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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2 | 인터뷰 [아름다운 당신]
누구도 하지 않는 일이라서, 그 일을 하고 싶다
아트스페이스 레드제플린 정상현 대표
황재근 기자(2012-02-06 14:00:27)

지난해 7 23, 한국소리문화의전당 연지홀에서는 특별한 공연이 열렸다. 5 도시 투어공연을 마친 전주의 인디밴드 6팀이 <메이드 전주 : THE BAND>라는 타이틀로 무대에 오른 것이다. 연지홀 최초의 공연, 그리고 전주 인디밴드들이 한국소리문화의전당 무대에 번째 공연이었다. “1주일 전부터 마음이 벅찼다 멤버가 있을 정도로 작지 않은 의미를 가진 무대였다. 무대와 객석 모두가 함께 신나게 뛰어논 3시간의 공연이 마무리되고, 객석의 관객들에게 인사를 하는 시간. 정장을 갖춰 입고 단정하게 머리를 깎은 사내가 마이크를 잡았다. 감사의 인사를 하던 그는 이내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했다. 공연의 기획자, 전주 인디씬의 대부로 불리는아트스페이스 레드 제플린 정상현 대표. 감격에 겨운 그를 향해 무대에서도 객석에서도 박수와 환호가 쏟아졌다.“아마 앞으로 다시 그런 감동을 받기는 어려울 같아요. 10~20년을 같이 해온 사람들과 그런 의미 있는 자리에 선다는 . 비슷한 공연이 있더라도 처음만한 감동을 받을 수는 없을 겁니다.” <메이드 전주>공연으로 전주 인디씬은 재조명을 받았다. 그리고 대표도 그날 이후 눈코 없이 바빠졌다.



락키드, 카페를 열다


그가 전주 인디음악계를 대표하는 역할을 맡게 것은 본인의 뜻과는 거리가 멀다. 다만 누구도 하지 않은 일을, 누구보다 오래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에게 돌아온 책임이다. 역시 처음에는 업계 종사자의 대부분이 그렇듯 평범한(?) 락키드였을 뿐이다. 그가 처음 음악을 접한 것은 중학교 시절. 시나위와 부활, 백두산이 한국락의 부흥기를 이끌던 때였다. 고입 연합고사가 끝나고 함께 어울리던 친구들과 함께 학원을 다니며 악기를 배우고 밴드를 결성했다.“ 지금은 만든 밴드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다 시기, 질풍노도의 고등학교 시절을 메탈리카, 레드 제플린, 오지 오스본과 같은 락의 거성들과 함께 보냈다. 그리고 진지하게 음악과 자신의 진로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졸업 그는 단짝 친구들과 함께크리에이트라는 밴드에서 베이스를 맡으며 본격적인 밴드활동에 뛰어들었다. 사이 군대도 다녀오고, 생계를 위해 직장생활도 했지만 항상 그의 중심에는 음악이 있었다.“ 때는 전업으로 음악을 생각이었어요. 완전히 미쳐있었죠. 벌어서 악기사고 공연하고. 결국 그때 친구들도 거의 음악관련 일을 하고 있어요.저도 그렇구요. 전업 밴드는 못됐지만, 제가 하고 있는 역할이 있으니까요.”그가 밴드가 아닌 다른 역할, 전주 인디씬의 기획자이자 후원자를 맡게 것은 2002년부터였다. 평소 밴드활동을 하며 자유롭고 편안하게 공연을 할공간에 갈증을 느꼈던 그는 직접 공간을 만들기로 마음먹었다. 전주 기린로에 문을 레드 제플린 금세 만한 사람들은 아는 전주 인디밴드들의 아지트로 자리 잡았다. 평소 호프집으로 운영하다 주말이면 공연장으로 변하는레드 제플린에서 지역의 전업 밴드들 아니라, 학생, 직장인 밴드등 무대에 목말랐던 이들이 공연을 펼쳤다. 라이브로 음악을 즐길 곳이 없었던 마니아들도 즐겨 찾으면서 지역의 작은 명소로 자리 잡았다.그러나 좋은 뜻으로만 사업을 없었다. 공연이 없는 평일에는 손님이 들지 않는 입지였고, 경영상의 적자는 개선되지 않았다. 그는레드 제플린이전부터 해왔던 채소 배달일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새벽 4시에 도매시장에 나가 7시까지 채소를 배달하고 가게로 돌아오는 강행군이 계속됐다.많이 자면 2~3시간 자는 생활이었다. 그렇게 돈은 고스란히 <레드 제플린> 운영에 들어갔다. 오직이게 필요한 곳이구나, 없으면 되겠구나라는 생각으로 힘겨운 생활을 이어갔다. 오래갈 없는 악순환이었다. 결국 2006, 번째 <레드 제플린> 문을 닫았다. 대표는 당시잠시 쉬어간다 생각했다. 질려서 벗어나려 하기는커녕, 준비해서 다시 도전하리라 다짐했다. “제가 때는 이런 문화적인 컨텐츠들의 가치가 굉장히 높거든요. 조금만 노력하면 저변이 갖춰질 있으리라 생각했어요. 그러려면 누군가 준비를 해야 하잖아요. 그래서 경험을 쌓고 돌아오겠다고 마음먹었어요.” 이후 그는 다른 일을 모두 접고 음악관련 일에 매달렸다. 악기 대여점기타 플랜트 밴드 연습실아이 러브 락앤롤 운영했고 서울과 지방을 오가며 공연기획의 노하우를 배웠다. 결국 그는 스스로 다짐한 것처럼 2010 프리머스 극장 3층에아트 스페이스 레드 제플린 다시 열었다. 같은 이름으로 레이블도 만들었다.



