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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1 | 인터뷰 [아름다운 당신]
남북문제, 자주 만나야 풀리죠
(사)전북겨레하나 김성희 사무총장
이세영 편집팀장(2013-11-05 15:14:16)

그를 만났던 이들은 “고맙습니다”는 끝말을 남긴다. 오지랖 넓어 남의 청을 거절하지 못하는 그의 성격 덕이기도 하지만 언제나 힘차고 열정적인 그와의 만남은 깨우치는 것들이 많기 때문이다. 전북겨례하나에서 8년 붙박이로 통일운동에 전념하는 김성희 사무총장이 그다. 힘찬 웃음로 첫 인사를 나눈 김 사무총장과 힘들었지만 희망이 넘쳤던 86학번의 대학시절로 돌아갔다.

87년 거리에서 배운 시대정신
“강의실에서 수업을 받는 것보다 ‘학습’을 하는 게 더 중요했던 것 같아요. 어려운 집안 형편에 졸업하고 돈을 벌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는데 그 덕에 사회에 눈을 뜨게 되고 불합리한 사회구조를 알아가면서 사회에 대한 분노도 생겼죠.”
그렇게 그는 87년 6월 거리로 나섰다. 시대는, 밖으로 6월 항쟁에 불을 붙인 박종철 열사의 고문치사사건을 시작으로 대통령 직선제 향한 열기가 가득했고, 안으로 학원민주화운동이 뜨거웠다. 그가 다녔던 전주대학도 재단 퇴진을 외치며 100일 수업거부 투쟁을 진행했다. 아침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강의실 대신 캠퍼스를 누비며 집회를 열었다. 그렇게 87년은 학원민주화운동과 국가민주화운동이 정점에 다다랐고, 그 현장에 그는 언제나 함께 했다. “‘모든 젊은이들은 거리로 나가야 한다’는 게 일반적이었어요. 시위가 유행같은 거였죠. 잡혀간다는 생각보다는 학생과 시민들이 어우러진 거리에서 신나는 일을 하는 기분이랄까?”
그도 그럴 것이, 그가 나선 87년의 여름 거리는 1천여 명이 자리를 함께 했고 가게 주인들은 아이스크림이며 음료수를 건네주고 함께 참여하는 축제의 장이기도 했다. 그를 찾으러 거리로 나선 어머니처럼, 수많은 누군가의 어머니들이 자식 걱정에 시위현장을 방문했고 아들 딸 같은 청년들에게 음료수 한 병 건네는 건 87년 거리의 또 다른 풍경이었다. 그렇게 그가 있었던 현장은 민주화의 깃발을 휘날릴 수 있었다.
6.10 항쟁은 승리로 끝났지만, 학내 상황은 여전했고 이어지는 투쟁은 전주대 수석입학생에게 ‘쌍권총’을 선물했다. 그래도 여전히 그는 현장에서 민주화를 향한 열망을 불태웠다. 그는 그해 전주역 광장 저 바닥에서 울려 나오는 낮은 음의 레퀴엠 같은 “살인마 노태우”의 구호를 잊을 수 없다.
“그 소리가 어찌나 섬뜩하던지요. 노태우는 더 그랬을 거예요. 시님과 한 마음으로 내지른 소리에 노태우는 유일하게 전주에서만 유세를 열 수 없게 됐지요. 뭐, 이 때 일로 유치장 신세를 지기는 했지만 이 지역 학생운동이 대중적인 지지를 받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봐요. 그렇게 만들어진 민주주의가 오늘날….”

