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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3 | 인터뷰 [아름다운 당신]
정직해야 좋은 음악할 수 있다고 믿었죠
전주시립교향악단 수석 첼리스트 김홍연
이세영 편집팀장(2013-02-28 11:40:27)

그를 만나고 두 번 놀랐다. 나이보다 한참 젊어 보이는 외모에 놀랐고, 듣던 것보다 부드러운 성격에 또 놀랐다. 전주시립교향악단 수석 첼리스트 김홍연. 비극처럼 아름다운 인생이야기, 여자가 아닌 첼리스트 김홍연으로 불리고 싶은 그의 음악 이야기를 들어봤다.

1악장 빠르게, 그러나 지나치지 않게
음악을 좋아했던 그는 어렸을 때부터 노래하는 음악가가 되리라 생각했다. 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그의 가장 큰 후원자였던 어머니와 노래를 배웠다. 초등학교 때는 그 자리에서 노래를 배워 입상을 할 정도로 재능도 있었다. 하지만 중학교 무렵 그의 음악인생에 복병이 나타났다. 축농증과 재능에 대한 회의였다. “전주여중 시절 이태리 가곡을 부르면 서울에서 온 친구는 성악가처럼 부르는데, 저는 동요처럼 불렀어요. ‘아, 쟤는 나랑 차원이 다른 애구나’ 생각했죠. 콩쿠르를 나갔는데 그 친구가 1등, 제가 2등을 했어요. 그 날 저녁, 어머니께 음악을 그만두겠다고 했죠. 저보다 뛰어난 재능을 지닌 사람이 많은데 제가 잘 될 것 같지가 않더라고요.” 그렇게 욕심 많은 어머니의 성화에 먹었던 용각산과 날달걀과 영원히 이별했다. 하지만 여전히 음악은 너무 좋았고, 주위에 음악하는 사람들이 많아 부러움으로 그들을 바라봐야만 했다. 끝날 듯 했던 그의 음악인생이 고등학교를 입학하면서 다시 이어졌다. 음악을 하고 싶다는 욕심에, 전주여고에 생긴 현악반에 들었다. 첼로 줄이 몇 개인지도 모르면서 첼로를 하겠다고 했다. 첼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는 음악이 중요해서다. “전혀 생각하지 않은 방향으로 갔지만 막상 시작을 하니까 욕심이 생기더라고요. 서울대 졸업생들인 전우회 음악회에 갔는데 ‘이런 음악도 있구나’ 문화적 충격을 받았어요.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무작정 무대 뒤로 가서 연주자들에게 첼로를 배우러 왔다고 했어요.” 그의 무식한 용감함은 무대 뒤를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그리고 그의 용기를 가상히 여긴 한 첼리스트가 배우려면 오라고 전화번호를 건네주었다. 그가 첫 스승인 강해근 한양대 명예교수였고 첼리스트로 거듭나는 계기가 되었다. 40여 년 전의 일을 회상하는 그의 얼굴은 웃음 가득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철이 없어 부끄러움을 몰랐던 덕이라고 했다. 막상 시작한 레슨은 서울과 전주를 오가는 육체적인 피곤함에 모든 것을 새롭게 배워야하는 어려움으로 그를 옥좼다. 그래도 형편보다 더 많은 지원을 해주는 어머니를 생각해서라도 힘든 표정을 지을 수 없었다. “배우고 싶으니까 내가 좋아서 하는 것이니까, 레슨을 받으면서 혼났다는 소리도 못했어요. 어떤 날은 호되게 혼나고 밖에서 실컷 울고 세수를 하고 집에 들어가기도 했죠.”대학에서도 형편은 나아지지 않았다. 일찍부터 배운 아이들과 경쟁을 해야 했고, 개인레슨을 받는 것도 부담이었다. 친구들의 악기를 빌려 정기연주회를 했지만 뒤처지지 않으려고 악착같이 학교수업을 받았다. 열심히 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빠르게, 그러나 지나치지 않게 그는 첼리스트가 되었다.

