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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3 | 칼럼·시평 [문화칼럼]
미술과 윤리
임옥상
(2016-03-15 10:39:53)





리얼리즘 복권 8인전(신학철 민정기 황재형 권순철 오치균 고영훈 이종구 임옥상)이 서울 인사아트센터 전관(2월 28일 까지)에서 열리고 있습니다. 가나 이호재 회장이 기획하고 유홍준 선생이 자문한 전시회입니다. 나는 이 전시회에 대해 잘 알고 있고 약간의 의견도 개진하였습니다. 전시 일정이 잡히면서 나는 이 전시를 나를 시험하는 기회로 활용하기로 하였습니다. 이를 통해 나와 나의 작품을 다시 점검해야겠다고 다짐했던 것입니다.
내 작품이 오늘에도 유효한가.
나는 욕심을 내었습니다.
본래 이 전시는 1980년대의 작품들을 재조명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세계미술시장에 한국의 리얼리즘미술을 재조명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구작을 9로 하고 신작은 1정도로 옛 그림을 중심으로 제한되어있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스스로 되물었습니다. 내가 골동작가도 아니고 시퍼렇게 살아있는데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작품을 꺼내 전시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하고 말입니다.
나는 신작 반, 구작 반 전시하기로 하고 작품제작에 돌입했습니다(나는 새로 그릴 그림을 신작이라고 제한했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지금 여기'를 그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순간 이곳의 얘기를 담지 못한다면 동시대성을 확보할 수가 없는 것이니까요.
나는 작업해 오면서 지금까지 동시대성이란 화두를 놓은 적이 없습니다. 여하히 동시대성을 확보할 것인가가 제 작업의 일관된 과제였던 셈입니다. 보지도 않은 알 수도 없는 곳, 현재의 시간이 아닌 옛날 또는 먼 훗날, 생면부지의 사람들을 그린다는 것을 나는 상상도 못합니다.
다행히도 전시장을 반 이상 채우고도 남을 작품을 차질 없이 진행했습니다.
그러나 신작은 단 한 점만 걸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이 출품된 한 점은 그 역할을 똘똘히 하여 제가 바라던 동시대성을 대표하고 있습니다. 관객들의 반응이 바로 그 답입니다. 시대의 아픔과 모순을 표현하는 예술본연의 역할을 잘 드러낸 작품이라고 말입니다.
사실 동시대성이란은 소통의 다른 이름입니다. 소통이 막힘없이 잘 되어야 동시대성을 공유할 수 있으니까요. 오늘 내가 그리는 그림이 의미를 가져야 80년대 그린 그림도 의미를 갖는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그땐 의미가 있었으나 지금은 없다거나 반대로 그땐 의미가 없었으나 지금 다시 보니 보인다거나 하는 것은 말로는 가능하나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항상 오늘의 시선이 더 중요합니다. 바로 살아있는 그 순간이니까요.
소통은 건강한 소통이어야 합니다. 닫힌 불건강한 소통은 협잡이요, 음모입니다. 뒷거래, 비공개의 닫힌 소통이 아니라 열린 민주주적인 투명한 소통이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평화적이고 자발적인 자유의지에 의해 결정되고 수용되는 것이어야 합니다.
80년대 미술이 오늘 재조명 될 수 있다는 것은 통제되고 강요된 닫힌 소통만을 허용했던 박정희, 전두환 군부독재에 맞서 민주주의라는 건강한 소통을 위해 맞서 투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나는 요즘 들어 자문하곤 합니다. 그림 그리는데 있어 무엇이 가장 중요한가? 사회성, 정치성, 예술성, 미학, 철학……????
나는 윤리라고 생각합니다. 윤리라는 단어를 찾은 것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만 제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한 마디는 윤리라고 말하겠습니다.
사람이 태어나 사람답게 사는, 살아야한다는 윤리의식이야말로 나를 이끌고 제어하는 최후의 기제임에 틀림없습니다. 사회정의에 등 돌리지 않고 측은지심과 수오지심을 갖게 하는 것도 윤리로 단련되지 않고는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그 무엇도 아닌 스스로에게 묻고 스스로에게 답하는 그 누구에게도 핑계대지 않는 끝까지 스스로에게 책임을 지우는 윤리의식, 스스로 부끄럽지 않은 예술가가 되겠다는 윤리의지가 지금의 나를 이끌었다고 감히 말하겠습니다.


최근 들어 소위 단색화가 세계미술시장에서 블루칩으로 뜨고 있습니다. 같은 미술인으로 축하할 일이고 부럽기도 하고  한국인으로 자부심을 느끼기도 합니다. 또 앞 세대 선배님들이 뒤늦게나마 평가받아 여간 즐거운 일이 아닙니다. 비록 박정희 시대 그 논리 그대로 미술계를 옥죄고 질식케 했던 '유신미술'로서 절대 권력을 휘둘렀지만 말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한국미술 국정화'도 아니고 미술사를 다시 쓰겠다고 나서고 있습니다.


"70년대 단색화는 현실을 외면한 게 아니다. 하나의 저항의 자세였다."(이우환)
"단색화는 침묵으로 체제에 저항하는 자세를 취하였다. 시대배경이 없었다면 탄생할 수 없었다."(윤진섭)


단색화의 열풍을 등에 업고 마치 목권이라도 할 태세입니다. 나는 이들의 그림을 가지고 왈가왈부는 않겠습니다. 다만 그들이 말한 대로 침묵의 미술인 것만은 시인합니다. 용기가 없어 하고픈 얘기도 못하고 그림 속에 숨어 지냈다면 누가 뭐라겠습니까. 안타깝다고 동정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결코 순박한 미술가는 아니었습니다. 미술 속에만 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권력에 적극적으로 화답하였습니다. 유신권력의 이데올로기에 맞게 미학을 정리하고 이론을 구축하고 논리를 전개했습니다. 그리하여 권력으로부터 미술권력을 하사받고 그 권력을 철저하게 행사했습니다. 어떤 미술 사조도 부정하였습니다. 모노크롬 미술만을 용인했습니다. 대학 강단을 그들의 아성으로 만들고 민관의 공모전을 단색화로 뒤덮고 민중미술의 탄생을 앞장서서 탄압하고 배격하였습니다. 당국에 앞서 민중미술에 이데올로기의 색깔을 덧씌웠습니다.


아, 그런데 그들의 진술을 듣고 보니 우리들의 동지였습니다!


우리는 몸을 던져 목숨 걸고 싸우고 저들은 침묵으로 저항 했을뿐 같은 편이었답니다. 독재를 싫어하고 부정했던 것은 사실이랍니다. 그렇다니 그대로 믿어야겠지요. 서정주시인 처럼 그가 비록 친일을 하고 전두환에 붙었다하더라도 그의 시가 탁월하니 예외로 해야 하는 것인가요.
어떻게 인간이 이렇게까지 갈 수 있을까요?


나의 윤리의식이 되살아나는 새해벽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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