전주 인디밴드를 선보이다


2011 한번의 전환점이 찾아왔다. 전주에서 활동하고 있는 밴드들은 학생, 직장인 밴드를 모두 합쳐 200여팀. 앨범을 내고 전업 밴드활동을 하고 있는 팀은 6 정도다. 이들을 모아 전국 순회공연을 펼쳐보자는 것이 정대표의 생각이었다. 다른 지역에서 에너지도 느끼고 밴드끼리 교류도 해보자는 취지였다.“2003년에도 당시 활동하던 전주 인디밴드들이 서울 클럽들에서 순회공연을 적이 있었거든요. 생각하면서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불태워보자는 뜻이었죠.”공연 이름은 <메이드 전주> 정했다. 전주를 대표한다는 거창한 뜻은 아니었다. 오히려 비빔밥, 국악, 한옥 메이드 전주들처럼특산품 아니지만 전주가 낳은 이런 음악도 있다는 알려보고 싶은 마음이었다고. 투어 포스터의 가안이 나오던 , 마침 한국소리문화전당에서 문의가 들어왔다. 개관 10주년을 맞아 전주 인디밴드들의 공연을 기획해보자는 제안. 대표는 5 도시 투어의 피날레를 소리문화의전당에서 하기로 결정했다. 오랫동안 갈고 닦았던 전주 인디씬의 저력을 보여줄 기회였다. 공연을 앞두고 그는 길게 길렀던 머리를 자르고, 정장을 갖춰 입었다. 평소 그를 알던 이라면 깜짝 놀랄 모습이었다. “ 나름대로 각오를 다진다는 의미였죠.”그는 쑥스럽게 당시를 회상한다. 그리고 각오만큼이나 공연은 작지 않은 파장을 가져왔다.“그런 무대에 선다는 자체가 밴드들에게는 좋은 자극이 되죠. 지켜보는 다른 밴드들에게 롤모델도 되고요. 하지만 그렇다고 근본적인 변화가 생긴 아니에요. 달라진 건외부에서 저희를 보는 시선이죠.” 이후 그는 눈코 없이 바쁘다. 공연문의도 늘었고, 이런저런 기획에 참여를 제안하는 이들도 많아졌다. 최근에는 프로축구 전북현대FC 응원가 제작을 지역밴드들과 함께 맡아하고 있다. 지역 밴드들이 직접 작사?작곡하고 서포터들도 참여한 음반이 올해 개막전 이전에 발매될 예정이다. 개막전에는 경기장에서 직접 공연도 펼칠 계획이라고.하지만 대표는 갑자기 늘어난 관심들을 마냥 낙관적으로만 보지는 않는다. “이건 어찌 보면 잠깐의 바람이죠. 10~20 계속 가는 아니잖아요. 저희가 잘하지 않으면 반짝하는 관심으로 끝날 겁니다. 장단점이 있지만 때로는 너무 바빠져서 정작 해야 일을 못하고 있는 아닌지 걱정도 됩니다.”몰려드는 공연문의도 가능하면 우선순위를 정해 선별하고 있다고. 기준은 오랫동안 뜻을 함께 있는지 여부다.“ 물론 공연비를 많이 주는 곳은 마다하지 않구요.”웃으며 덧붙이는 말이다.



아무도 하지 않는, 아무나 없는


하나 <메이드 전주> 이후 가장 변화는 정상현이라는 사람에게 쏟아지는 관심이다. 그는 자신이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것도 달갑지 않다. “공연이 끝나고 정상현만 유명해졌어요. 물론 개인이 아니라 저희가 갖고 있는 컨텐츠에 대한 관심이죠. 하지만 저는 밴드들이 보다 부각되길 바랐는데, 제가 원했던 결과는 아니에요. 물론 팀들에게 연락하고, 기획을 논의할 창구도 필요하지만 저는 이런 역할 별로 좋아하지 않거든요. 누군가 대신할 사람이 있으면 넘겨주고 싶어요.” 그는 항상 이런 식이다. 2002레드 제플린 처음 만들었던 때를 얘기할 때도, 2010아트스페이스 레드 제플린 다시 열었을 때의 얘기를 때도 스스로를 드러내는 일이 없다. 아무나 없는 일을 해놓고도, 아무도 하지 않아서 했을 뿐이라 말한다. 그리고 또다시 아무도 하지않을 일을 구상하며 행복한 상상을 펼치고 있다.“‘해피뮤직이라는 사단법인을 만들고 있어요. 아마도 아주 오래 걸일 일이지만 청소년수련원 같은 고민하고 있습니다. 어떤 장르의 음악이든 음악을 주제로 해서, 청소년들이나 가족단위로 찾아올 있는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겁니다. 지금하고 있는 일은 천천히 다른 분들에게 넘겨주려고요. 아무도 안하는 일이니까 제가 한번 해보고 싶어요.”단기적으로는 하나의 대형 프로젝트가 진행 중이다. 바로 <메이드 전주> 해외투어다. 올해 일본과 중국 상해의 클럽 투어공연을 목표로 추진 중이라고.목마른 자가 우물을 판다고 했다. 그는 목이 말랐고 스스로우물을 팠다. 이제 달콤한 샘물로 목을 축이려 그는 또다시 다른 우물을 파러 떠날 채비를 한다. 참으로 고생을 사서하는 성미다. 그래도 말릴 일은 아니다. 그가 미련하다싶게 우물을 파서 거둔 성과를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도전이 기대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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