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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1 | 인터뷰 [문화와사람]
'유기농적인 삶', 생명이 신념이다
부안 한울공동체 사람들
김회경 기자(2003-07-03 10:58:06)

겨울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아침, 일찌감치 일터로 나선 정세철·김영자씨 부부는 비닐하우스 안에서 상추며 고추를 수확하느라 손놀림이 바쁘다. 비가 온 탓인지, 비닐하우스 안은 뿌연 습기가 차분히 내려앉아 푸른 채소들이 유난히 싱그럽다. 하우스 안을 가득히 채우고 있는 경쾌한 팝 음악도 더없이 생동감 있게 들린다.

이제 막 30대에 접어든 신세대 부부의 작업실은 바로 이곳, 비닐하우스다. 겨울 농사로 한참 분주한 이곳에서, 상추, 치커리, 고추, 양배추, 양파, 허브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작목들이 앞다투어 길러진다. 한가지 인상적인 것은 수십여종의 채소들이 길게 줄을 늘어뜨리며 하우스 안을 빼곡히 채우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이 바로 이들이 추구하는 '다품종 소량생산'이라는 농법의 한 형태이며, 깊게는 삶의 철학이기도 하다.

부안 한울공동체(대표 정경식) 사람들. 표면적으로는 유기농업자들이지만, 넓은 의미에서는 그들의 말대로 '유기농적인 삶'을 표방하는 사람들이다. 한울공동체는 30대 중반에서 40대 중반의 젊은 농군들이 '유기농'이라는 한 가지 뜻으로 모여들어 많게는 18년, 적게는 15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유기농적인 삶'을 일궈왔던 공동의 삶터다.

지금이야 유기농산물을 생산·소비하는 사람들이 차츰 저변을 확대하고 있지만, 십수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다보면 척박하고 고되기만한 기억 앞에서 풀썩 무릎이 꺾여지는 때도 있다. 부안 유기농업의 한 가운데에 바로 한울공동체 대표인 정경식씨가 서 있다.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농민운동가였던 오건씨의 소개로 이곳에서 유기농을 처음 시작했습니다. 18년전에 혼자서 유기농을 한다고 나섰으니, '간첩'으로 몰리거나 사상이 불온한 사람이라는 오해도 많이 받았죠. 당시는 정부에서 '다수확 정책'을 권장했었는데, 유기농은 이와는 완전 대치되는 농법 아닙니까? 지서에서 사람들이 나와 훼방도 많이 놓았어요. 하지만 이런 외적인 상황보다 내면적 갈등 때문에 훨씬 더 힘들었습니다. 승산없는 일을 혼자서 하고 있다는 외로움도 그렇고, 사실 병해충이 우글거릴때는 농약을 쳐야하나 말아야 하나 심적 갈등도 숱하게 겪었죠."

그렇게 어렵게 시작한 일이었지만, 지금은 한울공동체라는 울타리 안에 여덟가구가 모여들었다. 유기농을 시작한 사연이야 집집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그 속에 깃든 삶의 지향점은 모두가 한결같다. 그리고 그들은 유기농이 단순히 농약이나 비료 등 화학재료를 거부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는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유기농을 하는 사람들은 단순히 화학재료만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동·식물 우리 주위에 있는 환경이 공생할 수 있고, 환경을 구성하는 이런 요소들이 유기적으로 엮어질 수 있는 삶의 방법적 측면을 고민하는 사람들입니다. 지속가능한 문화·생활적 측면의 질서를 추구하는 것이죠. 그 방법적인 측면이 바로 유기농으로 귀결된 것이구요."

한울공동체 회원인 김수원 씨의 이야기다. 그는 유기농이 일시적인 '운동'이 아니라, 24시간 하루하루를 몸으로 부딪쳐 실천하는 '생활운동'이라고 덧붙인다.

"흙 자체를 무기체가 아닌 하나의 생명으로 보는 겁니다. 흙을 생명으로 여기는데 어떻게 농약이나 비료같은 독을 뿌릴 수가 있겠습니까? 화학재료를 쓰는건 결국 기술지향주의 농법인데 이는 경제적 관점으로밖에 비쳐질 수 없다는 겁니다. 우리가 다품종 소량생산을 하는 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하나는 여러 가지 작목을 섞어심으면 지력이 개선된다는 점이고, 또 하나는 소비자들의 식탁을 책임져 준다는 점이죠. 물론 경제적으로나 현실적으로는 어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이상주의자들로 비쳐질 수도 있지만, 어차피 유기농은 '이상' 없이는 버틸 수 없는 일이거든요."