현장을 떠났던 세월의 아픔들
그렇게 성공과 실패의 쌍곡선을 그린 80년대는 90년 대학 졸업과 함께 저물었다. 1년여 후배들을 추스르며 대학에 남았지만 이듬해 사회에 눈을 뜰 때부터 함께 했던 선배와 결혼하며 캠퍼스와 작별했다. 운동권 출신 가정이 거개가 그렇듯, 생업문제는 여자가 감당해야 하는 일이 됐다. “생업문제는 어느 가정에나 닥치기 마련이잖아요. 남편은 혈기에 앞으로 나가는 것만 보고 살았죠. 집안 분위기도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어요. ‘니는 그렇게 살아서 좋겠구나, 나는 이렇게 힘들다’하는 분위기였다고 할까요.”
살림을 꾸려가야 할 방편으로 학습지 과외를 시작했다. 찬란했던(?) 87년의 고민은 하루 13시간 노동이라는 삶 속으로 내팽개쳐졌다. 하루 평균 서른 가구를 돌아야 하니 가르치는 아이들과 교감하려는 노력은 물거품이 되기 일쑤였다. 장시간 근무의 비정규직 노동자, 그리고 과도한 영업 스트레스. 8년의 노동현장은 결코 녹록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를 막상 괴롭히는 것은 남편이 돈을 벌어다 주지 못하는 것도, 비정규직의 삶도 아니었다. 학교 다니며 배웠던 것을 잊었던 것이 아니기에, 그의 삶은 한으로 쌓였다. “사회에 눈뜨고 뭔가를 아는 사람이 원하는 삶을 살지 못하고 아등바등 내 삶만 추스르며 사는 것이 힘들더군요. 다른 사람의 삶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자괴감도 생기고….”
둘째 아이를 낳고 정규직이 된 직장을 그만 뒀다. 돈은 궁해져 살림은 팍팍해졌지만 가정은 평화로워졌다. 티격태격하던 부부사이도 더 좋아졌다. 공부방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소일거리를 시작했고 얼마 후 공장에 취직했다. 대학 졸업 후에 잘 안됐던 공장투신이었다. 12시간 맞교대를 하는 반도체 공장이었다.
“첫 야간 근무 때는 죽는 줄 알았어요. 시간은 안가고 새벽이 다가올수록 눈을 제대로 뜰 수가 없더군요. 뿌연 안개 속에 하얀 옷을 입은 귀신이 왔다 갔다 하는 것처럼 느껴졌어요. 밤이, 12시간이 이렇게 길다는 것을 처음 몸으로 체험한 것 같았어요. 이십대 초반의 청년들이 이렇게 살고 있구나, 알게 됐어요.”
한참 놀러 다니고 싶은 그 나이에 12시간 노동을 하는 그들이 애처롭게 느껴졌다. 모두 동생같은 나이라 더욱 더 그랬을지도 모른다. 노조를 만들거나, 운동을 하기보다 현장을 체험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강했던 터라 아이들과 친하게 지내는 게 좋았다. “나 자신을 시험해보고 싶었던 것 같아요. 1년 정도의 공장 생활이었지만 이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는 삶이구나, 학교 졸업하고 단체에서 운동만하는 사람보다 내가 더 단단하구나 생각했죠.”

남과 북이 아니라 ‘인간’이었다
자신을 되돌아볼 기회를 가진 그의 삶의 궤적은 다시 ‘운동’으로 향했다. 2005년 1차 정상회담 이후로 민간차원의 교류가 늘어나며 탄생한 ‘우리겨레하나되기운동본부’였다. 그 이전 통일운동은 국가보안법이나, 정치적 탄압을 받았지만 이맘때 통일운동은 새로운 차원의 접근이 가능했다. 겨레하나는 대북지원과 남북교류혁력사업을 전문으로 하는 통일운동단체로 합법적이고, 문턱이 낮으며 시민들과 친근하게 다가서는 통일운동의 시작을 알리는 계기였다. 그곳에서 그는 새로운 삶을 살기 시작했다. 그가 겪었던 다양한 삶의 여정은 겨레하나의 생활에 많은 도움이 됐다. 많은 경험과 유연한 사고는 폭넓은 사람들을 만나야 하는 일에 들어맞았다. “겨레하나는 새누리당에서부터 진보당까지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기 때문에 그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와 행동으로 접근하는 것이 중요해요. 그동안 어려움도 많았고 힘든 일도 있었지만 그 힘 덕분에 겨레하나에서 잘나가는 거겠죠?”
겨레하나와 통일운동을 하며 그는 신이 났다. 평소에 가진 생각도 그러하거니와 남을 위해, 민족을 위해 일할 수 있다는 사실이 그를 더더욱 일에 매달리게 했다.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 이야기하고 새로운 일을 기획해야 하는겨레하나와 그는 성격도 잘 맞았다. 일을 재미있게 하다 보니 성과도 꽤 있었다.
겨레하나가 발족한 그해 10월 전북에서 이례적으로 큰 규모인 200명의 인원이 북한을 방문한 것을 시작으로 30여 차례 530여명의 도민이 북한을 방문했다. 2005년부터 매해 수재민 돕기 성금을 모금하고 전북교육청이 대북사업에 대한 의지를 가지면서 2006년을 시작으로 3년간 1천톤의 교과서 제작용 종
이를 보낼 수 있었다. 2008년에는 완주군과 함께 한 협동농장 지원을 통해 건축자제와 농기계를 보냈고, 탁아소 콩우유 지원사업도 진행했다.
“북한은 종이가 없어 교과서를 필사해서 공부해야 하는 상황이었어요. 그런데 종이를 보내자마자 그해 북한이 핵실험을 했어요. 모니터링을 가야 되나 말아야 되나 고심을 하다 방북을 했죠. 북은 오히려 어려운 상황에서 방북을 해준 우리를 더욱 신뢰하게 됐죠.”

