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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1 | 인터뷰 [꿈꾸는 청춘]
동네 노는 언니? 진짜 잘 노는 언니!
인디밴드 휴먼스 보컬 서율
황재근 기자(2013-11-05 15:18:46)

밴드에서 보컬의 역할은 노래에서 끝나지 않는다. 공연 중에는 무대를 종횡무진 누비며 퍼포먼서가 되어야 하고, 막간에는 MC가 되어 세팅시간도 벌고 다음 곡에 어울리는 분위기도 만들어야 한다. 음악을 언어 삼아 말하는 밴드에서 보컬은 무대와 객석을 잇는 통역자이자 대변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디밴드 휴먼스의 보컬 서율은 가장 휴먼스답다. 그러니까 가장 개구지고, 가장 발랄하고, 가장 ‘잘 논다’는 뜻이다.
짧은 머리에 아담한 체구, 소년 같은 옷차림. 무대를 내려온 서율도 평범하진 않지만 무대에 선 서율의 존재감에 비할 바는 아니다. 무대에만 서면 천명 넘는 관객 앞에서도, 농촌의 어르신들 앞에서도 휴먼스의 유쾌한 에너지를 맨 앞에서 쏟아낸다. 객석에서 여러 차례 그를 만나온 팬으로서 그를 만나면 묻고 싶은 게 많았다.

약속시간이 되어 도착한 그에게는 뜻밖에도 동행이 있었다. 휴먼스의 기타리스트인 안태상 씨와 베이시스트인 임사랑 씨. “심심할까봐 같이 왔다”는 그들은 멀찍이 다른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사실은 제가 말을 잘 못할까봐 따라 온 거예요” 그의 솔직한 고백이다. 한 팀으로 다니는 게 익숙한 그들에게 한 사람만 하는 인터뷰는 오히려 어색한일일 터이다. 그렇기에 더욱 궁금했다. 휴먼스의 보컬 서율 뿐 아니라, 이제 막 계란한판을 채운 청년, 먹고 살 고민을 하는 전업음악인 서율의 이야기가 말이다.

댄스 소녀, 락커가 되다
어릴 적 그는 운동부였다. 초등학교 때부터 배구를 시작해 중학교에 진학해서도 운동을 계속했다. 더 이상 자라지 않는 키 때문에 운동을 그만두게 됐을 때, 그가 찾은 것은 바로 댄스였다. 성인이 돼서도 밴드를 하는 경우, 어릴 적부터 락키드였을 거라 짐작하는 것은 합리적인 추론이다. 적어도 스쿨밴드로 시작했으리라 생각하는 게 당연하지 않을까?
“밴드요? 어릴 때는 별로 안 좋아했어요. 학생들이 행사나 축제 같은데서 공연을 하면 댄스팀 라이벌이 락밴드잖아요. 걔들 땜에 치이는 느낌이 들어서 싫었죠.” 그에게 춤은 단순히 학창시절 취미활동 이상이었다. 댄스동아리로 전국대회에 출전해 문화부장관상을 타기도 했다. 그러나 부모님은 그가 춤을 추는 걸 달갑게 보진 않으셨단다. 그럴 만하다고 생각했다.
“언제까지 춤을 출거냐고 하셨죠. 춤은 생명이 짧다고. 음악을 하라고 하셨어요.” 또 한 번 합리적인 예상을 빗나가는 답변이다. “부모님도 음악을 하셨거든요. 지금도 계속 활동을 하고 계시고요. 어릴 때부터 어깨너머로 부모님이 음악 하는 걸 지켜봤어요.”
하지만 부모님의 권유에도 바로 진로를 바꾸진 않았다. 그럴만한 나이다. 그에게 전환점이 찾아온 것은 스무 살 때였다. 전주시내의 쇼핑몰에서 댄스·노래대회가 열렸다. 재밌을 것 같아 댄스대회에 참가를 신청했다. 그런데 그가 자리를 비운사이 후배가 노래대회에도 그의 이름을 넣었다. “원래 노래하는 걸 좋아하긴 했어요. 그 때는 다 그렇게 놀잖아요. 친구들 만나서 밥 먹고, 커피숍 갔다가 노래방 가는 게 일과였어요. 노래방 가면 발라드도 하고 트로트도 하고 신나게 불렀죠. 그걸 아는 후배가 장난삼아 노래대회를 신청했던 거예요.”
졸지에 두 부문 모두에 출전한 그는 가진 끼를 모두 발휘했다. 대회가 끝난 후 생각지 못한 연락이 왔다. 밴드의 보컬이 되어달라는 제안이었다. “전주여고에서 밴드를 하던 친구들이 졸업한 후에도 밴드를 계속하려고 보컬을 찾다가 제가 대회에서 노래하는 걸 좋게 봤나 봐요. 그때부터 댄스와 노래를 병행하게 됐죠.” 여성밴드 롤리폴리의 탄생이었다.

