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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11 | 인터뷰 [작가를 찾아서]
정렬선생 만나러 가는 길
백학기 시인(2003-09-26 10:46:13)
1. 

내가 정렬선생을 처음 만난 것은 아마 서 너 해 전쯤으로 기억된다. 그 무렵 나는 처녀시집을 내었던 것인데, 평소 그의 시를 읽고 좋아하던 나는 그가 근무하던 신태인종합고교로 내 시집을 부쳐드렸다. 그리고 얼마 후 그 겨울 한 다방에서 우연히 선생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선생은 대뜸 '자네 시는 뼈가 있어, 시집 주욱 읽었지. 좋아. 좋아'를 연발하시었다. 나는 부끄러움으로 선생의 얼굴을 바로 보지 못하였다. 그러면서도 나는 선생의 얼굴을 몰래 훔쳐보았는데 그렇다. 선생은 꼭 우리 집안의 제일 어른이신 외할머니처럼 곱게도, 어리게도 보이셨다. 선생은 나에게 그렇게 인상 지워졌다. 그 후 종종 출판기념회 자리에서나 모 시상식장에서 나는 선생을 뵈었다. 그 때마다 선생은 먼저 나를 알아보시고 다가와 어깨를 두드리며 '좋은 시 쓰지?'라는 격려의 말을 잊지 않으셨다. 한 지역에서 살다보면 그 지역이 주는 안일함과 폐쇄성으로 자기 세계를 열어 나가기 어렵게 된다. 그런 경우를 목격한 나로서는 시대성과 역사성에 눈떠야 할 당위를 느낀다. 끼리끼리 모여서 문학을 한다고 써왔던 작품을 돌려 읽어가며 서로 부추기고 격려하는 일이란 물론 그 자체 의미가 있겠지만 그러한 문인들의 풍속을 벗어나서 외롭고 아름답게 홀로 시대에 대하여 역사에 대하여 가난에 대하여 삶에 대하여 노래하는 시인이란 흔치 않으므로 나는 정렬 선생을 좋아하였다. 선생은 늘 뜨겁고 치열한 시로서 한 편도 실패함이 없이 그의 시를 읽는 독자인 나에게까지 얼굴을 달아오르게 끔 만들었다. 시인은 많되 시대와 역사에 온 몸을 던지며 살아가는 시인은 많지 않다. 고향에 남아 3대째 살아오는 전북 정읍에서 밤으로만, 새벽으로만 그의 흰 머리칼 채를 묻으며 시를 써온다는 정렬 선생은 눈물겹기조차 하다.

선생 만나러 가는 길에는 사진가 최용부씨가 동행하였다. 토요일 오후 세 시 금암동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우리는 만나기로 되어 있었다. 오후의 햇빛은 부시고 바람은 맑고 깨끗했다. 터미널에는 최용부씨가 먼저 와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신태인행 차표를 끊어 개찰구를 벗어나와 버스가 오기를 기다렸다. 나는 전날 밤 통화한 선생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선생은 극구 놀러오라 하셨다. 하긴 별반 외출이 없는 선생을 찾아 뵙는 게 옳을 듯 하였다. 나는 수화기를 놓으며 오랑캐꽃, 들찔레, 산菊 같은 언어를 상상하였다.

천변을 돌아가는 시외버스 차창으로 가로수와 가까운 산의 나무들이 투명하게 스쳐와서 나는 깊어지는 듯 하였다. 가을 햇살은 얼마나 부시고 얼마나 아름다운가, 창가의 최용부 선생 또한 뭔가 깊이 생각하는 듯 하였다.


2. 

선생의 自選詩集 「할 말은 끝내 이 땅에 묻어두고」의 연보에 의하면 선생께서는 1932년 정읍에서 출생하였으므로 올해 나이는 쉰 여섯이다. 학력은 국학대학을 졸업하신 걸로 되어있다. 이 자선시집은 재작년 대학병원의 병중에서 선생 스스로 自選하신 시선집으로 의미가 더 깊다. 또한 자서에서 밝힌 바와 같이 문학에의 첫 출발이 한 소녀의 그리움 때문이었음을 고백하고 있다. 그리하여 문학예술지에 '山'으로 데뷔한 후 만 30여년 동안 쏟아온 문학에의 정열이 초라하고 허망하기조차 하다고 덧붙이고 있으나 죽음을 낼모레 앞둔 착잡한 심정의 한편으로 초로의 시인의 눈에 비친 갖은 사물과 목마른 그리움들에 대한 갈증 탓이었으리라 짐작된다.

태인에서 내린 우리는 선생께서 일러주신 대로 택시를 잡아타고 회룡리(回龍里)로 가자 하였다. 읍내 아스팔트 도로를 벗어나 가을걷이가 끝나 훤히 시야가 트인 태인 들녘의 돌자갈 길에 이르렀을 때 택시 기사는 정렬 선생을 찾아가느냐고 물어왔다. 우리는 심한 차체의 요동과 함께 머리를 끄덕였고 이어 그는 그의 은사님이라고 자기를 소개해 왔다. 셈해보면 신태인 종합고에서 스무 해가 넘도록 교편을 잡으신 선생을 태인 읍내 사람들은 모를 리 없으리라. 우리는 그에게 선생의 건강을 물었고 그 또한 재작년 1월 담석수술로 인한 병세까지도 자세히 알고 있었다.