북한에 가서 북한 사람들과 관계를 만들며 소통할 수 있는 체험은 그에게 색다른 경험이었다. 하지만 북한과의 관계가 처음부터 쉬웠던 것은 아니다. 그들이 하는 말이 진짜인 건지 의도가 있는 것인지 파악이 잘 안됐다. 사소한것도 사전에 협의되지 않으면 보여주지 않으려해 답답했던 적도 한 두 번이 아니었다. 특히그들의 지도자에 대한 것은 사소한 것 하나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일행 중 한 사람이 ‘김정일 위원장의 집무실은 어디예요’하고 물었어요. 청와대가 어딨냐, 물을 수 있잖아요. 그런
데 기겁을 해요. 이해가 안 되는 거죠. 그런데 역으로 그들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니 왜 그런지 알 수 있어요. 전 세계로부터 악의 축 취급을 받는 사람들이잖아요. 북한사람은 미국과 친한 우리가 정보를 캐려한다고 생각하는 거죠. 그심정 이해가 가잖아요.”
이런 상황들을 딛고 지속된 방북과 관계 유지는 그들을 이해할 기회를, 우리를 이해시킬기회를 줬다. 2009년까지 해마다 분위기가 달라졌다. 북한은 더 개방적이고 더 유연해졌다. 지원에 대한 모니터링도 “우리를 못 믿는 거냐” 는 처음 입장과 달리 계속적인 설득에 의해 동의를 얻어 낼 수 있었다. 북한주민과 섞여 같이 노래 부르고, 접촉하면서 기본적인 신뢰가 쌓였다. 다양한 기회를 통해 북한과 남한 사람이 아니라 같은 ‘인간’임을 서로 인식해 가는 것, 북한과 교류하며 얻어낸 가장 큰 성과중 하나다.

잘못된 대북정책 만드는 북한에 대한 선입견
그러던 것이 2009년 1월 눈 내리는 평양을 끝으로 다시 갈 수 없는 땅이 됐다. 정부에서는 방북자체를 승인해주지 않았다. 특히 지자체에서 북한과 교류하는 것에 대해서는 거부반응이 심했다. 겨레하나의 방북사업이나 지원사업은 모두 중지될 수밖에 없었다.
“민간 교류는 정부간의 관계가 경색되더라도 남북관계를 풀 수 있는 실마리를 줄 수 있는 건데, 지난 정부에 이어 이번 정부도 민간을 못 믿고 싹 닫아 버린 거죠. 특히 북한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면접한 사람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는데,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나봤던 박근혜 대통령이 대북관계를 잘 풀어나가고 있는 것 같지 않아 보여요.”
개성공단 국제화 문제도 그렇다. 개성공단의 이득은 민족내부거래에 의한 저렴한 노동력과 임대료, 세금혜택이었는데 국제기준에 맞추게 되면 이런 이득들이 사라진다는 것이 그의 판단이다. 개성공단 국제화는 우리 정부가 원칙 있는 대북정책을 한다는 명분을 쌓을 수 있지만 북한이 다른 나라의 기업을 개성공단에 유치해도 된다는 것이 되고 결국 우리가 독보적으로 누렸던 혜택은 사라지게 된다는 것이다. “민족의 문제가 아니라도 북한과의 경제협력은 우리에게 큰 이득을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정부는 명분을 위해 실익을 버리고 있습니다. 소탐대실이죠. 앞으로 북한은 중국과 더욱 긴밀한 관계를 가지게 될 테고 우리는 통일에 대한 희망도 경제적 실익도 다 잃어버리는 상황이 되겠죠.”
정부의 상황이 답답하기는 하지만 그는 북한을 바라보는 시각이 바뀌지 않는 것도 안타깝다고 한다. 북한은 영화에서 보이는 것처럼 폭력적이지도 불안하지도 않은 사회라고 그는 생각한다. 오히려 일상의 삶이 언어를 통해 드러나는 것이라면 곱고 나긋나긋한 말을 하는 그들의 삶은 느리고 평화롭다. “말씨 자체도 곱고 나긋나긋한 편이에요. 오히려 우리보다 더 안전하고 범죄도 적은 사회가 북한인 것 같아요. 그런데 우리는 언론 영화 등을 통해 북한의 어두운 이미지만 보여주는 것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잖아요. 북한의 왜곡된 이미지를 벗고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필요할 것 같아요. 그러려면 자주 북한과 자주 접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래서 북한을 바라보는 것은 일상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특별히 좋게 보는 것도, 그렇다고 아주 나쁘게 보는 것도 바람직하지 못하다. 그런데 우리는 남북관계가 좋아지면 순한 양으로, 남북관계가 나빠지면 뿔 달린 괴물마냥 북한을 바라본다는 것이다. 북한도 하나의 국가인데, 그들을 이상한 집단으로 바라보는 것도 문제라고 지적한다. 이런 시각은 합리적으로 진행되는 외교행위에서 북한은 예외일거라는 선입견을 심어주고, 거기서부터 잘못된 대북정책이 나온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현 정부의 대북정책처럼.

