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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3 | 인터뷰 [문화와사람]
현대에 재생 될 수 있는 전통적 양식의 관념
이철량(2003-12-24 13:35:55)


 오늘의 한국화가 조선시대이래 남종수묵화로 대세를 이루어 온 것은 우리의 민족성과 무관하지않다. 서정적이고 부드러운 분위기를 묘사하는 것으로 대표되는 남종화는 정적인 미의 세계를 표현하기에는 무엇보다도 적당한 예술형식이었고, 유교의 윤리관과 생활양식에 짖어있었던 한국인에게는 동적이고 강렬한 것보다는 정적이고 고요한 것을 추구하는 경향이 훨씬 지적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한국회화의 정적인 특색은 70년대까지도 자연스럽게 이어져왔으나 80대를 전후한 변화의 양상은 이제 안이한 관념으로서 한국화를 바라보는 것을 더이상 용납하지 않을 차원에까지 이르고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진 특정으로 부각되고 있는 것이 바로 전통적인 양식의 구속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적극적인 실험정신의 표출이다.
여기에서의 실험정신은 단순히 작가마다의 개인적 취향이나 호기심에 의해 분출되어진 것이 아닌 한시대의 미의식을 겸허한 자세로 추구하면서 그것을 객관적인 시각에 의해 반영해내 고 있다는 점에서 더 큰 건강성을 획득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80년대 초반 한국화의 전반적인 변화 속에서 가장 뚜렷히 떠오른 양상은「현대수묵운동」이다. 전통적 관념으로서의 표현력과 소제주의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현실인식에의 철저한 시각이 바탕이 된 「수묵운동」은 고루한 의식과 안이한 방법의 답습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고 오늘에 와선 시대가 가장 절실하게 요구하는 참신한 의식과 다양하고도 폭넓은 조형시도의 형식미를 창출해내는 시도로 이어지고 있다. 한국화가 이철량(37. 전북대교수)은
80년대 초반에 불붙은 수묵운동의 때놓을 수 없는 선두대열의 젊은 작가다. 그의 작품은 거의가 수묵운동의 연상에서 이야기되어야 하고, 또 그 작품들을 통해 수묵운동의 발전과정을 감지할 수 있을 정도로 그는 10년여 동안「수묵」만을 대상으로, 지리하고도 힘겨운 싸움을 해온, 그래서 집념의 작가라고 선뜻 이름 붙일 수 있을만하다. 그럼에도 토요일 오후 인터뷰를 위
해 만난 자리에서 그가 처음 꺼내놓은 말은 「수묵이 지닌 현대적인 조형추구세계의 무한한 가능성에 대한 지속적인 도전의·필요성」 이었다.
한 작가의 예술적 세계가 내용과 형식의 완전한 조화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가 지니고자하는 자기형식의 성취는 끝이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수묵운동이
안고있는 의미와 한계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이철량의 자기세계관을 들으면서 그 동안 그림은 어떻게 그려야하느냐 보다 무엇을 그리는 것이 꼭 우선되어야하고, 그편이 훨씬 건강한 것이라고 인식해왔던 고정된 관념이 작가에 따라 다르게 적용(?)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바뀌게 되었다.“수묵운동은 우리 전통회화 형식의 더 이상 존립과 그 당위성을 묻고 나선 자기의식 변화의 싹틈에서 비롯된 것이었옵니다. 필묵의 무한한 가능성을 시도해보지 못하던 기존화단에서 현대적인 조형추구의 정신을 표출해냈던 것은 확실히 시대가 요청한 과제이기
도 했지요 그러나 수묵운동의 가치를 형식이란 틀 속에서만 찾으려고 한 나머지 무엇을 담아야하느냐는 주제의식 변화에의 현실점검은 미흡했고, 때문에 일정한 한계를 지닐 수 밖에 없었다고 생각합니다.”자기가 줄곧 매달려온 작업의 한계를 이처럼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으면
서도 표현상의 문제만을 대상으로 짧지 않은 시간을 굳이 투자해온 이유가 더욱 궁금해졌다.
