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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9 | 인터뷰 [아름다운 당신]
“완판본의 맥을 잇는 주춧돌이 되고 싶습니다”
<추안급국안> 출간 하는 한명수 대표
이세영 편집팀장(2013-09-02 17:37:41)

우직한 사람만이 산을 옮긴다
한국의 출판 시장은 세계 시장의 규모에 비하면 보잘것없다. 가까운 중국이 8배, 일본은 2배 많은 책을 만든다. 그 작은 시장마저도 상위 5% 출판사가 전체의 90% 가량을 점유하고 있는 것이 한국의 현실.
한국출판저작권연구소가 82개 출판사를 대상으로 조사한 지난해 국내 출판 시장 매출 규모는 5조 6754억 원으로 전년 대비 4% 감소했다. 속을 들여다보면 출판 시장의 상황은 더욱 처참하다. 연 매출 10위권에 든 출판사들이 1천억 원이 넘는 매출을 올릴 동안, 1천여 개가 넘는 중소 출판사들은 그 명맥을 잇기 힘든 지경이다. 자본력을 동원한 대형 출판사들이 ‘베스트셀러’를 독점하는 한국의 출판 시장은 중소 출판사들의 출판 시장 진입을 근본적으로 차단하고 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지방에서 출판사를 운영한다는 것은 올 여름처럼 심한 가뭄에 콩을 심는 것보다 어리석은 일이 됐다. 그러나 어디에나 우공이산의 우직함으로 한길을 걷는 사람은 존재한다. 흐름출판사의 한명수 대표가 그렇다. 10여 년 동안 완판본의 고장 전주의 맥을 이어 가며 전라도의 자연과 역사, 문화를 그는 기록하고 있었다.
한명수 대표가 흐름출판사를 통해 현재까지 만들어 낸 인문학 관련 서적은 200여 권. 이 책들은 흐름출판사를 인문학 전문 출판사로 이름을 올려놓았다. 하지만 그는 처음부터 출판사를 운영할 생각을 한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사업을 하겠다고 다짐한 2002년, 그는 디자인 사업을 시작했다.
그 후, 한 권의 책이 그의 인생을 바꿨다. 그해 발간한 《이순이 루갈다 남매 옥중편지》가 그것. 천주교 신자였던 그에게 이 책은 종교적 신념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동시에 책 만드는 기쁨을 알게 해 줬다. “진짜 우연한 기회에 책을 만들게 됐어요. 책다운 책 한 번 만들어 보지 못한 저에게 부담이자 도전이었죠. 책의 내용이 이순이 루갈다 남매의 신앙 고백서이다 보니 나 자신을 되돌아보는 계기도 되었고, 책을 통해 해낼 수 있는 것들이 많다는 걸 알게 됐어요.”
그렇게 맺은 종교와 책의 만남은 그 후로도 계속돼, 10여 권의 종교 관련 서적이 흐름출판사에서 발간됐다. 천주교 관련 서적을 만들면서 “출판이 이런 것이구나.” 하는 감을 잡았다. 꾸준한 출간 작업으로 흐름출판사는 ‘책을 계속 만드는 출판사’, ‘꽤 책을 잘 만드는 출판사’라는 입소문을 탔다. 그가 출간하는 책들의 영역도 조금씩 넓어져, 전라문화연구소나 지리산권문화연구원의 논문집과 고문서, 도록을 비롯해 개인 문집에 이르기까지 인문학 관련 서적을 전문으로 만드는 출판사로 이름을 굳히기 시작했다.