2악장 느리게, 슬픔을 호소하듯
인생은 언제나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적어도 그는 그랬다. 서울여성오케스트라 단원으로 연주활동을 하며 대학원을 준비하고 있었던 그를 느닷없는 결혼이 주저앉혔다. 집안끼리 잘 아는 사람과 중매였다. 좋고 싫고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선 한번 보고, 약혼식 날짜가 잡히더니 결혼을 하게 됐다. “부모님 말씀을 듣지 않으면 큰일이라도 나는 줄 알았”던 그의 나이 스물셋이 되던 해 봄이었다. 정을 붙이기도 전에 그의 결혼 생활은 끝이 났다. 임신 9개월의 아들을 남겨두고 남편을 병으로 잃었다. 그 충격으로 지금도 그는 병원에만 가면 다리에 힘이 빠진다. 그래도 남편은 그에게 최고의 선물을 안겨주고 갔다.“아들은 제 인생의 로또예요. 친절하고 따뜻한 아들이 있어 지금껏 행복하게 살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오히려 아들에게 미안하고 또 고맙죠, 부모가 다 있어도 부족한 상황인데 저는 그걸 못해주니…” 아들에게 떳떳한 엄마, 좋은 엄마가 되기 위해 사회적 지위가 필요할 것 같았고 오랫동안 꿈꿔왔던 독일로 유학길을 떠났다. 아들과 함께 하는 유학생활이 만만치 않았다. 아들을 한국에 돌려보내기 위해 귀국했지만 결국 그도 독일로 돌아가지 못했다. 아들 때문이었다. “내가 잘되려고 하는 것은 아들과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인데, 아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지 못한다면 공부하는 게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그동안 아들하고 돈독했던 사이가 2년여의 공백으로 어떻게 변할지 두려웠어요.”. 지금도 생각해봐도 잘한 결정이었다. 그의 가장 각별한 친구이자 동반자는 아들이니 후회할 일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도 지역사회에서 아이를 혼자 키우며 여자로 산다는 것은 힘들었다. 수많은 구설수에 올랐지만 회피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아들이 최선을 다했다는 것을 인정해주면 다른 것은 전혀 상관없었다. 그래도 날카로운 가시를 갑옷처럼 둘러야 했다. 주위의 편견을 깨기 위해 완벽하게 준비하고, 연주도 완벽하게 하려고 했다. 남들에게 부탁하는 일도 싫었다. 마음의 문을 닫고 살다보니 다른 사람에게 말하는 것조차 쉽지 않는 성격이 되어갔다. 하지만 그를 속속들이 아는 사람은 그의 단순함에 놀라곤 한단다. 여전히 소녀같은 감수성을 가진 다분히 단순한 사람. 그게 그의 본모습일지도 모르겠다.“다른 사람들이 볼 때는 항상 완벽을 추구하는 제가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는 성깔 더러운 사람으로만 봐요. 노력해야만 살아갈 수 있었고, 내 결정에 대한 자존심과 책임감 때문에 죽자 사자 하는 모습이 그렇게 보였던 거죠.” 소설처럼 슬픈, 젊은 날들은 느리게 느리게만 갔다.