‘우리’가 아니면 안돼
일종의 부업으로 시작한 밴드였다. 음악도 좋지만 좋은 사람들과 어울려 노는 게 더 좋았다. “저희 행사를 잡아주는 일종의 기획사 사장님이 있었어요. 그 때 행사를 많이 다녔죠. 자작곡보다는 카피곡을 중심으로 공연을 했어요. 무대에서는 재미있게 놀았죠. 그런데 연습 때는 제가 멤버들 말을 잘 안 들었어요. 지각도 하고 제멋대로였죠.” 롤리폴리의 활동이 활발해지고, 함께 춤을 추던 이들이 하나 둘 떠나가면서 그도 점차 밴드활동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밴드를 업으로 할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멤버들과 호흡이 맞아가고 무대에 익숙해지면서 고민이 시작됐다. 부모님처럼 음악을 계속해야 할까. 그가 점차 진지하게 자신의 미래를 그려갈 때 쯤, 3년간의 활동을 끝으로 롤리폴리는 흩어졌다. 각자의 길을 찾아가는 멤버들을 붙잡을 수는 없었다. 다만 한 가지, 언젠가 반드시 다시 한 번 이 사람들과 음악을 하겠다고 함께 다짐했다.
롤리폴리 활동을 중단한 후, 아르바이트치고는 제법 벌이가 괜찮았던 댄스강사를 하면서 아버지의 라이브카페에서 일을 거들었다. 거기서 그는 인생의 두 번째 전환점을 만났다. 퓨전그룹 오감도의 리더 안태상 씨가 그를 찾아온 것이다. 초면은 아니었다. 음악을 하는 그의 아버지와 잘 아는 사이였던 안태상 씨는 전에도 만난 적이 있었다. “그렇다고 친한 사이는 아니었어요. 그냥 아는 삼촌? 그런데 같이 음악을 해보자고 하시더라고요.” 후에 듣기로 안태상 씨는 롤리폴리 시절부터 그를 지켜봐왔다고 한다. “사실 저희가 다른 밴드들 사이에서 좋은 말만 들었던 건 아니었어요. 같이 어울려 다니긴 했지만 자작곡도 별로 없이 행사만 많이 뛰는 게 좋아 보이지 않았던 것 같아요.” 하지만 안태상 씨는 다르게 봤다. 당장의 모습보다는 미래의 가능성을 더 크게 생각한 것이다. “어릴 때부터 부모님을 통해 자연스럽게 음악을 접해왔고, 춤을 추면서 리듬감도 키웠고, 큰 무대에도 익숙했다. 모든 게 갖춰진 사람이라고 봤다”는 게 안태상 씨의 설명이다.
제안을 받자마자 흔쾌히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다시 음악을 한다면 롤리폴리 멤버들과 함께하리라 다짐해왔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1년여 간의 은근한 설득 끝에 그는 마음을 열었다. 단, 조건이 있었다. 롤리폴리 멤버들도 함께 해야 한다는 것. 안태상 씨도 찬성이었다. 그때부터 그는 각자의 길을 걷고 있던 멤버들을 불러들였다. 그게 지난 2009년의 일이다. 다시 모인 멤버들은 새로운 팀에 휴먼스라는 이름을 붙였다. 음악도 음악이지만 사람이 먼저라는 뜻에서다. 사람향기가 나는 음악을 하자는 게 이들의 목표다. 해체와 탈퇴가 흔하디 흔한 인디밴드의 세계에서, ‘우리가 아니면 안된다’는 생각으로 다시 함께하게 된 이들의 색깔이 잘 담긴 이름이다.

