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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3 | 인터뷰 [문화와사람]
<작가를 찾아서>조각가 黃純禮진실된 표상의 映像自我
문화저널(2003-12-18 11:46:34)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나에게서부터 희·노·애·락 등 온갖 감정으로 표상되는 나의 얼굴들을 대하면서 숨기고 싶은 나만의 이야기들을 계속하고 있다. 사랑하는 이들의 지긋한 시선에 감사하는 마음속에서 천태만상으로 변하는 나의 콧잔등에 무상연민의 시선을 보내면서 한조각씩의 돌을 쳐내고 있다.-


 여류조각가 황순례씨가 개인전 팜플렛에 밝혀 놓았던 그의 작가의식이다. 인간에게 있어 특히 예술가에게 있어 자기를 표현하려는 욕구는 매우 강하고 자연스러운 것이면서도 그것은 항상 충족이란 차원과는 멀리 떨어져 있는 일종의 신기루 같은 것이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내면을 성찰하고 체험을 되돌아보며 자기철학을 구가할 수 있는 자기표현에 성실할 수 있다는 것은 예술가들이 지닌 그들만의 특권이 아닐까 싶다. 조각가 황순례의 작품을 대하면 바로 이 예술가의 특권을 참으로 철저히 누리고 있는 작가라는 느낌을 별 어려움 없이 받는다. 자기표현의식에 철저함이 예술의 생명력이라 한다면 그는 일단 긴 생명력은 보장받은 셈이다. 황순례의 작품은 거개가 얼굴이다. 그래서 그를 「얼굴의 작가」라고 한다. 수많은 인간 군상들의 표정들을 보고 있노라면 희·노·애·락의 감정이입에 별다름 있을까 하는 생각을 갖지만 막상 그의 작품. 그의 「얼굴」들을 대하면 한마디로는 단정지을 수 없는 느낌을 준다. 그것은 일종의 바로 내모습. 나의 이웃사람의 모습에 대한 충격이기도 하다.


 그의 작품을 처음 마주한 것은 84년 전주에서의 개인전에서 였다. 당시 전시실안에는 40여점 정도의 작품이 출품되어있었는데 대여섯 작품을 제외하곤 모두가 얼굴을 담아낸 것이었다. 그때 필자는 순간적으로 섬짓한 느낌을 받을 수 밖에 없었는데 사람의 얼굴이 과연 이처럼 일그러지고 단순화되어질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에서 였던 것 같다. 그러면서도 오랫동안 지켜보면 볼수록 그것은 친근감을 주면서 내얼굴로, 혹은 친구의 얼굴로, 이웃들로의 실재감을 자연스럽게 불어넣어주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는데 그러한 이유로 그로테스크하고 기형적인 그의 얼굴들에 그만 푹빠져버리고 말았다.