3악장 자유롭게, 생기 있게
그의 음악인생은 전주립교향악단과 글로리아 스트링 오케스트라단, 필하모닉 첼리스트 앙상블과 함께했다. 78년을 시작으로 독일유학 기간을 빼면 전주시향 첼로 수석 붙박이다. 수당 몇 천원을 받으며 시작한 시향생활이 이제는 격세지감을 느낄 정도다. “50대 초중반 음악가들 중에는 전라도 출신이 많아요. 그때는 열정과 재능이 있으면 성공할 수 있었는데 지금은 그렇지 못한 거겠죠. 전국에서 다섯 번째로 시향의 이름을 달았던 전주의 힘을 다시 찾았으면 좋겠어요.” 전주시향, 앙상블, 글로리아는 모두 연습량이 만만치 않은 단체다. 해야 된다고 정해 놓으면 아파 죽어도 해야 된다고 생각했다. 그 우직함이 지금의 그를 만들었다. 우직하게 묵묵히 정해놓은 길로만 간다고 그의 스승은 그를 소라고 불렀다. 칭찬인지 아닌지 헷갈리는 그 말이 가장 정확한 표현인지도 모를 일이다. 91년 그가 창단한 필하모닉 첼리스트 앙상블은 가장 재미있어 하는 일이다. 외국 연주를 듣고 나도 저 아름다운 화음을 내보고 싶다는 생각에 시작했다. 그 당시만 해도 첼로 앙상블을 시도하는 사람이 적었다. 익숙하지도 않고 독주보다 더 힘든 게 첼로 앙상블이기 때문이다. 뜻 맞는 사람들을 모으고 악보도 어렵사리 구했다. 아무리 작은 연주라도 그 사람들이 행복해할 수 있다면 그걸로 만족한다는 그의 신념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20~30명이 앉아서 들을 수 있는 작은 연주회를 하고 싶었고 평생 그런 연주를 주저하지 않았다. 첼로를 켤 수 있을 때까지는 할 것이라고 했다. 지금도 정기연주회를 빼먹지 않기 위해 조마조마하지만 벌써 서른아홉 번째 정기연주회를 준비하고 있으니 만만치 않은 일을 해낸 것이다. “어린 단원들과 함께 하는 것이 축복이죠. 저처럼 나이 먹은 사람과 함께 연주하려고 하나요, 요즘은. 어떤 연주든 싫다는 내색하지 않고 순수한 마음으로 함께 해주는 게 너무 고마워요. 자신에게 도움이 되지 않으면 하기 힘든 세상인데, 언제나 뜻에 따르고 어떻게든 시간 내서 연습하고 긍정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이 기특하잖아요.”그리고 필하모닉 첼리스트 앙상블은 그의 꿈 하나를 이뤄줬다. 앙상블을 10여년 동안 가르쳐주신 한성환선생과 빌라로보스의 브라질풍의 바흐를 12명이서 연주하는 것 말이다. 열둘이 한 마음으로 모이는 것도 불가능에 가까웠지만 이미 소식이 끊어진 한성환 선생을 한 무대에 세우는 것은 아예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우연히 얻은 이메일 주소로 편지를 썼고 캐나다에서 한성환 선생이 단숨에 날아왔다. “2008년 15주년 연주회는 그래서 잊을 수 없어요. 열심히 꾸면 꿈은 이뤄진단 말, 그때부터는 믿게 됐죠.” 자유롭고 생기있는 그의 음악인생은 여전히 축복이다.

4악장 본디 빠르기로, 우아하게
재능에 회의적인 그지만 평생 첼로와 친구하며 살아왔다. 음악을 좋아해서 평생 음악을 했고 음악을 통해 긍정적인 에너지를 퍼트릴 수 있다면 만족한다고 했다. 재능이 뛰어난 음악가들의 몫과 지방소도시에서 꾸준히 연주활동을 하면서 위로와 감동을 줄 수 있는 사람의 몫은 다르다고 그는 생각한다. “음악에 대한 좋은 생각을 가질 수 있도록 가르치는 것이 중요해요. 재능이 부족한 저는 그 역할에 충실하면서 음악을 했어요. 그리고 좋아하는 음악을 하면서 돈을 벌고 아들을 키울수 있었으니 저에게는 다행인 거죠. 한데, 지금은 경쟁도 심하고 모든 것을 돈으로 계산하는 상황이 안타깝네요.”그래도 그는 다시 태어나도 첼리스트로 태어나고 싶다고 한다. 대신, 좀 더 잘하는 첼리스트로. 덜 부끄럽고 주위에 더좋은 음악을 전해줄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다. 