염려하여 그렇게 삼년의 말미를 두자고 말했고, 나는 그것을 받아들였다.

 

익산으로 내려온 첫 해에 장편소설 「마음오를꽃」을 발표했다. 창작집이든 장편소설이든 단행본을 출간하면 기자회견, 기자 간담회 등을 갖게 된다. 모든 게 수도권 중심으로 돌아간다. 소위 중앙의 언론들에서 이 소설에 대해 좋은 평가를 많이 해주었다. 하지만 지역의 언론에서는 거의 관심을 두지 않았다. 하기야 익산으로 이주했다고 동네방네 떠들고 다닌 것도 아니니 서운할 것도 없었다.
익산에서 전주로 나들이를 갈 때는 주로 사적인 모임이 있을 때가 대부분이었다. 회원으로 등록된 전북작가회의의 모임에도 잘 나가지 않았다. 2007년 전주에서 치러진 <아시아아프리카문학축제>와 민족문학작가회의를 한국작가회의로의 개명 작업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뒤에, 나는 문단이나 시민사회단체의 여러 공직에서 스스로 물러났다. 이십 대 후반부터 공익근무에만 집중하는 삶이었으니 그만 두어도 되겠다 싶었다. 
2005년 여름 평양에서 열린 <남북작가대회>를 실무적으로 총괄하며 이리 뛰고 저리 뛰던 어느 순간, 문득 민족문학작가회의를 한국작가회의로 정체성 변경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작가 앞에 '민족문학'이라는 특수한 정체성을 부여된 것이 오랫동안 불편했고 싫었다. 특수에서 보편으로 나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작가회의' 앞에 붙은 '민족문학'을 떼어내기가 만만치는 않았다. '민족'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지사'들의 느닷없는 출현에 적잖이 당황했다. 하지만 '한국'이라는 지역성과 보편성을 담아내는 명칭이어야 한다고 많은 작가들을 설득했고 다행히 간판을 바꿔 달 수 있었다.
그리고 <아시아아프리카문학축제>는 우리 문학에 내재된 유럽 중심주의를 극복하고 비유럽적 지구적 세계문학를 지향하자는 의미를 담아낸 축제였다. 2005년 겨울, 전주에 사는 동료문인들의 힘을 얻어 당시 김완주 도지사를 한옥마을의 어느 식당에서 만나면서 일(?)을 시작했다. 그 자리에 고은 시인, 김형수 당시 작가회의 사무총장, 그리고 내가 함께 했었다. 또한 송하진 전주시장의 도움도 잊을 수가 없다. 전북에 살고 있는 수많은 동료 작가들의 도움이 없었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지속적으로 추진하지 못한 점이 못내 아쉽다. 아시아 아프리카의 87개국에서 작가들이 왔으니 참 대단한 일이었다. 하지만 예산이 많이 들어간다는 문제를 극복하지 못했다. 이런 행사가 지구적으로도 처음이었으니, 얼마나 많은 시행착오가 있었겠는가? 끊임없는 시행착오 속에서 문화는 스스로 축적되고 또한 발전한다. 그러기에 구더기 따위가 무섭다고 장 담그기를 포기했다면 된장 고추장 간장은 우리 민족의 음식문화 목록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익산에 사는 시골작가라고 해서 불편한 점은 거의 없다. <창비>나 <문학동네> 등의 문학지에 발표를 못한 것은 내가 작품을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작품이 없으니 발표하지 못하는 것은 아주 당연한 일이라고 말했더니 당장 쓴소리가 들려왔다. 지역에 사는 작가에게는 지면이 거의 허락되지 않는다고, 서울 문인들과 비교해 차별이 많다는 항의성 말을 들었다. 그럴 때마다 김용택, 안도현, 복효근 시인은 서울에 사는 문인들이냐고 되묻곤 했다. 지역에 사는 작가들의 어려운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라는 핀잔만 돌아왔다.
1987년 작가로 등단할 때 나는 전북대학교 독문학과 학생이었고, 전주에서 자취하고 있었다. 서울에 어떠한 빽(?)도 갖지 못했던 청춘이었고 촌놈이었다. 그저 쓰고 싶은 소설만 부지런히 썼다. 그리고 청탁과 상관없이 문학지에 소설 원고를 보냈고, 그렇게 발표가 되었다. 돌이켜보면 지역에 살고 있다는 그 어떤 자의식도, 지방대학의 잘 나가는 국문학과나 문창과도 아닌 독문학과 재학 중인 학생으로서의 열패감도 내게는 없었다. 그냥 썼다.

 

2017년은 작가 등단 30주년이 되는 해이다. 요즘의 나는 작가 등단 30주년을 기념하는 작품에 대해 골몰하고 있다. 주인공은 폐허가 된 사람이다. 폐허가 된 사람, 즉 폐인이 폐허를 여행하는 이야기가 될 예정이다. 폐허가 된 사랑을 가슴에 품은 어떤 사람이 체르노빌과 후꾸시마를 여행하는 이야기를 쓰기 위해 자료를 찾아 학습하는 등의 준비를 차곡차곡 하고 있는 중이다. 나는 오직 문장을 쓰면서 존재하는 사람이다. 목표는 간단하다. 실패하든 성공하든 매일매일 원고지 다섯 매의 이야기를 문장으로 축적하는 것이다. 어디에 사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떤 작품을 써내느냐가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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