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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7 | 인터뷰 [사람과사람]
시인 정양시인 정양수수깡과 마늘씨의 흉년을 지나
문화저널(2004-01-27 12:02:26)


 정 양 시인을 생각하면 지금도 나는 마늘 씨의 독특한 풍미를 맡는다. 개인적인 기억이지만 내가 한때 시를 공부하겠다고 늦은 밤까지 앉아 있곤 하던 무렵, 선생은 나에게 이런 시로 불쑥 다가왔던 때문이었다. 검불 덮인 마늘밭 언 마늘씨를 까먹으며 아이들은 속이 쓰리다. 싸락눈 몰아오는 흐린 하늘 밑 손바닥으로 혓바닥으로 싸락눈을 받아먹으며 아이들은 다 어디로들 갔는지 어디로들 가서 쓰리고 긴 겨울을 캐고 있는지 흐린 하늘을 휩쓸며 회끗회끗 또 싸락눈이 내린다.
-싸락눈 全文
말할 나위도 없이 나 또한 소작농의 자식이어서 그 먹거리가 없던 날들 언 땅에서 마늘씨를 캐보았던 경험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선생의 시는 그때의 나에게 집 떠난 작은형의 일기장이라도 몰래 홈쳐보는 듯한 감동을 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장남이었으며, 훗날 내가 시로써 등단했을 때 정말이지 형님이라고 부르고 싶었지만 아직껏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정말이지 그렇게 했어야 하는데 잘못했음을 나는 얼마 전에야 알게 되었다. 그 술집에서 만나 이런저런 시인들을 언급하다가 선생께서 들려준 안도현이가 바로 그랬다. 나보다 무려 대여섯살이나 적은 그가 선생에게 그러더라는 것이었다. 형님, 나 술 한잔 사주시오
선생의 얘기를 들으며 우리는 함께 낄낄거렸다. 그러고 나서 선생이 들려준 남은 말씀이 그것이었다. 그런디 말여 어떻게나 가가 이쁘던지 연보에 의하면 정 양 시인은 1942년 김제에서 출생하였다. 워낙 넓은 김제땅이라서, 코딱지만한 곳을 함께 달라 들어 부쳐먹고 살던 내 고향과는 사뭇다르게, 웬만한 전답을 가져도 부자라는 소리는 못 듣는 것이지만 그래도 선생네는 부자라고 했다. 그러던 것이 해방과 6·25를 거치면서 전답은 줄어들고 그후 고향도 떠나게 되었다고 한다. 선생의 시에 숱하게 등장하는 농촌의 형상은 그때의 경험이고 기억인 셈이다. 울타리마다 내버리듯 남은 인정을 널어놓고 떠나던 길묵은 쌀빚 받으러 가는 고향길에 노을이 탄다.
-「저녁놀」중에서
흰 고무신 새로 신고 엊그제 내린 겨울비로 질퍽거리는 전라도 길을 걸었습니다. 흐린 하늘 서쪽으로 시린 바람 일고 토주에 취한 까마귀 떼가 떠 있습니다.
내 아는 세상일 신바닥으로 짓이기면 신등으로 시린 진흙만 묻어 오르고
-「까마귀떼」 중에서
부고 돌리고 돌아오는 해동하는 들판길에는 먼 마을 풍장치는 소리로 먹물 같은 어둠이 술렁이더니 저 건너 또랑물 물길을 따라 일렁이는 별빛처럼 자잘하게 깔리는 불도깨비 중에서
선생의 초기 시집들, 까마귀떼 ·수수깡을 씹으며 ·어느 흉년에, 이 세 권의 시집에서 아무렇게나 뽑아본 시의 구절들은 모두 그렇게 찬란하고 아름답다. 그리고 목차만 훑어봐도 제목들부터 모두 이 모양으로, 부황기와 흉년과 까마귀와 도깨비불의 흉흉함에도 불구하고, 찬란한 이미지여서 나는 일찍부터 주눅이 들기도 했다. 그리고 나는 돼먹지 않은 질투심으로 선생을 따라 그의 유년과 고향을 가보고도 싶었다. 그러나 이제 나는 안다. 사람 살아온 길이야 거기서 거기다, 선생의 고향에 있던 뱀딸기밭이 우리의 고향에 어찌 없었겠으며 선생의 고향집 뒤안에 내리던 싸락눈이 어찌 우리의 고향을 괄세하였으랴.