전주에서 번역한 책, 전주에서 발간하다
“가장 기억에 남는 책이라면 아무래도 2009년 《국역 여지도서》를 꼽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전체 50권의 규모도 규모였지만 사료적 가치가 혁혁한 책이었기 때문에 긴장을 많이 했어요. 출판사를 하는 입장에서는 자존심이 걸린 일이었고, 해낼 수 있을까 걱정도 컸던 작업이었죠.”
1년 동안 15명이라는 직원을 총동원하며 만들어 낸 《여지도서》는 조선 전기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이은 조선 후기 인문 지리서의 모범이 되는 책으로 1757년부터 1765년까지 각 읍에서 편찬한 읍지를 모아 만든 전국 읍지이다. 《국역 여지도서》는 《여지도서》 원문의 표현을 한자 사전의 도움 없이도 뜻이 통할 수 있도록 쉬운 우리말로 풀어내 조선 후기 사회 전반에 대한 이해를 돕고 지역사, 향토사 연구 기반을 한 단계 진전시키는 데 기여할 것이라는 평을 받은 역작 중의 하나이다.
이 정도 책이면 무조건이랄 정도로 서울 소재 출판사에서 만들 법했지만 ‘전주에서 번역한 책이니 전주에서 출판하겠다’는 저자들의 생각에 힘입어 흐름출판사가 오롯이 책임을 지게 됐다. 역시나 50권의 방대한 책을 완성하는 것은 가시밭길이었다. 서울에서 만든 책에 뒤질 수 없다는 그의 고집 탓에 수없는 재편집과 교정 과정을 거치며 6개월의 예정된 시간을 훌쩍 넘겼다. “출판사에서 해낼 수 있는 편집상의 체재 및 오탈자 문제를 남기고 싶지 않다”는 신념은 시간이 흐르면서 자존심을 거는 일이 됐다. 회사의 이윤을 내는 일은 뒷전이 되었다. 그해 여름이 어떻게 갔는지 기억이 안 날 정도로 바쁘게 발간 작업에 매진했다. 전체를 갈아엎는 과정을 세 번 겪고 1년이 지났을 무렵 50권 한 질짜리 책이 완성됐다. “지금 생각하면 체계적인 계획보다는 자존심을 걸고 했던 것 같아요. 오히려 출판의 과정과 결과에 대해 미천하였기 때문에 쉽게 했지 지금이라면 1년 안에 해낼 수 있었을까 싶기도 해요.”
그의 바람대로 《국역 여지도서》는 “지방에서 찍었네.”라는 소리를 듣지 않았다. 전문 서적의 한계와 전권 76만원이라는 가격에도 책은 국내는 물론 해외에도 판매됐다. 책의 가치를 알아보는 사람들 덕에 ‘흐름출판사’라는 이름이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됐다.
정작 그는 책을 내고 나서 외로움에 떨었다. 뭔가 한 뭉텅이가 떨어져 나간 듯 허전했다. 책임자의 막중한 중압감과 사람과 일하면서 빚어지는 갈등을 조율하느라 느꼈을 스트레스가 후련함 대신 외로움으로 밀려왔을 터. 그는 홀로 술 한 잔을 마시며 조용히 울었다. “내가 아프면 책이 나올 수 없다는 생각으로 버티고 버텼어요. 책이 나오고 나서 며칠을 고생을 했죠. 해방감에 허탈감에 온몸은 만신창이었지만 책을 만들어 내는 매력은 또 그런 게 아니겠어요. 책에 대한 애정도 더 생기고 말이죠.”

출판사는 새 책에서 인심 난다
몸이 아파도 그는 쉴 수가 없다. 그가 사무실에서 맡은 직책은 대표지만 일인 다역을 하기 때문이다. 출판 의뢰가 오면 원고를 검토하고 출간이 가능한지를 판단하는 기획자, 부족한 현장 사진을 찍는 사진가, 편집자, 교정자의 역할을 그는 모두 소화해 낸다. “원고는 언제나 완벽한 상태에서 오는 것이 아니잖아요. 최대한 필자의 의도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도 내에서 쉼표나 마침표 하나까지 교정을 보고 걸러 내는 작업은 필수죠. 얇은 책이라고 시간이 적게 걸리는 것도 아니어서 책에 드는 품은 언제나 비슷하게 많이 들어요.”
‘일당백’의 정신으로 일을 하지 않으면 네트워크와 자본으로 무장한 서울과 경쟁하는 것이 넘지 못할 벽이 될까 싶어 그는 스스로 일인 다역을 부추긴다. “서울과 경쟁할 수 없다는 것은 인정해요. 직원 세 명을 거느리고 작업하는 작은 출판사가 경쟁이 될 턱이 없죠. 하지만 꾸준한 작업을 통해 충분한 경험과 성실한 인력을 갖추고 일당백의 정신으로 무장한다면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지 않을까요?”
그래서 그는 빨리 돈을 벌고 싶다고 했다. 곳간에서 인심 난다고 출판사는 새로운 책이 나와야 인심이 나는 탓이다. 든든한 곳간이 생기면 좀 더 창조적인 일을 하려고 한다. 사회성과 철학이 담겨 있는 책을 만들어 보고 싶다. “조세희의 『난쟁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같은 스테디셀러도 하나쯤 만들고, 하루끼의 소설처럼 폭발력 있는 책도 내야지 않겠어요? 그래서 여유가 생기면 신인을 발굴하고 지원하는 일을 하고 싶어요. 유명 작가가 아닌 신인을 조세희나 하루키로 키우는 것이 저의 꿈입니다. 그게 돈이 되잖아요!”
지금도 조심스럽게 그 꿈을 키우고 있다. 인세를 주고 흐름출판사의 이름으로 책 한 권을 만드는 중이다. 천년이 된 전국의 암자 14개를 돌며 들려주는 이 책은 암자의 안내서이면서 길을 따라가며 자연스럽게 읊조릴 수 있는 시 같은 책이 될 것이라고 했다.