  조각가 황순례는 1946년 群山에서 태어났다. 6남재중 둘째였던 그는 동생들이 생기면서 오빠는 큰아들이었으므로, 동생들을 어머니의 품안에서 떼어놓을 수 없어, 할머니가 길러주기에 가장 좋은 조건(?)을 가진 덕에 형제와 따로 떨어져 유년기를 보냈다. 국민학교 입학할 때까지 할아버지 할머니 다 성장한 고모들 밑에서 자라면서 자연히 무엇이든 혼자해버릇했던 이시기가 그에게는 알게 모르게 예술가로서의 바탕을 다져놓은 듯하다. 그는 가족관계에서의 자기존재를 「덤으로 사는 인생」이었다고 흔쾌하게 웃으며 표현했는데 어렷을적 당시에는 진절머리났던 혼자만의 시간과 고집이 조각과의 영원한 끈을 매는 계기였던 것 같다고 말한다. 그는 국민학교때부터 그림을 꽤 잘 그리는 아이로 통했지만 미술가, 그것도 조각가가 되겠다는 꿈은 없었다. 그는 고등학교(군산여고)에 입학하겠다는 구체적 인생관을 스스로 설정할 수 있게 된 때문이었다. 이때의 황순례와 조각과의 인연은 순전히 당시 미술교사로 있었던 김윤신씨(조각가)의 영향이었다. 김선생은 유난히 미술솜씨가 뛰어난 그에게 각별한 애정을 가졌고 그 애정은 감수성 예민하 여고생에게 감도엥 가까운 기쁨을 안겨주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아마 나에게 처음으로 관심을 주었던 분이 아니었나 싶어요, 그랬으니 조각이라면 석굴암밖에 몰랐던 아이가 선생님처럼 조각가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가졌던 게죠」그가 작가로서 성장해 나오면서 영향을 받은 스승을 든다면 곡 두명을 말하는데 김윤신선생과 大學스승인 전뢰진선생이 그들이다. 사실 여류조각가 김윤신씨는 고등학교 미술반 담당교사이긴 했지만 1녀도 채 못되 전근을 가는 바람에 정작 지도밭은 인연은 매우 짧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김선생과는 모녀관계에 가까울만치큼 깊이 교분을 이어오고 있을 정도로 각별한 연을 맺고 있다. 조각에 대한 눈을 트이게 해준 스승이 김윤신씨라면 그에게 작가정신을 깨우쳐준 사람은 대학시절(弘益大, 조소과)의 전뢰진선생이다. 끊임없이 작업하는 선생의 창작열에서 그는 작가로서의 지녀야할 정신을 배웠고 그에게 있어 영원한 소재인 돌에 대한 감각도 선생을 통해 익혔다. 작품초기에 그는 유리와 이물질을 혼합, 불을 이용한 작업을 했다. 일종의 재료의 다양성을 추구한 작품이었다. 그러다 돌을 잡은 것은 대학졸업을 즈음해서다. 처음에 그의 돌작품은 다분히 추상적이었다. 그 이후 조각가 황순례와 「얼굴」과의 만남은 참으로 우연히 이루어지는데 74년 한국여류조각회 창립전에 그가 큰기대없이 출품했던 작품이 한관객에 진한 감동을 주었고 그 자신 또한 순간적인 감동에서 비롯한 의욕으로 「얼굴」연작은 그에게 새로운 세계를 열게 하는 주제가 된다.


 이후 10여년동안 그는 줄곧 얼굴만을 다뤄왔다. 주제의 일관성에서도 그렇지만 그의 조각적 발상은 독특하면서도 끈질기다. 「돌의 원형에 충실하려는 노력」과 「재료에서 완성된 작품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자신의 손안에서 모두 해내는 것」이 작가로서의 그가 지닌 근본자세이다. 그의 「얼굴」들이 그처럼 다양할 수 있고 또한 전형화되고 유형화된 아카데믹한 頭像과는 전혀 다른 생명력을 가질수 있는 것도 이런 의식때문이 아닌가싶다. 그는 나뒹구는 돌에서도 像을 떠올린다. 그렇지만 像의 모델은 없다. 허상이면서도 허상이 아닌 실재감을 획득할 수 있다는 것은 조각가 황순례만이 지닌 독특한 조형의식때문이 아닐까. 그에 있어 「얼굴」은 단순히 美의 규범으로서의 소개자 아니며 자기탐닉의 소재는 더욱이 아니다. 그것은 작가자신의 내면적 삶의 꾸밈없는 표상이면서 진실이다. 미술평론가 李逸은 그의 작품들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의 기묘한 두상들은 이목구비를 갖춘 얼굴이기 이전에 우선 하나의 메타모어(音喩)의 형상으로 존재하며 그 메타포어는 미쳐 성형(成形)이 되지않는 미진화(味進化)상태에 있는 생명의 그것이다. 그 얼굴들은 그 어떠한 의미를 지니기 이전에 스스로의 의미를 찾고잇는 그러한 얼굴인 것이다.- 황순례의 작품은반드시 이중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는 것이 또 하나의 특징이다. 한쪽면은 쪼아내는 기법으로 , 다른 한쪽면은 갈아 광택을 내는 기법으로 처리하는데 성악설이나 성선설을 굳이 따지지 않고서도 항상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고 있는 善과 惡의 이중성을 전형성에서 뿐 아니라 질감을 통해서 표출해내고자하는 그의 주제의식에 대한 치열함이 그대로 반영된 셈이다.