그래서 나는 그날 선생과의 약속을 다방으로 정했으며 이윽고 답답하다는 핑계로 술집을 찾아 정든 외갓집의 사립문이라도 들어서듯 했던 것이다. 장마가 막 시작되던 날이었다. 이 시대의 당당한 한 시인과 그 후생이 낮술을 마시기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그러면서 나는 스스로의 술맛을 돋굴 속셈으로 끊임없이 선생의 시와 고향과 어린 시절들에 대해 물어보기도 했다.
선생은 매주 일요일이면 고향에 간다고 한다. 그곳에 당신 어머님의 산소가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마을 사람들은 근래에 보기 드문 효자라고 칭송하는데 그는 그게 아니라 그냥 아무 곳도 갈 데가 없고 가기 싫은 때문이라고 했다. 그래서 산소의 잡초도 뽑고 숲 그늘에 몇 시간씩 앉아 있다가 오기도 한다고 했다. 한번은 길가에서 산딸기가 그야말로 수지맞았다싶게 무더기로 열려있는 것을 발견하고 정신없이 따먹고 있는데 아이들이 지나가더라고 했다. 야들아, 여기 산딸기가 가마니로 열렸다. 내가 찾았응게 느덜도 이리 와서 따먹그라.
그런데도 야들은 무슨 원시 채집어로 경제활동이나 하는 사람이라도 보듯 웃어 보일 뿐이었다. 산딸기 아이스크림이나 나오면 사먹을망정 산딸기를 따고 있을 아이들은 아니었다. 그게
요즘의 아이들인 것이다. 만약 그 자리에 내가 있었더라면 싸가지 없는 녀석들이라고 욕해 줬을 터이지만 선생은 웬지 애석하더라고만 했다. 그래서 나는 술을 마시다말고 다시금 상상해보았다. 선생은 혹시 유년의 고향과 현세의 집, 그 사이의 거리를 걸어보고 확언하는 것은 아닐는지…시라는 것은 그것을 쓰는 한 개인에게 있어서는 시공을 뛰어넘는 전지전능의 도구가 된다. 틀림없이 그런 시들을 집에서 읽고 시인은 오랫동안 자기를 사로잡았던 시세계를 다시 가보는 것은 아닐는지---건방진 얘기일는지는 모르나 이제 와서 50이 가까워오는 사람이 좋든 싫든 뿌리 내렸던 그 세계를 버릴 수는 없다. 다만, 변모해가는 것이며 여태까지 가지고 있으면서도 별로 그러지 않았던, 눈을, 뜨는 것이다. 선생은 지금 틀림없이 그러리라는 확신이 자꾸 들었다. 그렇지 않다면 시인이면서 교수인 그가 도대체 무슨 일 때문에 주말마다 고향에 가고, 어머님 산소의 잡초를 뜯고, 산딸기를 따먹고, 도시락도 안 싸가지고 가서 라면이나 막걸리로 한 끼를 때우는가하면, 그러고도 모자라서 삐비 따위나 뽑아 먹겠는지, 나는 죽어도 모른다. 따먹으면 죽는다는 뱀딸기들이 무더기로 열려 따먹고만 싶은 원통한 갈증으로 산그늘이 빨갛게 짖었습니다.
흙뱀들 꽃뱀들 온갖 뱅들이 밤마다 입맞추고 사라진 그늘 불장난하다 잠들어 오줌누던 빛나던 무지개 아래 혼전만전 짓밟으며 따먹다가 자지러지던 뱀물리던 뱀딸기밭 무슨 두려움이 무슨 배고픔이 나를 못살게 굴어 어둡고 어려운 그리움으로 한 세상을 치엉청 감아왔던가.
손가락질여라도 하는 날이면 대번에 생손이 어려 무섭고 원통한 잠자리마다 새빨간 갈증들이 식은 땀처럼 짖어 옵니다.
