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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9 | 인터뷰 [공간과 사람]
담쟁이 골목 안 '제3의 장소'
카페 '빈센트 반 고흐', 서보성 대표
윤지용(2016-09-19 09:38:21)




우리는 주로 집과 일터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 그러다 가끔씩은 집이나 일터의 일상을 벗어난 어떤 곳에서 마음 맞는 사람들과 편안하게 소통하며 소소한 행복감을 누리기도 한다. 축구장일 수도 있고, 단골술집일 수도 있고, 동네 미장원일 수도 있다. 사회학자인 레이 올든버그(Ray Oldenburg)는 그런 곳들을 집(제1의 장소)이나 일터(제2의 장소)와 구별해서 '제3의 장소(the third place)'라고 불렀다. 그런 제3의 장소는 누구에게나 필요하다. 기꺼이 당신에게 제3의 장소가 되어주고 싶다는 그곳, 전주 구도심의 오래된 카페 <빈센트 반 고흐>를 찾아가보았다.


카페 '빈센트 반 고흐', 서보성씨
전주시 완산구 전주객사5길 22-6





은은한 사이폰 커피향이 깃들었던 곳
'빈센트 반 고흐' 카페를 취재해달라는 말을 들었을 때 나의 첫마디는 "어? 거기가 지금도 있어요?"였다. 가끔 그곳을 드나들던 때가 90년대 초반 무렵이었으니 20년도 훨씬 넘었다. 은은하게 감돌던 사이폰 커피 냄새가 떠오르며 요즘 젊은이들 쓰는 말대로 추억 돋았다. 당시에만 해도 가루크림과 설탕을 섞은 인스턴트 커피가 대세였으니, 사이폰 커피는 문자 그대로 '신문물'이었다. 과학실험실에나 있을법한 알코올램프와 플라스크 같은 물건들을 탁자 위에 즐비하게 늘어놓고 커피가 튜브를 타고 천천히 흘러내려오는 것을 한가하게 구경하던 낭만이 있었다. 고압의 에스프레소 기계로 순식간에 '쥐어짜서' 물을 타주는 아메리카노에 익숙해져버린 건 언제부터일까.
건물마다 다닥다닥 붙어있는 간판들 사이를 헤매며 가물가물한 기억을 더듬고 스마트폰의 지도앱까지 동원해서 찾아가보니, 그때 그 자리 그대로였다. 카페 입구로 나있는 좁은 골목길에는 어김없이 담쟁이넝쿨이 드리워져 있었고, 보일락 말락 작은 간판에 상호와 함께  '1979.3.30.~'이라고 적혀 있다. 그랬지, 내가 다녔던 시절에도 이미 십몇 년 된 카페였지. 계단을 내려가 지하 카페에 들어서자 낯익고 또 낯설다. 벽에 걸린 오래된 액자들과 낡은 탁자와 소파들이 오랜만이라며 아는 체를 해서 낯익고, 요즘 다니는 커피전문점들과 너무 달라서 낯설다.


한때 도심의 명소였던 '빈센트 반 고흐'
1979년에 처음 이 카페를 시작한 사람은 유명한 음악방송 DJ 출신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 무렵만 해도 계란을 푼 쌍화차나 맥심커피를 '레지'가 날라다주던 다방 일색이었으니, 당시로서는 첨단 인테리어와 분위기 있는 음악, 원두커피를 선보인 '빈센트 반 고흐'는 오래지 않아 명소로 자리 잡았다. 지금도 젊은이들의 왕래가 많은 길목이지만, 그 당시에는 이 일대가 전주시내에서 손꼽히는 번화가이기도 했다. 이름 알 만한 문인과 화가들도 많이 드나들었고 선남선녀들의 데이트장소로 인기가 높았단다. 지금도 많은 문화예술인들에게 사랑받고 가끔 그 시절의 단골이었다며 찾아오는 중년들이 있다고 한다.
그 후 두어 번 운영자가 바뀌었다가 80년대 후반쯤부터 이 카페를 맡았던 강가현씨는 이곳을 문화공간으로 가꾸기 시작했다. 사람 만나서 음악 듣고 커피만 마시는 공간이 아니라 문화가 있고 담론이 있는 곳으로 만들고 싶었다. 스무 평 남짓한 넓지 않은 공간이지만, 영화모임, 클래식음악모임, 독서모임 같은 다양한 동아리들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새로운 유행 앞에는 장사 없었다. 90년대 중반부터 큰길가에 넓은 창을 낸 환한 분위기의 로스터리 카페들과 대형 커피전문점들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골목길 지하에 있는 '빈센트 반 고흐'를 찾는 발길들은 서서히 뜸해져갔다. 단골들과 마니아들 위주로 어렵사리 카페를 운영해나갔다. 게다가 강씨가 겸업하고 있던 다른 사업에 주력하다보니 카페운영은 갈수록 더 힘들어졌다. 어렵게 버텨내던 강씨가 결국 폐업을 고민하던 무렵, 오랜 단골이었던 한 젊은이가 말했다. "제가 한 번 해보고 싶어요."


