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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2 | 인터뷰 [아름다운 당신]
“삶의 고민이 없어지는 날 비로소 연극은 완성되겠죠”
‘염쟁이 유씨’의 배우 고조영
이세영 편집팀장(2013-02-05 10:35:07)

80년대 전북 연극의 부흥을 주도했던 이들의 아랫세대이자 전북연극의 전성기를 이어온 막내 세대들은 이제 전북연극을 이끄는 핵심 멤버들이 됐다. 연극인생 25년을 맞은 전주시립극단 고조영씨도 그중 한 사람이다. 지난해 그는 문화영토 판의 ‘염쟁이 유씨’를 통해 전북연극이 살아 있음을 보여줬다. 연기인생의 전환점을 지나 새로운 연기를 고민하는 그를 만난 그날, 저승길 떠나는 후배를 기리며 술상을 앞에 두고 이야기를 나눴다.

그가 연극을 시작한 것은 고등학교를 갓 졸업하고부터다. 연극의 연자도 모르면서 가슴속에서 꿈틀대는 막연한 호기심에 극단을 찾아갔다. 막무가내로 찾아간 극단 토지에서 10개월만에 무대에 섰다. 처음 서는 무대에서 주인공을 했지만 지금은 기억조차 가물가물하다고 했다. 연극에 맛들일 무렵 군대를 가야했다. 제대 후 본격적으로 연극에 뛰어들었다. 5년의 극단생활, 그리고 전주시립극단에 입단했지만 연극을 잘하는 것 같지 않았다.

같이 연극하던 또래들과 종합경기장 등나무에서 숱하게 깡소주를 마셨다. 앞으로 어떻게 연극을 해야 할지, 우리는 어떤 모습이어야 할지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확실한 답은 얻을 수 없었지만 그래도 “끊임없이 해보자”는 데는 모두 동의했다.

연극을 하면 할수록 무언가 부족하다는 생각을 했다. 공부가 필요하구나, 생각했다. “연기를 잘하고 싶었어요. 표현하고 싶은 것이 있는데 표현이 잘 안되는 불일치랄까, 연극에 대한 갈증이 끊임없이 생기더라고요. 느끼지 못하는 연기를 억지로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떠나질 않았어요.” 아홉수를 톡톡히 치른 스물아홉의 끝자락에 그렇게 모스크바행 비행기에 올랐다. 6개월의 오디션 준비기간을 거쳐 박탄코프극장 산하의 쉬킨연극대학에 입학했다. 러시아에서 처음으로 교육다운 교육을 받았다. 하루 2~3시간을 잠을 자면서도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말도 통하지 않는 동토의 땅에서 색다른 경험, 잊을 수 없는 추억을 쌓을 수 있었다. “미처 깨닫지 못한 것들을 교육을 통해 채워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연기 시험을 보는 날이었어요. 담당교수가 왜 거짓말로 연기를 하느냐며, 가슴을 탕탕탕 세 번 때리더라고요. 그러면서 ‘느껴라’고 말을 하는데 아직도 그 때를 잊을 수 없어요. 아, 왜 이런 단순한 진리를 몰랐을까. 정말 진실하게 자연스럽게 하는 것이 연기라는 것을 깨달았죠.”

하지만 2년 반의 러시아 생활에서 돌아온 그는 막상 연기를 할 수 없었다. 매일, 연극을 그만두려고 했다. 남들과의 비교, 그리고 자격지심에 서울에서의 생활을 접고 고향으로 내려왔다. 그런데도 연극이 놔지지 않았다. 가느다란 실에 메인 듯, 신 내림받은 무당처럼, 자꾸 연극이 그를 끌어당겼다. “보이지 않는 희망, 모두가 행복한 희망 때문에 연극을 놓을 수 없었던 것 같아요. 연기를 하면서 살아 있음을 느끼고 희열을 느끼는 거죠.” 결혼을 하고 건사해야 할 식구가 생기면서 고민이 다시 늘었다. “할 줄 아는 게 연극밖에 없다”고 말하고 결혼을 했지만 돈을 벌어야 한다는 압박감은 줄지 않았다. 이번에는 아내가 잡아줬다. “연극, 연기만 해라, 거기서 승부를 봤으면 좋겠다.” 아내의 한마디에 작품을 계속할 힘을 얻었다. 그렇게 누구 빚보증 서줄 자격도 안 되는 돈을 받으며 연극인생을 이어갔다.

그리고 지난해, ‘염쟁이 유씨’는 그의 연극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다. 한 달간 쉬지 않고 무대를 올리는 강행군이었지만 ‘염쟁이 유씨’로 모든 것이 잘 풀렸다. 관객들의 평도 좋았고, 이 연극으로 전주시 예술상도 수상했다. 하지만 더 깊이 있게 작품을 해내지 못한 아쉬움은 여전하다. 기술이 아닌 인간과 삶에 대한 성찰이 담긴 연극을 하지 못한 반성이고 욕심이다. 그렇다고 해도 고민하고 삶에 찌들어서 작품 속에서 허우적거리다 연극인생이 피는 한해였다고 그는 말한다.

