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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9 | 인터뷰 [사람과사람]
평범한 소재를 승화시키는 감성의 빛 화가 박남재
김재수(2004-01-27 12:20:01)

〈1〉
70년대 初 어느 날로 기억된다. 덕수궁에 있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國展 西洋畵 展示場의 한 작품 앞에 많은 사람들이 발걸음을 멈추고서 저마다 감동 어린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들이 바라보고 있는 그림은 파격적인 화면구성을 보여주고 있었는데 지평선을 저 아래로 깔고 하늘에 화면 거의 전부를 차지한 가로로 뉘어서 그린 것으로 하늘을 가득히 채운 구홈의 역동적인 움직임과 변화에서 또한 그것을 표현한 힘있는 붓놀림에서 전해지는 작가의 知的 本能的 제작의 첫눈에 감상자의 ·발길을 잡아 묶어 자신도 모르게 걸음은 멈춰지고 탄식과도 같은 감탄을 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나 역시 그 작품 앞에 서서 우선 궁금한 대로 명제표를 읽어 내려갔는데“작품명제 ; 운(쫓), 작가명 ; 朴南在, 출신도명 ; 全北” 이라고 적혀 있음을 보고 내심 가슴 뿌듯한 자긍심 같은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해서 나는 朴南在선생을 그림과 함께 기억하게 되었다. 그후2 ·3년이 지나 나는 全州에 나와 본격적으로 作業에 몰두하면서 선생을 가까이 펼 수 있는 기회가 많아졌고 이런저런 인연들은 선생과 나 사이에 굵은 끈으로 이어져 왔다. 선생을 한번이라도 만나 본 사람이면 누구나가 검은 수염과 모자, 그리고 제자들 주례서는 날만 빼고는 어김없는 작업복차림으로 항상 부족하지 않은 너그러움을 엿보게 하는 안면의 미소를 기억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너그럽고 소탈한 모습과 함께 모자 아래에서 무엇이든 꿰뚫어 볼 듯 빛나는 눈빛이 더 강한 인상을 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인상은 선생의 작품이 우리에게 주는 느낌과 거의 일치하고 있지 않나 생각하는데, 그저 평범하고 남들이 대수롭지 않게 지나치는 그런 소재들을 감성의 빛으로 숭화시켜가는 독특한 담己化 과정을 거침으로써 이미 언급한 “쫓”이 그랬던 것처럼 근자에 完成을 한 “山”이 주는 image 역시 선생의 인간的인 면을 보여 준다고 하겠다. 따라서 여러 작품들은 인생의 편린들이며 인생관이고 회화관이며 또 선생의 기울이는 관심사의 다름아니며, 이러한 것들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편협하지 않은 성격과 옳다고 생각하면 때와 장소를 불문하고 생각한 그대로를 꾸밈없이 내뻗어야만 직성이 풀리는 곧은 성격 바로 그것인 것이다.
〈2〉
선생은 순창에서 태어났다. 순창에서 6년제 중학교에 다닐적에 순발력과 체력 특히 순간적인 상황판단의 정확성을 인정받아 농구선수로 활약했는데 그때 만해도 순창의 농구팀 실력은 대단했었다고 한다. 3학년이 되면서 서울로 올라가 경복중학교와 한성중학에서 농구 선수생활을 계속했고 이때 전국종별 농구 선수권대회 4강 진출의 경력을 갖고 있다. 그때 그 시절을 회상하는 순창의 후배들-당시 억세기로 이름난 순창고을의 어깨들-이 선배朴南在를 말하길 “가히 비호와 같은 몸놀림으로 통쾌하게 득점과 연결 시켰다”고 전한다. 서울에서 지금의 고등학교과정인 중학6년을 마친 선생은 운동선수생활을 청산하고 미술을 하기로 결심하고 졸업과 함께 서울미대에 진학을 했는데 얼마가지 않아 6·25사변으로 인해 학업을 계속할 수가 없었다.
전쟁이 끝나면서 또다시 CAC, 논산훈련소 군산고등학교 등에서 농구선수 생활을 하면서 방황기가 시작되었다. 그러다가 밝히기를 굳이 사양하는 어떤 인연으로 한국인상파미술의 시작이자 마지막 대가라 일컬어지는 之湖화백을 만나면서 다시금 그림에 뜻을 두게 됐다고 한다. 일단 결심을 굳힌 선생은 광주에 내려가 오지호화백이 몸담고 있던 조선대학교에 편입을 했다. 여기에서 志士라 불리는 오지호화 백의 신념에 찬 교육관과 활달한 필치를 접하면서 비로소 선생이 추구해야할 회화세계 즉 회화관이 성립되지 않았나 싶다. 대학시절의 교우관계를 보면 같은 과에 재학하고 있던 오지호화백 장남인 오승우와 조규일, 국용현등과 어울려 정말 열심히 수업을 쌓게 되는데 그 노력의 결실로 후에 그들은 국전 초대작가 미술대학 학장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오승우씨가 회장직을 맡아 이끌고 있는 木友會라는 사실계열 화가그룹을 통해 그 우의를 돈독히하고 있다. 조선대학을 졸업하게된 선생은 “자네는 여기 남아서 나와 함께 후진을 지도하며 함께 지내도록 하세”하며 대학에 머물기를 권하는 오지호화백의 말씀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인 사정으로 전주에 올라오게 된다. 전주에 온 선생은 전주농고와 전주여고에 재직하는 동안 왕성한 작품생활이 계속되었고 국내 유일의 공모전이자 최고 권위의 國展에 출품되여 입상을 거듭했다. 