“한국화를 보는 투철한 인식은 의식과 방법, 양쪽에서 이루어져야합니다. 나의 경우도 그 중요성은 깊게 인식하면서도 한국화의 뿌리깊은 문제는 형식적인 면에서의 진부함과 안일함에서 훨씬 더 절실하게 느껴졌옵니다. 그렇다 고해서 주제가 항상 고정되어있는 것이 아니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차원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졌는데, 어느 쪽에 더 철저함의 우선을 두느냐가 문제가 되겠지요” 수묵작업의 출발에서부터 소재주의적 관념에서보다 수묵이 이끌어내는 조형의 본질적인 문제에 접근하는 방법을 보여온 그로서는 더 이상 다른 설명을 덧붙일 필요가 없었다. 이철량의 그림에 대한 관심은 고등학교시절부터였다. 순창에서 태어난 그는 중농의 부모들이 외아들에게 으례 걸기 마련인 교육열로 전주 신흥고에 진학했는데 원래가 조용한 성격에 사색하기 좋아했던 그는 캔버스를 마주하는 것으로 도시의 번잡함을 밀쳐두었던 것이다. 당시 미술반 담당교사였던 한국화가 목정방의결의 지도를 받으면서 한국화를 그리기 시작했고 홍익대 미대 동양화과에 들어가 졸업할 때까지 별반 한국화에 대한 철저한 인식 없이, 잘 그려내는 작업에만 몰두해왔다. 그러나 그는 항상「그것이 그것」인 한국화의 전통적 기법에 갈등을 느끼기 시작했고, 한동안 딜레마에 빠지기도 했다. 그러는 동안 자신의 작품세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송수남의 새로운 수묵운동에 매료되면서 작업에 참여하기 시작, 수묵산수 계열의 선두세대로 들어섰다. 수묵운동은 이른바 극복되어야 할「한계」에도 불구하고 우리고유의 관념으로서 초형과 현대라고 하는 시대적 미의식으로서 그것이 어떻게 융화되어 하나의 새로운 가치의식을 창조해내는가 하는, 분명 큰 관심의 가치를 지닌다는 명가를 받는다. 이런 점에서 볼 때 화가 이철량에 대한 평가도 수묵의 속성을 통해 자연을 재해석한 어법 구사 탁월함으로 대신해도 좋을듯하다. 그는 80년 동아미술제에서 「동아미술상」을 수상한 이후 공모전에의 관심을 마무리했다. 정작 자신이 지향하는 작품세계와 공모전의 작품이 지니는 세계의 괴리감이 참으로 컸고 때문에 자신 스스로 이율배반적인 자기모순을
화려한 경력의 성과보다도 훨씬 더 큰 고통으로 안아야한다는 자각이 들어서였다.
그는 81년의 「한국현대수묵전」에 참여를 시작으로, 「일곱작가 수묵전」「墨, 그리고 點과 線展」 「水異의 표정을 찾아서」 「한국화단면전」 「한국화, 오늘과 내일의 전망전」 「한국화, 그 다변성전」 「한국현대미술 어제와 오늘전」 「생각하는 신세대전」을 비롯 70여 회의 그룹전에 참여해오면서 수묵운동의 선두세대로서 꾸준한 창작열정을 보여왔다.
특히 그가 전북화단에 불어넣은 신선한 자극은 보수성 짙은 이 고장 기성한국 화단의 바탕으로 볼 때 충격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는84년부터 전북대 미술교육과에 재직해왔으면서도 2년 여 동안은 줄곧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서울에서 그처럼 활발하게 주도하던 수묵운동의 어느 형태도 꺼내놓지 않았다. 워낙 선배들이 닦아놓는 이 고장 화단의 분위기가 깊게 뿌리 박혀있어서 이기도 했지만 실상은 개인의 의지로서보다는 제자들이 주축이 된 새로운 세대들의 역량이 수묵운동의 보다 참신한 면모를 보여줄 수 있으리란 기대 때문이었다.