‘염쟁이 유씨’는 아버지와 뜨겁게 만나 화해하는 계기가 되었다. 공연 시작 전 아버지의 무덤을 찾아갔다. 아버지와 가슴으로 이야기를 하고, 처음으로 안아드렸다. “아버지 이제 이런 공연도 합니다. 한 달 동안 장기 공연하는데 끝까지 지켜봐주시고 잘도록 도와주세요. 아버지가 옆에 있으니 힘이 됩니다. 아버지 사랑해요.” 아버지의 사진을 어루만지며 도통 나올 수 없으리라 생각했던 쑥스러운 말들을 했다.

그는 10년동안 배우였음을 부모님께 숨기고 살았다. 남들처럼 평범하게 직장생활이나 하라는 아버지의 말 이후로 연극의 연자도 꺼내지 않았다. 요즘 뭐하냐고 물으면 “그냥 이것저것 해요”라고 얼버무렸다. 아버지의 걱정과 관심이 묻어나는 말에도 곧이곧대로 대답하지 않았다. 모스크바로 가던 날도 ‘언제 가냐’ ‘내일이요’라는 짧은 대화로 끝을 맺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부끄러웠던 것 같았다. 잘하고 있는 것 같지도 않은 모습을 보여주기는 싫었다. 적어도 아버지에게만은 배우다운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끝내 그의 연기를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떴다.

“제 가슴 속에서 움직였던 것 같아요. 염쟁이 유씨는 죽음을 이야기하면서도 삶을 논하고 있잖아요. 염쟁이가 염을 하는 게 자식의 염이다보니 아버지에 대한 고민들을 했던 것 같아요. 아버지가 생각나고 걸리고, 아버지가 옆에서 이야기가 하는 것 같았어요.” 그렇게 그는 아버지의 염을 해드렸다. 연극이 끝나고 마음 한쪽에 응어리진, 아버지에게 못해드린 한을 풀었다.

아버지와의 화해를 하려고 했던 것일까, ‘염쟁이 유씨’는 기획단계서부터 술술 풀렸다. 25주년 기념공연은 선배다운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는 후배들의 권유에서 출발했다. 정진권 연출이 ‘염쟁이 유씨’를 하자고 제안했다. 먼저 대전에 사는 작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작가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연극이 잘나가니 돈 벌려고 하는 것 아니냐”는 투였다. 직접보고 거절할 생각으로 전주를 찾아왔다. 하지만 진심은 통했다. 첫 만남에서 작가와 연출, 배우가 죽이 맞았다. 훗날 작가는 “인간에 대한 진정성을 봤다”고 이야기 했다. 배우 유순웅과 서울 기획사와도 물 흐르듯 이야기가 잘 됐다.

넉 달간의 연습에 돌입했다. 염을 배우기 위해 ‘염사선생’을 찾았다. 염을 해주는 촌로의 모습을 찾고 싶었지만 찾을 길이 없었다. 인근 장례식장에서 어눌한 말투의 염사선생을 소개받았다. 그 염사선생을 따라 염을 같이 했다. 참관하고 뒤치다꺼리를 하는 일이었지만 한 시간 염에 땀으로 온몸이 젖었다. 염을 하는 어려움이 아니라 염을 하는 마음가짐 때문이었다.

“염을 하기 시작하면서 염사선생의 모습이 180도 바뀌더군요. 그 진지함, 엄숙함이란... 그 분은 염쟁이의 덕목이 정성이라고 했어요. 사람들이 이런 정성만 있었으면 세상이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도 했어요. 그 때 느꼈던 정성과 진정성을 화두로 들고 연극을 할 수 있었어요. 그리고 이 화두가 진짜 연극을 하게 했고 나를 살려줬지요.”

처음 작품을 대하는 느낌이 다른 작품과 달랐다. 마지막 작품처럼 작업을 했다. 25년의 연기 인생을 정리하는 작품으로 손색이 없었다. 뭔가 부족한 느낌, 풀어내야 하는 철학, 삶의 깊이를 ‘염쟁이 유씨’를 통해 풀어낸 것 같았다. 아버지뿐만 아니라 관객과도 화해하는 느낌이었다. 재미있는 작품을 넘어 뭔가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것은 이런 감정들이 있었던 탓이다. “염쟁이 유씨가 가지는 의미는 죽음을 통해 삶을 배우는 겁니다. 죽으면 아무것도 남지 않잖아요. 살아 있다는 것은 새로운 것을 생성하고 변화시키는 겁니다. 정성을 다해서 그리고 진실한 삶을 살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그래야 죽음이 흐뭇하지 않을까, 죽음이 떳떳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이 작품에서 배웠어요. 철저한 반성을 통해 진실한 삶을 살아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많잖아요.”