그때만 해도 전라북도에서 국전에 입선하는 사랍수는 거의 한둘에 불과했으니 선생의 능력은 일찍부터 인정받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얼마 후에는 원광대학교 미술과에서 출강을 하게 되었고 나중에는 전임강사로 아예 직장을 옮기면서부터는 공모전 출품을 삼가하게 되었다. 공모전에 출품하지 않는 데 대해 특별한 이유가 잊는지 알 수 없지만 전시장에서 선생의 작품을 대하지 못함은 두세가지 의미로 조금은 서운한 생각이 들었다. 그 이유는 미술계현실이 대변하는 바와 마찬가지로 선생의 지속적인 출품은 개인적인 발전은 물론이고, 한국화와 서예와는 달리 中央화단과의 연결고리가 전무하던 서양화단에서 자신의 역할을 생각하지 못한 것 아닌가 하는 점이며 또 다른 이유는 전시장을 통해서 대작을 여러 화랑들에게 보여주어 감상자에게는 정서함양의 기회가 되고 후학들에게는 시대를 앞서가는 선배의 노작을 볼 수 있도록 함으로써 자신의 화업을 더욱 큰 목소리로 전해야 되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에서 있다. 그러나 이러한 염려는 기우가 되어 버린다. 선생은 대학에 봉직하면서 더욱 줄기찬 작품활동을 해왔고 적절한 시기에 개인전을 통해 여러 사람들이 선생의 작품과 마주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왔다. 또한 학교실기 수업시간에는 학생들과 함께 이첼을 펴 놓고 같이 작업을 하면서 게으른 학생에게는 독설에 가까운 화평으로 심기일전 하도록 채찍을 가해왔다. 이러한 제작에 임하는 자세와 솔직한 評이 서서히 그 성과를 나타내기 시작했는데 언제부터인가 선생에게서 수학한 제자들 대부분이 홀로 서기에 어려움 없이 작가로서 그 입지를 굳히고 있음이 그것이다. 선생은 일부러 힘 자랑 같은 것을 하려들지 않는다. 미술계에 파벌을 조장하여 세를 과시한다거나 하는데는 도통 관심이 없다. 그렇지만 상식선상의 판단으로도 이해가 되지 않는 잘못된 일에는 앞장을 서서 그 해결의 결말을 보고야 마는 성격으로 주위에 수많은 제자와 후진들이 있게 하는 또 하나의 매력이 아닌가 한다.
〈3〉
선생이 작업하는 모습을 지켜 보노라면 화가란 교육이나 숙련만으로는 어느 수준 이상을 성취할 수가 없지 않나하는, 다시 말해서 선천적 소질을 타고나지 않으면 훌륭한 작품을 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데 그 점을 대변이라도 하듯 한터치 한터치가 예리한 관찰력과 탁월한 색채 감각으로 이어져 간다. 선생은 우리모두가 흔하게 볼 수 있고 쉽게 지나쳐 버릴 수 있는 주변의 풍경과 사물들에서 그억 날카로운 감생이 빛을 발한다.
선생이 어렸을 적에 순창에서 체험했고 또 순창을 떠난 도시 생활동에도 늘산수를 찾았으며 전주에 살기 시작하면서 자연과 벗하고 자연과 함께 숨쉬며 자연에 푹 잠겨 살아왔다 할 선생의 체질적 흔적들은 아주 사실적이지 않고 그렇다고 지나치게 단순화되지도 않은 표현으로 가시화되는데, 인간 본성의 바탕에 뿌리를 두고 정신세계에 맥이 닿은 정감넘치는 회화세계 즉, 박남재회화를 이룩하려는 일념으로 초지일관해온 선생의 발자취는, 경제적으로 혹은 사회적으로 안정된 직장에 안주하며 남 보기에 좋을 만큼 멋을 부리며 적당히 그림을 그리는 사람과는 달리 몸째로 부딪혀 일궈내는 투철한 작가정신으로 점철되었음이 우리에게 늘 교훈이 된다. 끝으로 선생의 일기 중 몇토막을 소개할까 하는데 화가 朴南在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89. 2. 1. (水) 맑음 아침 5시 30분에 자리에서 일어나 화실에 을라 갔으나 마음이 무겁고‘슬픔에 잠긴다. 웬지 외로워지고 세상과 영영 멀리하고 혼자만 살고 싶은 생각이 가득하다. 모든 것을 떨치고 순수하고 성실한 생활만이 가득한 곳에서….
오늘은 작품에 손도 대지 못하고 끝도 없는 생각에 젖었다. 그림 그리기가 무섭고 차라리 옛날이 그립다. 그때도 어떻게 그렸던가? 하고 생각해 본다. 미쳐버리고 싶다. 왜 안보이나? 왜 안되는 건가? 벽을 향해 몸부림치는 나의 가련한 오늘의 心情….
89. 6. 27. (火) 흐렸다 맑음 오후 내내 집에서 작업을 했으나 진전은 없다. 수업시간이 촉박하여 아쉽지만 점심식사 후 학교에 갔다. 오늘도 학생들과 함께 누드를 했는데 집에서와는 달리 흥미가 있었고 작품도 새로운 발전이 있었다. 미술과 교수들과 이리에서 저녁식사를 하고 집에 돌아와서는 TV를 보다 잡이 들었다. 눈을 뜨니 2A1 30분, 효}실에 올라가 빠렛트를 청소하고 붓을 들기 시작하여 결국 7시까지 그림을 그렸다.
89. 7. 14. (金) 흐림 오늘도 화실에 쳐박혀 작업에 열중했다. 허나 감각이 죽었나? 도저히 분간 할 수 없는 막막한 심정에 아무런 의욕이 發動되지 않는다. 오후엔 낮잠을 한숨 자고 그래도 또 붓을 들었으나 왜 이렇게 형편없이 자신감 마저 잃고 마는 心情. 어디 밖으로라도 뛰쳐나가고 싶기만 하다. 허나 마땅히 갈곳도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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