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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9 | 인터뷰 [문화와사람]
전주객사에 가면 그들이 있다
거리 공연 문화를 만들어가는 락그룹 소나무
장세길 문화저널 기자(2003-07-03 15:49:09)

‘강아지도 제집 앞에선 반은 먹고 들어간다’더니 전주객사 앞에 선 이들이 영락없이 그짝이다. 하긴 2년 넘게 일요일만 되면 어김없이 기타들고 찾아왔던 곳이니 당연할 수밖에. 그렇다고 ‘버르장머리’ 없는 경박함은 아니다. 관객을 만난다는 설레임과 그들 앞에서만 서면 끓어 오르는 ‘끼’를 억제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이 맞는 말이다. 
‘소나무’. 사실 흔히 들어온 락그룹 이름하고는 어울리지 않는다. 노랗고, 빨간 머리, 찢어진 청바지, 현란한 색깔의 티셔츠. 언제 어디서든 거리낌 없이 박장대소하는 그들의 자유분방함과는 어째 어울리지 않는 이름이다. 아니 촌스럽다. 그러나 이들은 ‘소나무’라는 이름을 좋아한다.
“우리가 추구하는 노래와 어울리기 때문이죠. ‘신토불이’라고 할까요. 오랜 역경을 이겨낸 민족의 나무인 소나무처럼 그룹 ‘소나무’도 신토불이 노래를 통해 열악한 노래문화를 이겨내려고 합니다.”

김대완(대표), 이동현(기타), 조진구(베이스), 홍에스더(건반), 김홍기(드럼), 김명진(보컬). 이들이 부르는 노래는 락이다. 펑크, 메탈 등 다양하지만 굳이 구분하지는 않는다. 단지 그 노래가 한국인의 정서와 어떻게 연결되느냐가 중요하다. 일명 ‘한국락’. 그들이 부르는 노래, 부르려고 하는 노래가 이것이다. 
신중현, 산울림, 안치환, 윤도현 등이 불렀던 노래. 우리 정서에 딱 맞는 노랫말과 멜로디가 있는 노래. 강렬한 비트가 물 건너 이땅에 오면서 ‘탱자에서 귤’이 된 노래. 그들은 그런 노래를 부른다. 
왜? 
“가수만 신나면 어디 그게 노랜가요? 미치려면 같이 미쳐야죠.” 
락은 젊은이들의 음악이다. 펄쩍펄쩍 뛰며 연신 고개를 가로젖는 헤드뱅잉이 나이드신 분들에겐 ‘푸닥거리’로 보일지 모르지만 젊은이들은 그 순간 열정을 내 뿜는다. 강한 비트에 휩싸여 잠시잠깐 자신을 잊는 것. 그러나 대부분의 락 공연에선 뜻과 가사도 모른 채 강한 비트에만 취하게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결국 중요한 것은 가수의 노래가 아니라 연주인 셈. 
그룹 소나무의 생각은 다르다. 연신 헤드뱅잉을 하면서도 함께 따라부를 수 있는 노래, 헤드뱅잉은 못하지만 박수치면서 함께 할 수 있는 무대. 그들이 추구하는 한국락의 모습이고, 그들이 꿈꾸는 거리공연의 풍경이다.