-「뱀딸기밭」全文
아마도, 틀림없이 정 양시인은 이제 변모하는‘중인갑다. 내가 꼭 10년전 처음 그를 만났을 때와 비교해서 눈꼽만치도 달라진 바 없는 선생의 너그러움이며 웃음, 그 성격은 앞으로도 그저 그럴 것이다. 검은 개꼬리 석삼년을 묻어 두어도 흰 개꼬리는 안 된다고 우리 고향집에 살아 계신 내 어머님이 말씀하신 적이 있다. 내가 이제 술을 그만 마시겠다고 말씀드렸을 때 하신 얘기였다. 선생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나, 선생의 시는 이미 변모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나는 슬그머니 부아가치밀고 질투심이, 무슨 자랑이라도 되듯, 치솟는다.
선생은, 이 병훈 시인과 정렬 시인과 더불어 함께 선보였던 3인 시집, 『어느 흉년에』, 가 1집으로 끝난 사실을 몹시도 애석해 했지만 그것만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나는 하기도 했다. 그 애석함은 그때의 3인 시집을 먼저 선생께서 발기하고 잔일거리도 다 해야 했던 데서 오는 섭섭함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말하자면 선생은 이미 터득하고 있겠는데, 나는 이 비유가 진정으로 오해 없기를 바란다, 산딸기를 아이들에게 권할 게 아니라 그걸로 술이나 빚어두었다가 나이들기를 기다려 한잔씩 권해보자는 것이다. 아니 선생님, 술맛이 기막힌데 이게 무슨 술이죠? …흐흐흐! .
물론, 선생 시의 변모는 초기 시에서부터 이미 그 방향을 예감케 해 준게 사실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왜 해마다 빠져죽는지, 애비없는 애 좀 없으면 좀 어때서, 빈털털이로 고향에 좀 돌아왔으면 어때서, 자기네도 실컷 고기잡고 헤엄 배우며 물때 묻으며 자란 이 자리에 빠져죽어야 옳은것인지, 나중에 무슨 일이 잘 못풀리면 우리들도 여기 와서 빠져죽고 싶을 것인지
-「쏘」중에서
떡 한 조각 주면 안 잡아먹지
떡 한 조각 더 주면 니 안잡아먹지
이 땅의 호랑이들은 처음에는
떡 한 조각만 달라고 하더란다.
「수수깡을 씹으며」중에서
나는 시에 대해서 정말이지 모른다. 그러나 다만 오랫동안 새로운 시집을 보여주지 않는 시인이, 고향을 자주 찾는다는 말을 듣고 짐작할 뿐이다. 그의 고향마을이 사랑하는 시의 텃밭이었다면 이제 그는 좁혀놓은 시공의 힘을 벌어 우리민족과 나라를 그가 사랑하는 시의 텃밭으로 삼으리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미 그 작업은 시작됐다. 곧 새로운 시집이 출간된다고 하는데 선생은 어린 문학도만큼이나 설레는 모양이었다. 그것은 선생 자신의 확신 때문이다. 나는 맹세코 말할 수 있다. 골목의 허름한 대폿집에 앉아 그 자리에서 소주 네병을 비운 선생과 나는 다시 커피숍으로 갔다. 아까의 다방보다는 격을 높인 셈이었다. 그러고도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술집을 찾아갔는데 무슨무슨 까페라는 곳이었다. 생각해보니 그것도 격을 높인 셈이었다. 거기서 내 기억의 필름은 동강나고 말았는데 마지막만큼은 선명하다. 내 옆에 앉은 젊은 여자의 말꼬투리를 시비삼아, 나는, 내가 못 배웠다고 무시하느냐고 우는 시늉을 했던 것이다. 그게 아니라고 몇 번씩 강변하던 여자는 마침내 울기까지 했다. 왜 그런 억지를 부렸는지 아무리 생각해해도 자꾸꾸 산딸기만 머리에 떠오를 뿐이었다. 나는 다시 배우기 위해 아픈 머리를 싸매고 내 고향에 갔으며, 그곳의 여러 모습들을 몇번씩 거듭 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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