염쟁이를 끝내고 이제는 모르는 사람에게 농도 던지고 내성적인 성격이 바뀌는 것을 느낀다. 인간의 마음을 더 넓게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고, 남의 아픔이 나의 아픔으로 다가오는 것도 ‘염쟁이 유씨’ 이후다. 연극을 하면서 삶을 배우게 되는, 삶과 연극의 경계가 사라지는 현상도 겪고 있다고 한다

“연극은 결국 인간, 사회, 미래 등 다양한 의문에서 출발하는 것 같아요. 삶과 연극은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때론 삶이 연극이 되기도 하고 연극이 인생이 되기도 하죠. 사람으로 인해 쌓이는 한을 차곡차곡 채우고 또 하나하나 풀어내는 느낌으로 연극을 하고 싶어요. 그렇다고 그걸 다 풀어내서는 안 될 것 같은 느낌도 들긴 해요.”

여전히 그는 연기를 잘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의 끝 모를 욕심은 “죽을 때 이제 조금 연기를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시간이 모자라구나”하고 한탄할 거라 했다. 연기를 잘하는 친구들을 보면 부럽기만 하다. 전주에도 연기를 잘하는 배우들이 많다고 그는 생각한다. “제가 보는 관점에서 연기를 잘하는 사람은 ‘진실’로 연기하는 사람들입니다. 한 작품을 통해 잘한다는 느낌을 받기보다 여러 작품에서 발전하는 모습을 보이는 연기자들이 잘하는 배우죠.”

그래서 그는 끊임없이 노력하는 배우로 남고 싶다. 예전에는 겁 없이 연기를 했지만 이제는 하나하나가 겁나고 쉽지 않다. 그러다보니 외로움은 커지고, 고민은 더 많아진다. “염쟁이 유씨를 끝내고 눈물이 나더군요. 희열의 눈물이 아니라 그동안 지나온 느낌들이 가슴을 꽉 채웠어요. 괴롭고 힘든 시기를 거치니 그나마 이런 조그만 성과를 얻을 수 있구나, 계속 해도 되겠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어요.”

그의 고민은 자신에게만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니었다. 처음 연극영화과가 생겼을 때, 그는 무척 좋아했다고 한다. “이제 훌륭한 후배들이 많이 생기겠구나.” 그러나 웬걸, 영화 쪽으로 많은 인재들을 빼앗겨야 했다. 순수예술을 고집하는, 돈 안되는 연극판 사람들이 줄어드는 세태에 섭섭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전북연극의 선배로써 후배들이 배우로 거듭나게 하는 여건을 만들지 못한 것에 대해 그는 반성해야 한다고 했다. 후배들에게 희생을 강요하지 않았나 생각도 든다. “삶이 평탄치 못하니까 떠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안타까워하면서도 작품이라도 시켜주면 열심히 하겠다는 이야기를 하는 후배들이 드문 것에 대해서는 아쉽다고 그는 이야기한다.

“각자의 뜻을 펼치기 위해 극단을 만들고, 극단을 채우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지만 현실은 밝지 않은 것 같아요. 전북 연극이 전성기를 지나는 느낌이랄까, 극단에서 연극배우들이 나가는 이유를 알지 못하는 것들에 대해서는 반성해야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 그러면서 연극단체, 배우, 그리고 관이 함께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를 갖출 수 있도록 인식을 전환할 필요성을 제기한다. “일회성 공연이 아니라 끊임없는 연구를 통해 변화를 모색해야 해요. 좋은 공연의 모습은 항상 변화하고 진보해야 하는 겁니다. 지방에서 연극을 하는 것이 어렵지만 지금도 변화를 고민하는 사람들이 많잖아요. 절망하지 않으면 희망이 있다는 보편적 진리가 우리 연극과 삶에 있는 거니까요.”

2013년 고조영은 달라진 모습을 보이고 싶어 한다. 새로운 작업, 인간에 대한 욕구 그리고 그 이상의 무언가를 찾으려 했던 한 해를 보내고 이제는 새로운 출발점에 섰다. 두려움도 없애고 싶다. 이제까지 진정한 배우가 되기 위한 길을 걸었다면 이제는 진정한 배우가 될 수 있는 고조영, 그런 작품들을 만들었으면 하는 생각이다.

“제 연극을 통해 사람을 이해할 수 있는 마음을 가졌으면 좋겠어요. 자그마한 이득 때문에 우리의 삶이 변하는 건 아니잖아요. 그 사람의 아픔이 미래의 내 아픔이 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함께 행복할 수 있는 세상을 꿈꿨으면 좋겠어요. 저의 연극은 그런 세상을 만드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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