정경식씨는 유기농적인 삶의 가치는 세상을 구성하는 모든 인자들이 따로이지 않은, 하나의 '세계관'으로 엮어지는데 있다고 설명한다.

"농사짓는게 좋으니까요. 유기농은 특히 생명과 연관된 일이기 때문에 저한테 맞는 일인 것 같아요. 너무 당연한 일이죠. 막연하지만 끌리는게 있어서... 자연과 함께하고 싶은 이끌림이 우선이고, 자연이나 환경사랑은 유기농을 접하면서 자연스레 생겨난 개념이라고 생각해요."

한울공동체 김효중씨와 정세철 씨는 '이끌림'이 없었다면, 감히 이 일에 뛰어들지 못했을 것이라고 장담한다. 그리고 유기농을 하면서 얻게된 내면의 변화를 사회안에서 녹아내리고 싶다는 바람도 이들의 한결같은 마음이다.

"유기농은 본래의 자연이 갖는 생명력을 조작하지 않고, 그대로 보존해내는 역할을 맡고 있어 생태순환적농업 혹은 생명농업이라고도 합니다. 어렵고 더디지만 이런 것들이 결국엔 최종적으로 생명력있게 남게 되지 않을까요?" 정세철씨는 자연에서 상호 보살핌의 관계, 서로를 배려하는 '관계성'을 잃어버리게 되는 현실이 안타깝다고 말한다. 일에 대한 이들의 자부심은 유기농이 바로 '관계성'을 회복할 수 있는 대안이 된다는 점에 있지 않을까.

월례회의차 모여든 11명의 회원들이 제각기 유기농에 대한 각자의 생각들을 쏟아내자, 정경식씨가 조심스레 제동을 건다. 이상에 대한 이야기만 하지 말고 어려움도 솔직히 털어놓자고.

이들의 가장 큰 고민거리는 아이들 교육과 주위의 시선, 경제적인 문제 등으로 압축된다. 한울공동체 생산자들 가운데에는 제도권 교육을 거부하고 대안학교를 선택한 이들이 적지 않다. 이들의 교육관과 제도권 교육 사이에는 엄연한 괴리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안학교가 과연 그들이 생각하는 '대안'교육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라고 입을 모은다.

"아이들이 커왔던 집안 환경과 외부의 현실은 완전히 다르고, 이 아이들이 커서는 그런 환경속에 섞이게 될텐데, 거기에서 오는 이질감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지 벌써부터 걱정입니다. 생각하면 막막하기만 해요."

갓난아기를 둔 송광섭씨는 아이들 교육이 벌써부터 걱정이라며 긴 한숨을 뱉어낸다. 이런저런 걱정거리가 떠나지 않지만, 그렇게 해서 십수년을 버텨온 그들이었다. 그것은 그들 스스로에게 젖어든 생명에 대한 신념, 흙에 대한 신념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 아니었을까. '경제적으로는 벼랑끝에선 사람들'이라고 일갈하던 김수원씨가 "삶을 고민하며 살 수 있다는 것도 얼마나 큰 행복이냐"며 오히려 밝은 웃음을 웃어 보인다.

유기농에 대한 생산자들의 의식과 삶의 방식이 소비자들에게 온전히 전해지길 바라는 것도 이들에게는 놓칠 수 없는 희망이다. 생명농업학교를 개최하고 소비자 가족을 그들의 삶터에 초대해 체험학습을 돕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단순히 유기농산물을 생산하고 소비하는 관계가 니라, 함께 유기농적인 삶을 나누는 공동체로의 의식이 이들에게는 더욱더 중요한 '운동'인 셈이다.

유기농을 왜 하는지, 그 의미는 어디서 찾아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지, 한울공동체 회원들은 깊어가는 겨울밤을 뒤로한 채 서리서리 긴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하지만 내일이 밝으면 또 그렇게 '현실과 이상'이라는 마음속 깊은 얘기들을 접어둔채, 훌훌 바짓자락을 털어내며 일터로 향할 그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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