 86년을 즈음해선 돌덩어리의 안쪽 공간을 텅비게 한 상태에서 두 개의 표정을 양면에 비쳐지게 하는 작업을 했다. 75년과 81년, 84년에 이어 3년만에 가진 네 번째 작품전에서 그는 이 작품들을 출품했는데 그 스스로가 실패라는 결론을 얻었다. 돌의 무게가 주는 중압감을 절감하려했던 의도는 성공했으나 한 인간의 두 개의 감정 표현, 즉 이중의 인격성 표출은 제대로 되지않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는 이때부터 자신의 작업에 대한 자신감에 갈등을 안게 됐다. 「조각의 예술성을 추구하는 작업으로서가 아니라 단순한 노동에 빠져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정신적으로 뿐아니라 육체적으로 더욱 힘이 들었습니다. 새로운 출발을 위한 정리기간이 필요했지요.」 일단 그의 분신이라해도 좋을 돌을 그의 손에서 떼어놓는 일이 필요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끊임없는 창작열이 중단된 것은 아니다. 돌을 통해 표출해 내고자했던 이미지를 그는 테라코타로 얻어보고자 시도했다. 그러나 십수년 그가 간직해왔던 돌과의 교감을 잊고 작품세계를 추구해나가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라는 결론을 얻어냈다. 결국은 돌로서 다시 시작해야하는 자기확신에 도달한 셈이다. 그의 초기작품부터 근작까지를 살펴보면 눈길을 끄는 공통적인 특징을 발견하게 된다. 일그러뜨리거나 단순화하는 작업속에서도 유난히 강조되어있는 입들이 바로 그것이다. 꽉다물고 있는 형태가 대부분인데 근작에서는 조금씩 열리기 시작했다. 시대상황과 관련이 있는 것 같아 물어보았더니 자신의 생활이 알게 모르게 반영돼 있는 모양이다고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앞으로의 그의 작품들이 입을크고 자유스럽게 벌릴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작가의 의도와는 별개로 한 관객이 작품을 통해 자유로운 상상력을 펼칠수 있게 한다는 것 또한 예술가만의 큰기뿜이 아닐까? 조각가 황순례는 참으로 열심히 작업해 온 노력하는 작가다. 67년 國展에 처음 입선한 이후 12년동안 단 한번을 제외하곤 연 11회 입선하는 성실성을 보였는가 하면 한국현대조각대전·한국여류조각회전등에 빠짐없이 출품해오고 있다. 77년엔 井州 내장사입구의 「井邑詞시비」여인상을 제작했으며 群山의 착한 목자상도 같은해 제작한 그의 작품이다. 서른두살 과년한 나이로 결혼한 그는 오히려 결혼한 이후 더 열심히 작품을 내왔다. 76년부터 몸담아온 全州大의 미술교육과 교수로서도 게으르지 않다. 주부로서의 게으름은 그에게서 더욱 멀다. 자신의 모든 역할에 대해 충실하고자하는 그의 노력은 때로 조각가로서 되돌아왔을 때 많은 갈등을 안겨주는 것 같다. 그는 일전 자신의 생각을 이렇게 말한적이 있다. 「예술은 공동체적 욕구에 그 기원을 두고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것이 지니는 특수한 미학적 목표나 형상화는 궁극적으로 창조적인 개인으로 하여금 전적으로 자아 중심적인 소우주속에서 충분한 체험을 하도록 하여 다른 개인들로부터 격리시키는데서만 달성된다고 합니다. 이런 관점을 전제로 할 때 조그마한 머리속에 늘가족들로 가득한 나의 경우, 「예술가」가 되기는 아예 어려울 것 같은 생각이 들어요」 자신을 되돌아보는 일에 게으르지 않는 조각가 황순례, 그는 자신의 말처럼 다른 개인들로부터 격리할 수는 없다손 치더라도 조그만 머릿속에 늘 가족을 생각하고 있음으로 해서, 그리고 이웃을 안고 있음으로해서 오히려 상징적인 의미를 뛰어넘는 친숙한 얼굴들을 탄생시킬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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