지금이야 고정팬도 생겨 공연하는 맛이 나지만 처음 결성할 당시의 기억은 생각조차 싫단다. 노랑머리에 무대를 뛰어 다니는 것이 지금은 ‘화려한 무대매너’지만, 처음 거리로 나왔을 때는 ‘이상한 애들의 오버(over)’로만 비쳐졌기 때문이다. 그때가 1999년 4월.
뜬금없는 공연에 약장사 보듯 시민들의 힐끔거리는 눈초리와 자동차의 경적소리에 묻혀 그들의 음악은 ‘소음’에 불과했다. 차없는 거리라더니 차들은 쌩쌩 지나가고, 전기선을 연결하기 위해 하루에 만원씩 지불해야 하는 악조건에 인근 가게 주인들은 ‘시끄럽다’고 불만을 터뜨렸다. 
그런데 오기때문이었을까. 아님 비온뒤에 땅이 더욱 굳어지는 믿음때문일까. 아무튼 이들은 그들만의 ‘오버’를 계속하더니 어느새 쉰번이 넘는 거리공연을 벌여왔다. 비오거나 눈보라가 쌩쌩 내리치는 날을 빼고는 매주 전주 객사를 찾은 것이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이들의 끈기와 노력은 관객들의 박수소리가 많아지더니 올해는 전주시가 객사를 개방해줬고, 여기에 공연지원금까지 덤으로 얹어줬다. 고정팬이 생긴 것은 물론이고 이들의 음악은 더 이상 ‘소음’이 아니었다. 
어떻게 보면 2년도 안된 짧은 기간에 얻은 결실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사실 이들의 시작은 대학시절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민중노래패 출신인 이들은 대학시절 모두를 ‘민중노래’에 쏟아부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저항’이라는 단어가 아직까지 유효하던 1990년대 초. 그러나 민중노래의 매력에 빠진 것도 잠시 대학문화의 벽이 허물어지는 변화의 물결을 이들은 맛보아야 했다. 1,2학년 시절에 목놓아 불렀던 ‘투쟁가’가 더 이상 불려지지 않았다. 대학은 상업문화의 직수입처가 되고 대학이라는 울타리조차 사라져 갔다. 민중노래, 저항노래는 주류사회의 색다른 상품으로 포장돼 대중매체를 타고 흘렀고, 반체제 불법음악들을 몰래 부르던 ‘긴장’도 사라지게 됐다. 
이들의 혼란은 여기서 시작됐다. 투쟁가를 부르지 못한다면 무슨 노래를 어떻게 부를 것인가. 포크 일색이던 대학노래패들은 서울을 중심으로 락을 도입하고, 국악을 접목하는 등 나름의 길을 찾아갔지만 이도 특별한 대안은 아닌 듯 했다. 선배들로 구성됐던 지역노래패 ‘소리꽃’의 활동이 잠시잠깐 ‘반짝’이다 뜸해진 것도 이때였다. 
“사회 나가서도 노래운동을 계속하고 싶었죠. 그렇지만 외형만 바꾼다는 것은 오래 못간다고 생각했어요. 결국 사람들 곁으로 가야한다고 생각했죠. 그리고 노래운동이 가지는 의미도 다르게 생각하게 됐다고나 할까요.”
고민 끝에 내놓은 수는 락을 통한 거리공연. 여기에 운동권의 병폐를 버리자고 뜻을 모았다. 
흔히 운동권 출신들은 대개가 ‘계몽적’이다. 노랫말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해 자신도 모르게 대중을 하나의 대상으로 세우는 경우가 많다. 과거 독재정권이 판치던 시기는 그랬다 치더라도 지금이 어떤 시대인가. 그러다보니 노래는 하나의 도구로 전락되고, 관객들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 버렸다. 
하지만 그룹 소나무는 ‘노래’를 ‘노래’로 가만뒀다. 함께 즐기고 어우러지는 놀이로서의 노래만을 생각했다. ‘계몽적’이지 않다고 욕할 수도 있지만 오히려 떠났던 관객들은 다시 이들 곁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함께 ‘놀았다’. 

누군들 ‘뜨는 꿈’이 없을까. 이점에선 이들도 다르지 않다. 어쩌면 지금 한창 작업하고 있는 첫 번째 앨범이 서울입성을 위한 ‘뜨기 위한’ 과정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만일 이들이 뜬다면 그것은 주류 노래문화와는 전혀 다른 방식일게다. 눈에 번쩍 뜨이는 스카웃을 통해 치장되고 꾸며지는 상품으로서 대중매체에 비쳐지는 것이 아니라 지역대중의 사랑을 받고 ‘뜨는’ 것이기에 그것은 분명 다르다. 
그리고 아직까진 ‘뜬다’는 생각을 갖고 있지 않단다. 대학시절부터 가졌던 노래운동의 소중함도 있거니와 즐거워하는 관객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은 무엇보다 “전주엔 그룹 소나무가 있다”는 말을 들을 수 있을 때, 그때를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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