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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2 | 인터뷰 [우리 옆의 예술가 | 작가 이일순]
서학동 사진관을 물들일 새로운 봄을 찾아서
김하람 기자(2022-02-09 14:25:51)

서학동 사진관을 물들일

새로운 봄을 찾아서

 김하람 기자



한파에 전주천이 얼었다. 찬바람에 코트 깃을 부여잡고 단장을 하고 있는 서학동 사진관을 찾았다. 지난 12 전시를 끝으로 겨울 방학에 들어간 서학동 사진관이 올봄부터서학동 사진미술관으로 새롭게 출발한다. 이름만 바뀌는 것이 아니다, 운영자도 바뀐다. 사진작가인 김지연 관장의 뒤를 서양화가 이일순이 이어받았다. 작품이 빠져 전시관에서 앞으로 공간을 새롭게 꾸며나갈 공간의 새로운 운영자이자 작가인 이일순을 만났다.



작가로서의

서학동 예술마을의 골목길 끝에 위치한 서학동 사진관은 2013 5 처음 문을 열었다. 공동체박물관 계남정미소를 운영하던 김지연 관장이 마련한 공간으로 사진을 중심으로 초대전시를 기획해 운영해왔다. 이일순은 서학동 사진관에서네게로 오는 아는 사람 번의 전시를 가졌다. 부드럽고 몽환적이며 동화적인 작풍으로 전시장을 찾는 관람객들에게 위로를 전했다. 현재의 작품을 보면 전혀 상상이 가지 않지만, 그에게도 거칠고 날것 그대로의 생생한 작업을 하던 때가 있었다. 대학과 대학원을 다니던 시절, 표현주의 미술이라든지 포스트모더니즘 당시 유행하던 미술계의 경향에 영향을 많이 받았었던 시절이라고 말했다.  


그때는 있는 그대로의 생각이나 느낌을 거칠고 생생하고 날것을 추구했어요. 천이나 길에서 주운 쇠붙이를 작품에 붙이기도 했죠. 마치 제가 튜브물감이 되어 짜는 대로 짜지는 듯이요.”



작업의 스타일이 바뀐 대학원을 졸업한 익산에 작은 작업실을 마련했을 때다. 작업실은 아파트로 둘러싸인 상가의 3층으로 사방이 유리로 되어 있어 밖에서 안이 보이는 구조였다. 삭막한 아파트 풍경에, 학교 다닐 때와 달리 혼자 지내야 해서 외로운 마음이 들었다. 감정의 변화가 생긴 가운데 재료도 한정될 수밖에 없는 환경에 처했다. 그는 작업실에서 교습소를 운영하며 아이들을 가르쳤는데, 아이들이 그의 거친 재료들을 몸에 묻히고 집에 돌아가기도 했다. 아이들이 만지면 좋을 만한 재료들을 피하다 보니 아크릴 물감만 남게 됐다. 아크릴 물감을 본격적으로 다루기 시작한 것은 대학원 졸업 이후다. 건조한데다 마르기도 하는 아크릴 물감을 다루는 것이 처음에는 낯설었지만 어느 순간 자신이 느끼는 삭막함과 물감의 느낌이 맞아떨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어렸을 때는 단순하게 그림으로 나를 표현하면서 만족했던 같아요. 거칠고 자유분방하고, 그런 것이 예술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어요. 어느 순간 그림의 분위기가 달라지기 시작했는데, 당시의 환경이 많은 영향을 미쳤던 같아요. 학교에서 함께 부대끼면서 생활하다가 혼자 작업실을 이루면서 찾아온 삭막함 속에서 혼자만의 에너지를 느끼면서 작업하다 보니 나온 저의 다른 모습이었던 같아요.”


이전에는 날것의 감정을 오브제에 투영했다면 이제는 점차 이미지화된 사물에 자신을 투영하기 시작했다. 바뀐 작업 스타일을 처음 선보인 것은 1 개인전초대에서부터다. 익산의 작업실에서 개인전을 준비하던 , 한쪽 창을 가득 채운 넓은 아파트 벽면을 보며 사막의 모래밭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드넓고 쓸쓸한 느낌. 작가는 감정을 사막에 홀로 있는 선인장으로 표현했다. 그리고 선인장에 자신을 투영했다. 작가는 주로 일상 속에서 쉽게 마주하게 되는 사물에 자신의 감정을 담았다. 팔복동이 보이는 집에서 생활할 때는 공장 굴뚝에서 밤에도 뿜어져 나오는 연기가 자유로워 보였다. 쓰레기를 버리고 돌아오는 길에 마주한 놀이터는 마치 놀이기구들이 아이들을 기다리고 있는 듯해 자신의 모습과도 비슷해 보였다. 작가는 주변 사물들에 당시의 감정을 대입해 그림 안으로 끌어들였다. 