한강 이남에서 처음 만드는 90권의 책
이 책을 포함해 그의 출판사는 매년 15~20권의 책을 발간한다. ‘한 방에 오십 권’도 만들어 내니 더하면 더했지 모자라지는 않을 듯했다. 하지만 흐름출판사는 자비 출판을 지양한다. 그간에 만들어 낸 책들도 출판비에 해당하는 정도만 저자가 부담하고 책의 판매를 통해 회사 이윤을 얻는 구조를 취했다. 이를 위해 한 대표는 교보문고, 영풍문고, 출판협동조합, 자체 홈페이지 등을 통해 전국 유통망을 갖추고 책을 판매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췄다.
이런 구조 덕에 《이순이 루갈다 남매 옥중편지》도 흐름출판사의 스테디셀러가 돼 회사에 큰 도움이 되고 있고, 《국역 여지도서》도 만만치 않은 책값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유통되는 책이 되었다. 그는 또 변화하는 출판 시장에 대응하기 위해 전자책 발간도 계획 중이다. “종이책에 대한 향수는 있더라도 편리성이나 휴대성이 높은 전자책 시장은 앞으로 더욱 커질 겁니다. 아직까지는 읽기 쉽지 않은 전문 서적이 많지만 앞으로 인문, 역사 서적 중심의 출판사로 자리매김하기 위해서는 출판 시장의 변화에 맞추며 흐름출판사의 앞날을 준비해야죠.”
하지만 올해 그의 온 신경이 닿아 있는 책은 《국역 추안급국안》이다. 지난해 6월부터 시작된 이 책은 1차 교정본이 진행됐고, 이르면 10월에는 전권 90권의 책이 세상에 나올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한강 이남에서 90권의 책이 한꺼번에 나오는 경우는 흐름출판사가 유일무이할 것이라는 그의 말에서 자부심이 느껴진다. 언제 책이 나오는지 문의 전화도 심심치 않게 오는 것도 좋은 징조이다.
“《국역 추안급국안》은 《국역 여지도서》보다 파급력이 더 큰 책이기 때문에 저희도 많은 기대를 하고 있습니다. 《국역 여지도서》가 저희 출판사를 전국적으로 알리는 역할을 했다면 《국역 추안급국안》 출판사의 위치를 한 단계 끌어올리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살얼음판 걷는 심정입니다. 조심조심 한 자 한 자 교정을 보지만 항상 오류는 생기는 것이 책이기 때문에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는 없습니다.”
그래도 편집의 진행 속도는 《국역 여지도서》보다 더 빠른 상태. 10여 년 쌓은 노하우 때문인지 큰 어려움 없이 진행되고 있는 것도 그의 마음을 조금은 가볍게 한다. 물론, 줄 치며 한 자 한 자 꼼꼼하게 교정을 볼 것을 그는 물론이고 모든 직원에게 당부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넘어야 할 산은 높지만 《국역 추안급국안》의 출간을 손꼽아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기에 속도를 더욱 높이고 있다. 그것이 지역의 출판문화를 위한 내일을 기약하는 것이기에 힘들면서도 즐거운 작업이라고 그는 이야기한다.

신인 작가에게 출판 기회를 주는 길
“한옥마을 그리고 먹을 것. 전주를 이렇게 기억하게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전주를 찾는 사람들에게 문화적 향수를 채워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해야 합니다. 그 중 하나가 완판본의 고장이라는 자부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전주에서 책을 낸다는 것은 결국 완판본의 맥을 잇는 일입니다. 제가 감히 맥을 잇는다는 장담은 못해도 그 주춧돌 역할이라도 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그는 출판에 대한 관심을 넘어 완판본의 고장이라는 맥을 잇고 출판문화도 활성화할 수 있는 방안들을 모색하고 있다. 홍지서림, 책방거리에 관심을 두는 것도, 조그만 북카페를 운영하고 싶다는 소망도 다 그 때문이다. 그렇게 된다면 물처럼 아래로 흘러, 세월이 흘러도 오래 남을 책과 동행하는 출판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러고 보니 ‘흐름’이라는 이름도 참 잘 지었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여전히 그가 가야 하는 길은 멀고도 험하다. 지역만의 출판 시장이 형성되지 않은 것도 그에게는 걸림돌이다. 이 지역의 출판사는 열이면 열 디자인과 병행을 하기 때문에 자신처럼 오로지 출판만 하는 출판사가 많아지기를 바란다. 그래서 그는 자비 출판도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하지 않는다. 건전한 출판 시장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그게 독이 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자비 출판에 얽매여 있다 보니 유통, 판매 등의 시스템도 갖춰진 곳이 없어요. 지역의 출판 시장을 활성화하기 위해서는 전문 출판사들이 많이 만들어져서 전문 서적들을 활발하게 출간하는 것이 선행돼야 할 것 같아요. 물론 지자체도 출판문화를 활성화할 수 있는 정책을 만들어야 할 테고요. 더불어 이름 있는 작가들이 전주에서 출판을 해 준다면 지역의 출판 시장을 한 단계 끌어올리는 계기가 될 겁니다.”
그렇다, 완판본의 고장다운 출판사 하나쯤 키우려면 이름난 이들의 헌신도 필요하다. “가장 힘든 것이 책 만들 원고가 없는 것”이라는 그의 푸념을 들어줄 만한 이름값 하는 작가는 없는 것일까. 그는 그들의 힘으로 서울에서 굽실거리며 책을 내야 하는 지역의 신인 작가들이 이 지역에서도 수월하게 책을 낼 수 있기를 희망한다. 그의 소망이 이뤄지는 날, 완판본의 고장은 내일의 이름으로 계속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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