선생은 문 앞에까지 마중 나와 계셨다. 3대째 살아오신다는 선생의 집 문전에서 선생을 대하니 나는 감격스러웠다. 선생은 문자 그대로 하나의 農老였다. 가진 것 없는 텅 빈 농로였다. 나는 전북 정읍군 정우면 회룡리 142번지의 주인인 선생의 문패를 올려다보았다. 선생은 이 지상에 한 문패를 갖고 계셨다. 시인 정 양의 표현대로 하자면 선생은 만나 반가움을 情범벅으로 나타내셨다. 젊은 날 문학 공부하던 시절 그 이름만 들어도 설레이는 '思想界'誌 출신의 이 초로의 시인은 반가움을 어찌 드러낼지 몰라 온몸으로 우리를 안으려 하였다. 선생의 안내로 우리는 마루로 올라섰다. 마루 위에는 금방 배달되었는지 몇 통의 편지와 개봉하지 않은 「韓國文學」11월호가 놓여 있었다. 선생께서는 벌서부터 안쪽 부엌에 대고 술상타령이셨다. 한 치의 꾸밈도 없이 선생의 시 곳곳에서 드러나는 진솔한 내용의 사모님께서는 일상의 노동에서 돌아와 선생의 채근이 채 끝나기도 전 따뜻이 데운 정종과 안주로 고기볶음을 내오셨다. 사모님의 손길에서 문득 나는 선생의 죽음의 시편인 '동백꽃'을 생각해 보았다.

죽음이란 철학적 사색이 아닐는지 모른다. 한 시인에 의하여 생활 속에서 만나지는 구체적 현실감으로 이 만큼 죽음이 가까이 피부로 와 닿은 적이 없었다. 나는 동백꽃으로 죽음을 체험하였다 하면 지나칠까. 선생은 벌써 정종을 따르고 계셨고 한 편의 시를 다듬고 다듬어 낸다는 선생의 서재 이곳 저곳에서 수권의 민중시선집과, 두터운 한글사전, 선생의 출근복인 양복 한 벌, 선생의 詩書를 나는 보았다. 감동적으로 선생의 잔을 받아 마셨고 감동적으로 선생의 잔에 술을 부었다. 선생께서는 뒤란에서 따오셨다는 홍시를 권하기도 하였다. 선생은 전날 통화에서, ……취재는 무슨? 그냥 놀러와서 술이나 한 잔 하지…… 라는 말을 그대로 실행하듯 빈 잔에 따끈한 정종을 채우기만 하셨다. 그 사이에 나는 선생에 한 가지만 여쭙고 싶어졌다. 

"요즘 무슨 생각을 많이 하며 지내시는지"

선생은 시만 생각하신다 하였다. 좋은 시 쓰고 싶어 몸이 단다고 말씀하셨다. 졸업한 한 제자가 찾아와 시 열심히 쓰시라고 대학노트 한 권을 두고 간 건에 갑자기 선생은 눈시울이 붉어지려 하였다. 그렇다. 무엇을 더 보태라. 선생은 막막한 슬픔에 사로잡히는 듯 하였다. 그것은 곧 쓰여질 쓸쓸하고 아름다운 시 한 편을 위한 눈물일 것이었다. 시간 맞춰 대기해온 택시가 문밖에서 경적을 울렸다.


3. 

회룡리를 돌아 나오는 택시 안에서 나는 선생이 친필하여 주신 「바람들의 世上」(汎友社, 1976)의 自序를 읽어 보았다. 첫 시집 「遠雷」를 내고서 꼭 15년 만에 내셨던 선생의 두 번째 시집이었다. 이제 남은 일은 내 餘生을 걸고 칼집에서 다시 칼을 뺀 이상 쳐야할 일이다.

저 한 소녀의 그리움으로 인하여 시작한 문학에의 출발에서부터 가정적으로는 민족의 비극에 형님을 잃으시고 3대 독자의 외로움 속에서 죽음을 체험한 선생께서는 農老의 얼굴로 고향 마을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제가 꼰 새끼줄에 제 손들 묶여>, <성한 꽃이고 싶어라>, <뜬눈으로 누워서>, <南北>에 이르기까지 당신의 전생을 기울여 우리에게 문학이 무엇인지, 삶이 무엇인지, 역사가 무엇인지를 순교하는 모습으로 보여주었다.

문득 태인 들녘 서쪽 끝에서 막 저물어 가는 노을 속에서 힘찬 날개를 털 듯 두승산이 불끈 일어서는 광경을 나는 보았다. 보고 있었다.



백학기·시인

정렬 선생의 약력
1932년 전북 정읍에서 출생하여 국학대학을 졸업, 1953년 「자유신문」신인작품 모집에 당선하면서 詩作활동 시집 「遠雷」(1961),「바람들의 세상」(1961),「어느 凶年에」(共著,1982)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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