86년 수묵에 붓을 같이하는 제자들의 틈에 끼어 「題의 가변전」을 전북예술회관에서 가졌을 때 그것은 확실하게 전북화단의 새로운 흐름을 예고하기에 충분한 자리였다. 그것을 일부에서는 대학을 갓 졸업한 병아리작가들의 의욕으로 굳이 치부하려는 경향도 없지는 않았지만 기존의 그림틀을(액자) 거부하고 배접만으로 전시한 이들의 작품들은 도식적인’전시공간을 새로운 분위기로 변화시키면서 공간이 지니는 미적 의미를 참신하게 보여주는 계기를 마련했다. 그는 이후에도 해마다 한차례씩「한국화의 새로운 흐름 10인 전」을 주도해오면서 전북에도 뒤늦게나마 수묵운동의 싹이 트게 하는 성과를 얻어내고 있다. 그가 지금까지 전념해온 작업이 지나치게 형식적인 면에서의 변화만으로 평가받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 것은 최근의 작품을 보고 난 후부터였다. ! 그는 한동안 山水에 푹 빠져 水墨의 표현적 경향에만 전념했었으나 85년부터는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너무 빠른 폭으로 주제가 변하는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다양한 주제를 화폭에 담아내고 었다.
85년부터 근래까지의 과정만 보더라도 인물에서 도시풍경으로-다시 숲과山水로, 그리고 상징적 의미의로“이제 「무엇을 그려야 하는가」하는 의식이 형식면에서의 실험성보다도 더 강렬하게 부딪쳐와요 최근에 내고 있는 神市는 자연과 인간과의 관계를 상징적 의미로 표출해낸 것인데 우리 현실에 대한 아픔이 내면적 고통으로 투영되어 표현되어지는 것이지요 이즈음엔 내가 체험하고 삶의 현장에서 부딪치는 대상들을 관념적이지 않고 보다 구체적으로 담아 보고자하는 생각이 드는데, 아마 형식만으로 극복되지 않는 한계에 들어선 때문이 아닌가 싶기도 해요”82년의 첫 개인전에서 (서울 그로리치화랑) 「 水墨을 기조로 하는 독특한山水를 시도해오면서 단순한 자연의 존재적 관심을 뛰어넘어 水墨자체가 지니고 있는 표현적 잠재성을 일깨우는데 그의 작업의 독자적인 영역을 대할 수 있다」는 명을 받았었다. 그러나 85년에는 도시풍경과 인간을 주제로 한 작품을 내놓아 「오늘의 상황 속에서 인간들의 회노애락 감정을 정확하게 잡고 그렇게 잡은 인간의 형상을 넓게 문명사적인 배경 속에서 배치함으로써 결국 그 그림들을 보는 사람의 마음에 호소하는 강한 표현을 지니고 있다」는 명가로 진전되었다. 아무튼 그의 작품이 보여주는 변화의 폭은 주제의 변화의 그것 못지 않게 큰 것이어서 10년 여 동안 한국화의 형식적인 틀의 새로운 정립을 위해 투자했던 열정이 결코 형식 변화의 의미로서만 그치는 것이 아닐 것이라는 기대를 안겨준다.
이러한 기대는 그의 겸손한 작가로서의 자세에서도 보여지는 것이지만 이즈음에 그의 정신을 새롭게 일깨우고 있는 주제의식에의 치열한 시각은 어느 평론가의 말처럼「전통적 양식과 관념이 현대에 어떻게 재생될 수 있는가의 방법론을 보여주는」차원에 그치지 않고 이 시대에 절실히 요구되는 우리그림의 주체성 확립의 과제와 맞닿을 수 있을 것이란 확신을 갖게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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