통일의 미래세대를 준비하는 일
방북이 전면 중단되며 겨레하나는 청소년사업과 대학생사업으로 방향 전환할 수밖에 없었다. 북한에 갈 수 없는 상황이 5년째 접어들고 있지만 겨레하나는 미래 통일세대를 준비하는 일에 여전히 바쁘다. 올해는 (사)전북겨레하나로 독립법인이 되며 독자적인 사업도 꾸려나갈 준비도 하고 있다. 그리고 그 일들을 기획하는 일을 전담하는 그는 더욱 바쁘다.
‘지금이 안 되면 미래를 기대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에 2009년 겨레하나가 가장 먼저 시작한 것이 ‘청소년 평화통일 기자단’이다. 고교 2학년 학생 40명으로 운영되는 이 기자단은 평화통일에 관련한 것을 취재하며 통일에 대한 바른 시각을 배워 나가고 있다. 올해는 대학생 봉사동아리 ‘더불어’도 만들었다. ‘지역과 더불어, 겨레와 더불어, 세계와 더불어’라는 기치아래 모인 ‘더불어’는 봉사의 의미를 생각하고 우리 사회의 문제에 대해 고민하는 동아리다. “우리가 후원하기는 하지만 대학생 스스로 운영하고 있어요. 멘토들과 만나 어떻게 사는 것이 바르게 사는 것이냐를 고민하기도 하고 농활이나 지역봉사도 나갑니다. 올해 해외봉사를 가겠다고 준비 중인데 잘 됐으면 좋겠네요.”
그가 매년 새롭게 준비하는 ‘대학생 통일골든벨’도 전북겨레하나가 중점적으로 진행하는 사업이다. 10·4 남북공동성명 선언일을 기념하기 위해 2010년부터 진행 중인 이 행사는 대학생 200여명이 책 한 권을 읽고 문제를 푸는 퀴즈대회다. 그동안 냉전의 추억, 행복한 통일 이야기, 통일 보는눈 등 통일문제에 대해 대학생들에게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줄 수 있는 책을 선정했다. “올해는 특히 역사교과서 문제로 시끄러웠잖아요. 그래서 올해는 ‘만약에 한국사’를 선정했어요. 학생들에게 통일뿐만 아니라 역사문제를 공부할 수 있는 기회도 제공하고 이를 통해 사회를 바라보는 의식도 더욱 깊어질 수 있게 된 것 같아요.”
이러한 열정적인 사업은 든든한 후원으로 전북겨레하나의 뿌리를 더욱 깊게 한다. 하루 100원 통일운동으로 3천원 이상 소액 후원자가 4천여 명이 되고 5만원 이상의 후원이사회도 70여명 확보하고 있어 통일운동단체로는 보기 드물게 재정이 튼튼하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하지만 오랫동안 대북사업이 막히다 보니 통일운동에 대한 관심도 멀어지고 후원자들에게 줄 기쁨이 없어 어려움이 적지 않아요. 그래도 북한 어린이 의약품 보내기 운동을 준비하고, 해외동포 나눔 교류사업도 생각하고 있어요. 또 기자단, 봉사동아리도 꾸준히 지원해야 하고 더 많은 행사를 해야 돼서 11월 14일 후원행사를 준비하고 있어요. 후원회원 615명을 모집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이죠. 전북겨레하나의 후원회원이 되어주시면 화해와 평화의 열매를 받을 수 있을 겁니다.”
그가 일을 벌이면 크게 벌이는 탓에 같이 일하는 5명의 상근자들은 죽을 맛이지만 그는 그들을 믿고 ‘전북겨레하나 나눔의 벗 615인의 밤’이라는 큰일을 또 벌였다. 그는 이번 행사를 통해 침체된 통일운동에 활력을 넣고 전북겨레하나도 더 크게 뻗어나가게 할 수 있을 것이라며 행사에 꼭 참여해 줄 것을 당부했다.
미래를 준비하는 것은 전북겨레하나만이 아니다. 그 또한 미래를 준비하고 있다. 한 없이 바쁜 하루하루지만 대학원을 다니며 장기적인 고민을 하고 있다. 현장에서 얻은 지식에 더해 이론으로 무장한 그가 어떤 통일운동을 벌일지 벌써부터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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