실전으로 단련하다
휴먼스를 처음 접한 이라면 누구나 이 어색한 조합에 호기심을 느낄 것이다. 세 명의 젊은 여성과 한명의 베테랑 기타리스트, 장발의 남성 한명과 짧은 머리의 여성 둘, 성별과 연령에 대한 선입관을 누군가 일부러 뒤집은 듯한 팀이다. 도무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조합이지만 무대에서 만담하듯 멘트를 하는 걸 보면 이렇게 죽이 잘 맞는 팀도 없다. 보컬 서율과 키보드와 기타를 맡고 있는 장혜성, 베이스기타 임사랑까지 세 명의 여성은 모두 롤리폴리 시절부터 함께 해온 멤버다. 2집 앨범 녹음 후 오랫동안 함께해온 드러머 김성하가 빠져서 조금 허전해졌지만, 서율 씨가 드럼을 겸하며 그 아쉬움을 메우고 있다. 일단 밖에서 보기에는 연령이나 성별 모두 이질적인 안태상 씨가 융화되기 어려울 것 같아 보인다. 서율 씨는 “그건 편견”이라고 단칼에 자른다. “겉보기와 다르게 전혀 어렵지 않은 사람이에요. 삼촌처럼 챙겨주시고, 선생님 역할도 해주시죠.” 그렇다고 안태상 씨가 권위를 내세워 다른 멤버들을 이끌려했다면 절대로 팀이 오래갈 수 없었을 것이다. 군기반장은 맞언니 서율 씨의 몫이다.
“사실 우리들끼리 장난을 치다보면 조금 지나치다 싶을 때가 있어요. 그때는 제가 나서서 제지를 하죠.” 운동부 시절의 감이 남아서일까? 함께 장난칠 땐 가장 개구지다가도 ‘안돼’하면 꼼짝없이 말을 듣게 만드는 카리스마가 있다는 게 임사랑 씨의 증언이다.
요즘 휴먼스는 누가 뭐래도 전북에서 가장 바쁜 밴드다. 연습실의 달력에는 주말마다 공연일정이 빼곡하다. 지역 축제부터 길거리 공연, 카페 공연에 클럽 공연까지 영역도 다양하다. 전북에만 머물러 있는 것도 아니다. 서울 홍대, 강원도 정선, 동두천, 포천까지 전국 팔도를 누비고 다닌다. “바쁜 철에 바짝 뛰어야 겨울을 난다”는 게 서율 씨의 설명이다. 그래도 바쁜 철에 바쁠 수 있다는 건 그만큼 찾는 이가 많다는 뜻이다.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었다. 인지도가 낮았던 초창기에는 불러주는 곳이 많지 않았다. “그때가 제게는 첫 번째 고비였던 것 같아요. 다른 일을 다 끊고 밴드에만 전념하다보니까 한동안은 수입이 전혀 없었어요. 그래서 안태상 씨한테 아르바이트를 하겠다고 말했던 적이 있어요. 그 때 그러시더라고요. 자기가 더 도움을 줄 테니, 다른 일은 하지 말라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그는 부업을 하지 않았다. 지역의 다른 인디밴드 멤버들이 강사나 음향엔지니어, 공연기획사 등 음악관련 일을 하고 있는 것과 대비된다. 얼마 후에는 임사랑 씨도 ‘전업 밴드인’의 대열에 합류했다. 다른 일로 메울 수 없는 수입을 확보하기 위해 더 많은 공연을 뛰었다. 그 과정이 그들을 더 단련시켰다. 어떤 무대에서든, 어떤 관객을 상대로든 휴먼스 만의 무대를 펼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은 것이다.
“지금도 어떤 무대든 처음 설 때는 떨려요. 그런데 공연을 시작하면서 조금씩 떨림이 잦아들고 자신감이 생기죠. ‘쟤들 뭐야?’ 이런 공격적이고 경계하는 태도의 관객들을 상대할 때는 절대 지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으로 공연을 해요. 어르신들이 많은 무대에서는 재롱잔치를 한다는 기분으로 하고요.”
무대에 익숙해질 무렵 다시 고비가 찾아왔다. “2~3년 전쯤 목이 완전히 쉬어서 소리가 거의 나오지 않았을 때가 있었어요. 노래를 해야 하는데 소리가 안 나오니까 너무 괴로웠죠. 고민을 많이 했어요. 그때도 안태상 씨가 힘을 줬죠. 다 그런 거라고. 그렇게 단련해서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진다고. 그 이후로도 두 세 번 목이 고장 났는데, 이제는 익숙해졌어요. 덕분에 평상시 목소리도 좀 더 허스키해졌고요.”

오늘도 놀자! 오늘도 잘 놀았다!
지난 3월, 1집을 발매한 지 3년 만에 휴먼스 2집 ‘Wake up’이 세상의 빛을 보았다. “1집이 안태상 씨의 색이 많이 들어간 앨범이라면 2집은 휴먼스의 색이 나온 앨범”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모든 멤버가 작사·작곡에 참여했다. 곡마다 작사 작곡자의 이름이 들어가 있지만 사실상의 공동작업물이라고. “누가 멜로디를 가져오면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이 의견을 말하죠. 여기는 이렇게 가면 좋겠는데? 저희는 그런 부분에서 큰 고집을 피우지 않고 좋은 의견을 수용하는 편이에요.” 솔직히 말하고, 인정할 건 인정하는 태도가 한 팀으로 오래갈 수 있는 비결이다.
앞으로의 바람을 물었다. “저는 무대에서는 괜찮은데 녹음실에서는 너무 떨어요. 녹음실에서 좀 안 떨었으면 좋겠어요.” 이번에도 생각지 못한 답변이다. 당황이 가시기 전에 그의 바람이 이어졌다. “그리고 시작했으면 탑이 돼야죠. 당연히 전국에서 탑!”
공연 전 휴먼스의 구호는, ‘오늘도 놀자’, 공연을 마치고는 ‘오늘도 잘 놀았다’란다. 어릴 적부터 짧은 머리에, 보이시한 스타일, 학창시절 오토바이를 타다 크게 다치기도 했다는 걸 보면, 구체적으로 묻지 않아도 좀 노는 언니였을 그가 상상이 간다.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훨씬 잘 노는 언니가 된 셈이다. 이렇게 스케일을 키워간다면 아마도 머지않아 더 큰 무대에서 노는 그를 볼 수 있지 않을까? 그 날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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