그런그의 재능 부족을 메워주는 것은 집중력이다. 연습이던 실전이던 한번 연주를 시작하면 그의 시간은 멈춘다. 음악을 즐기고 음악하는 것 자체가 행복하기 때문일 것이다. “첼로 앙상블 곡은 알려지지 않은 곡들이 여전히 많아요. 평상시 접해보지 못한 곡을 발견하면 잘 될 때까지 연습을 하는데 그런 곡을 할 때마다 너무 좋고 행복해요” 다만, 그와 함께 연습하는앙상블 단원들은 죽을 맛이다. 그 때문에 그의 악명(?)은 더욱 높을지도. 첼로는 그에게 위로다. 깊고 조용하게 흐르는 저녁강물 같은 첼로가 그에게 딱 맞는다고 생각한다. 화려한 바이올린이나, 재치있는 비올라보다 오케스트라의 밑을 받쳐주고 채워주는 첼로가 그에게는 최고다. 한자리에 진득하니 앉아서 연주하는 첼로는 인내심을 필요로 하고 그게 고집이 된다. 첼로를 연주하다 보니 첼로처럼 고집만 늘었다고 했다. 그의 황소고집은 누구도 못 말린다. “예전에는 나도 이만큼 하는데 너희들은 왜 못해 하는 생각에 많이 화가 났어요. 무대에 올리는 연주는 완성은 아니더라도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생각이기 때문에 매주 만나 연습을 했는데 지금은 아니다 싶어요. 나에게 사정이 있다면 그에게도 사정이 있는 거잖아요.” 꼬장꼬장한 성격도 나이를 이기지 못하는 게 서글프기도 하다. 그래도 본래 빠르기로 우아하게 다음을 맞아야 할 터다.

5악장 점점 느리게, 처음부터 다시 한 번
이제 자꾸 무언가를 되돌아보고 정리해야 할 때가 다가온다. 2년이 남은 전주시향을 정년퇴임 하고 싶은 것이 가장 먼저다. 자기 맡은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선배, 후배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는 선배로 정년 퇴임하기를 희망한다. 필하모닉 첼로 앙상블의 리더를 찾아 물려주는 것도 그가 정리해야 할 일이다. 이제는 후배들의 악보도 챙겨주고 보면대도 날라주고 힘이 되는 선배가 되었으면 한다. 그리고 연주하느라 다니지 못했던 여행도 마음껏 하고 산티아고 순례길 100Km도 꼭 걸을 생각이다. 여전히 남은 지역에 대한 애증도 풀어야 한다. 지긋지긋하지만 전주가 나를 살게 해준 곳이니 나도 이곳에 보탬이 돼야 되겠다는 의무감이다. 음악 봉사활동을 한다거나 일본어 통역 봉사를 통해 돌려줄 건 돌려줄 생각이다. “애정을 가지고 지역의 음악에 책임과 사명감을 지닌 연주자들이 더욱 줄어드는 것 같아요. 이러다간 이 지역이 음악의 불모지가 되는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가 생겨요. 음악과가 자꾸 없어진다거나, 유명 음악가들의 연주에만 열광하는 것도 그렇고요. 지역의 인재는 지역사람들이 아껴야하는 거잖아요.”열심히 하는 것, 가지고 있는 능력만큼 최선을 다하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고 달려왔다. 첼리스트 김홍연이 아닌 이름으로 기억되는 것이 싫었고,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를 옭아맸다. 그러면서 무리수도 많이 두었다. 다그치고 엄격하게 다른 사람에게 내 방식을 고집했다. 하지만 이제 자연스럽게 쉬어가는 시간이 오는 것을 그는 느낀다.“그래서 미안하고 고마운 사람들이 많아요. 앙상블 후원회원들도 그렇고 제 아들도 그렇고, 이제 한 템포 늦추고 정리를 해야겠어요. 좋아하는 음악을 계속 들으며, 아름다운 자연을 볼 수 있는 행운을 계속 이어가고 싶을 뿐이에요.” 음악과 이별할 수 없는 그의 음악인생이 처음부터, 느리게 다시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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