간절한 마음으로 미술을 붙잡다

번째 개인전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은 뒤인 5 만에 있었다. 번째 개인전의 타이틀은 ‘fossilization(화석화)’. 작가는 당시 무언가 부여잡고 싶은 감정이 있었다고 말한다.


살면서 그림 그리는 것만큼은 하고 싶었어요. 당시만 해도 미술을 한다는 것이 생활에 도움이 되는 일인지 아닌지를 계속 판단하며 살아야 되는 시점이었어요. 미술은 하고 싶은 것이었고, 저는 놓고 싶지 않은 마음 때문에 하나 그려도 새기듯이 그렸던 같아요. 그러면서 항상 다짐을 했어요. 어떻게든 그림 그리는 일을 해야지 라고.”


그가 가족들에게 미술로 먹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최근인 10 전까지만 해도 실질적인 일을 해야 하지 않겠냐는 이야기를 들었다. 학교 다닐 그림을 그리는 것은 공기처럼 당연한 일이었지만, 결혼을 뒤에는 그러지 못하는 상황에 그림이 더욱 소중해졌다.


저희 세대는 엄마나 며느리라는 자리가 집안의 대소사를 책임져야 하는 자리라고 생각했어요. 적어도 자녀들이 장성해서 결혼할 때까지는 위치를 지키고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인식이 있어요. 그래도 저는 남편도 그림을 그리니까 다른 사람보다 이해받을 있는 환경이기도 했어요.”


그는 그림을 그리면서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무 문제없는 일이라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기 위해 교습소 운영도 했으며, 최근에는 대학교에 출강하고 있다.


예전에는 예술가는 어떤 몸과 정신 자체가 예술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는데, 그런 것을 계속 내려놔야 되는 상황이었죠. 사는 것이 풍요롭지는 못했어요. 자식 노릇도 해야 하고 부모 노릇도 해야 하지만, 남편은 저를 그림 그리는 사람으로 생각해주고 응원해줬어요. 그게 지금까지도 고마운 마음이에요.”



서학동 사진관에서 서학동 사진미술관으로

그가 서학동 사진관과 인연을 맺게 것은 2017년부터다. 사진 전문 전시장이 주변에 생겼다는 이야기를 듣고 사진 작품에 대해 궁금해서 여러 사진관을 찾았다. 


공간에 와서 보는 사진들은 뭔가 달랐어요. 그래서 자주 와서 보게 됐는데, 어느 김지연 선생님이 공간에 관심이 있으면 자신을 조금 도와줄 있겠냐고 하셨어요. 사진에 대해서도 있는 기회가 되겠다 싶어 알겠다고 했죠.”


2017년부터 일주일에 서학동 사진관을 맡게 됐다. 처음에는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했다. 그렇지만 작년 공간을 이끌어가는 것이 힘들 같다는 관장의 이야기를 듣고 고민이 생겼다. 공간을 운영해본 경험이 없어 선뜻 나서지는 못했지만, 서학동 사진관이라는 공간이 사라져버리는 것은 너무나 안타까웠다. 고민 끝에 결정을 내렸다.


선생님이 도와주신다면 제가 한번 일을 해보겠다고 말씀드렸어요.”


서학동 사진관은 그동안 사진 중심의 초대전으로 공간이 운영됐지만, 올해 3월부터는 운영과 예산상의 문제로 대관전시장으로 전환하고 이름도서학동 사진미술관으로 바뀐다. 아직은 전시장을 대관전시장으로 바꾸는 과정에 힘을 쏟고 있지만, 공간이 안정되면 기획전도 계획이다. 마음속으로 생각해 계획은 전북에서 작업하는 작가들의 아카이브 전시다. 그가 영감을 많이 받았던 1990~2000년대에 활동했던 작가들의 작품을 다시 조명해보고 현재는 어떤 활동을 하고 있는지 살펴보는 . 개인전만 20 , 26년간 그림을 그리고 있는 중년 작가이지만 기획자로서는 이제 첫발을 내딛은 만큼 우선은 공간의 안정화를 위해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가고 있다.


서학동 사진관에 작품을 관람하는 관람자로 발걸음 하며 느낀 것들 배운 것들이 제가 작업을 하는데도 많은 도움을 주었듯이 앞으로 공간(서학동 사진미술관) 누군가에게 그런 공간이 되었으면 해요. 선생님께서 정성으로 가꿔 오신 뜻이 마음을 같이 하는 사람들을 통해 계속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으로 역시기획자 직함으로 노력을 더해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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