카페보다 더 젊은 주인아저씨
차분하면서도 해맑다. 이 카페의 '제5대 주인'인 서보성씨에 대한 첫 느낌이 그랬다. 우리 나이로 치면 서른여덟 살 먹은 카페인데, 보성씨는 99학번 서른일곱 젊은이다. 다짜고짜 들이댔다. "젊은 분이 왜 이런 늙수그레한 카페를 해요?" 너무 직설적으로 물어본 건가 속으로 후회하려는 찰나에 선하게 웃으면서 대답한다. "저는 여기가 참 좋아요."
보성씨는 이집의 단골손님이었다가 주인이 되었다. 처음 와본 것은 고등학교 때였다. 교회에서 중고등부 활동을 하던 시절에 지도교사였던 선배님이 모임이 끝나면 가끔 데리고 왔었다고 한다. 그 후 대학에 입학하고 군대에 갔다 와서도 일주일에 두어 번씩 이집을 찾았으니 11년 동안 단골이었다. 이집에서 만난 사람들끼리 모여 각종 문화활동이나 봉사활동을 하던 동아리에도 막내로 꼬박꼬박 참여했다. 당시 주인이었던 강씨를 보성씨는 지금도 '가현아저씨'라고 부른다. "여기가 저한테는 말 그대로 '제3의 장소'였던 거죠."
보성씨의 이력은 꽤 다양하다. 타고난 인문주의자로 보이는 보성씨에게는 정치외교학과가 맞지 않았던 모양이다. 군에서 제대한 이후에 복학하지 않고 별 미련 없이 학교를 떠났다. 서점직원, 서적총판 영업 등 이런저런 일들을 했다. 어느 성공한 젊은 사업가의 강연에 감명 받아 무작정 상경해서 그가 경영하는 청과유통업체에서 일하다가 집안 사정 때문에 다시 내려왔다. 큰 교통사고를 당해 여러 해 동안 병원 신세를 져야했던 아버지의 병구완을 하면서 어머니가 시골에서 복분자와 오미자 농사지으시는 것을 도왔다. 고단했던 그 시절에 짬이 날 때마다 '빈센트 반 고흐'에 와서 음악을 듣고 책을 읽는 것이 큰 위안이 되었단다.
보성씨가 자신이 카페를 맡아서 해보겠다고 자청했을 때, 강씨는 말렸다고 한다. 날로 경영이 어려워지고 있는 상태에서 젊은 후배에게 무거운 짐을 떠넘길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고집을 꺾지 않는 보성씨에게 강씨는 "정 그러면 3개월 동안만 아르바이트로 일해보고 결정하라."고 제안했고, 3개월 후 보성씨는 결국 카페를 인수했다. 나이 서른쯤 되면 책방을 내고 싶었던 젊은이는 뜬금없이 카페 주인이 되었다.
운영이 어려운 상태인 줄 누구보다 잘 알았을 텐데 왜 그랬을까? 이 사람에게 이곳은 정말 특별한가보다. "보성씨에게 빈센트는 뭐죠?" 물었다. 보성씨 눈가에 언뜻 물기가 비쳤다. "제 젊은 날의 모든 추억과 고민들이 다 여기에 깃들어 있거든요. 소중한 사람들을 많이 만난 곳이기도 하고. 제 아내도 여기서 만났으니까요." 보성씨는 이 카페에서 만난 아내와 오랜 연애 끝에 재작년에 결혼해서 13개월 된 딸아이가 있고 몇 달 후면 아들이 태어난단다.


언제나 그 자리에 있을
보성씨가 카페를 물려받은 이후에도 운영수지는 썩 나아지지 않았다. 월세와 공과금, 재료값 등 비용을 빼고 나면 별로 남는 게 없단다. 그래도 보성씨는 씩씩하다. 넉넉지 않은 형편에도 꾸준히 영화상영, 음악공연, 문학강연 등을 이어간다. 인디밴드의 공연이나 연극공연은 물론이고, 전주영화제 기간에 때맞춰 카페 안에서 자체적으로 '빈센트 영화제'를 열기도 한다. '解바라기 강연'이라는 이름으로 여는 강연회는 제법 인기가 많다. 오마이뉴스의 오연호 대표, 안도현 시인을 비롯해서 쟁쟁한 지식인들과 문화예술인들이 기꺼이 이 작은 지하 카페에 와서 강연을 해주고 간다. 이런 문화행사들이 있는 날이면 보성씨만 죽어난다. 다른 손님들을 받지 못한 영업손실 뿐만이 아니다. 행사가 끝난 후 다들 뒤풀이 술자리에 보내놓고 혼자 남아서 자리를 정리한다. 객석을 만들기 위해 뒷골목에 치워놓았던 탁자와 의자들을 짊어지고 수십 번씩 계단을 오르내려야 한다. 참 사서 고생도 가지가지다.
요즘 보성씨는 설렌다. 올가을에 카페를 새로 단장한단다. 그 동안에는 추억 때문에 찾아오는 옛 손님들에 대한 배려로 되도록 7년 전에 물려받은 상태 그대로 유지해왔다고 한다. 그래서 이번에도 대대적인 리모델링은 피하고 많이 낡고 불편한 몇 가지만 조금 바꿀 예정이다. 이 기회에 육중한 탁자와 소파들도 좀 날렵한 것들로 바꾸면 앞으로 강연이나 공연도 편하게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좋아한다. 앞으로의 꿈을 물었더니 조곤조곤 대답한다. "오랫동안 꾸준히, 재미있게 이곳을 꾸려나가는 거죠. 저 자신을 포함해서 수많은 사람들의 추억이 있는 곳이니까요. 그 기억들이 곧 역사인데, 이 공간이 사라져버리면 역사도 사라지는 거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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