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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 | 인터뷰 [아름다운 당신]
꾀목 쓰지않고 민낯 두려워하지 않는다
소리꾼 왕기석
이세영 편집팀장(2014-10-06 13:22:06)


진중한 소리와 다양한 배역의 내면 연기를 잘 소화해 내는 소리꾼으로 평가돼 온 소리꾼 왕기석. 고향을 내려온 지 1년여 동안 시립정읍사국악단 단장으로, 마당창극으로 소리없이 지역무대에서 주목을 받는 중견 소리꾼이 됐다.

마당창극이 벌어지는 소리문화관에서 만난 그의 이야기는 거침이 없었다. 너무 적나라하게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에도 “뭇매를 맞아도 옳은 일이라면 해야 한다”며 쓴소리가 계속됐다. 우리 소리의 제대로 된 평가를 위해서라면 그는 고향땅에서 이단아가 돼도 좋다고 했다. 그리고 인터뷰 끝에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어서 속이 후련하다”고 했다. 그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으며 자신의 소리 길을 찾아 가는 그의 파격적인 모습을 볼 수 있는 만남이었다.



삼형제가 있어 든든했던 시절


그의 소리 인생은 국립창극단 단원이었던 큰형에게 놀러가면서 시작됐다. 남해성 선생은 “목구성 좀 들어보자”며 그에게 소리를 청했다. 그는 남해성 선생의 제자가 됐고 국립창극단의 연수단원이 됐다. 그의 나이 열여덟이었다. “형들에게 들은풍월로, 사랑가를 불렀지만 처음 소리를 해보는 거였어요. 삼형제가 모두 소리를 할 필요가 있겠느냐는 어른들의 말도 있었고, 소리를 한다는 게 어려운 일이라는 걸 형들을 보면서 느꼈기 때문에 소리할 생각도 없었지요.”

하지만 얼떨결에 ‘길거리 캐스팅’이 된 그는 그렇게 소리 길에 접어들었다. 그렇다고 그의 삶이 달라진 것은 없었다. 초등학교만 마치고 서울에 올라가 인쇄공부터 군고구마장사, 취로사업을 하며 살았던 그는 소리를 배우면서도 같은 일들을 해야 했다. 오히려 소리를 배우며 일을 해야 했기에 삶은 더 힘이 들었다. 두 형이 라면 하나를 세조각 내서 먹으며 소리공부를 했으니 어려움이 있을 것을 알았지만 막상 그에게 닥친 시련은 보던 것과 달랐다. 

힘이 되었던 것은 같은 길을 가는 형제들이었다. 힘든 삶 속에서도 소리를 배우며 검정고시로 중고등학교를 마치고, 대학입학시험을 치렀던 데는 기창, 기석 형의 든든함이 있었다. 동생들에 치여 빛을 보지 못하고 먼저 간 큰 형에게 항상 죄스러운 마음이 큰 것도 이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그 어려운 시기를 형제들과 함께 잘 이겨냈어요. 그래도 가난으로 막막했던 시절을 온 몸으로 이겨냈던 것이 지금의 밑거름이 됐다고 생각해요. 잘하는 소리는 아니지만, 나름의 한과 그늘이 있는 소리를 하는 것도 그 때문일 겁니다. 어떨 때는 나 자신에게 ‘너 참 대단한 놈이야’하고 추임새를 넣곤 해요. ”

스승의 덕으로 국립창극단 연수단원이 됐던 것도 소리를 하는 즐거움이었다. 창극단에서 성우향, 정권진, 박봉술, 정광술, 김소희, 오정숙 등 당대의 대 명창들에게 소리를 배울 수 있던 것은 그에게 큰 행운이었다. 수궁가와 심청가를 배운 남해성 선생이 그의 뿌리라면, 이들 명창들을 통해 다양한 소리의 맛을 배울 수 있었다. 그의 연기와 소리가 풍성할 수 있었던 것도 이 때 여러 명창의 소리를 배운 덕분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그렇게 3년여가 지난 1983년 그는 국립창극단의 정단원이 됐다.



배우가 아닌 소리꾼이 되려는 노력


33년의 창극단생활은 그를 소리꾼으로 배우로 성장시켰다. 30여회가 넘는 주인공으로 열연을 했지만, 여전히 그는 명창으로 대접을 받지 못했다. 주변에서 “창극 소리한다”는 말을 할 때마다 가슴이 아팠다. “창극을 하고 있지만 소리꾼으로, 명창으로 대접받고 싶은데 그런 대접을 해주지 않았어요. 내가 앞으로 해야 할 것은 소리이니 소리꾼으로 인정받아야 겠다는 생각을 했죠. 완창무대를 올리고 전주대사습에도 출전하게 된 이유랍니다.”

결국 실력으로 입증해야 할 일이었다. 소리를 검증받을 무대에 끊임없이 서기 시작했다. 전주대사습 첫 도전에 제자뻘 후배에게 쓴잔을 마시기도 했지만 이듬해인 2005년 판소리부 장원을 차지했고 30여회의 완창무대에 섰다. 해외에서 완창무대를 열기도 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안 알아주니 외국에서 치고 들어오자”는 치기어린 생각으로 시작한 해외공연에서 그는 판소리의 우수함과 소리꾼의 자부심을 한껏 배우고 왔다. “판소리를 그대로 전해주기 위해 마이크를 쓰지 않을 작은 극장을 잡아서 공연을 했어요. 자막을 보며 공연을 보는데도, 5시간이 넘는 공연에 20여 분간 기립박수를 들었어요. 너무 큰 감동이었어요. 제자들에게도 좁은 땅덩이에서 도토리 키 재기 하지 말고 유럽에 가서 공연하고 기립박수를 받아보라고 권하고 다녔죠.”



전통에 갇힌 소리의 틀을 깨는 일


서울에서 자리를 잡아가던 그가 지난해 돌연 국립창극단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의 행보에 의심의 눈초리와 소문이 무성했다. 정작 그는 집안의 가장으로 정년이 보장되는 창극단을 버리고 ‘백수’로 살아갈 수 있을지가 고민이었다. 하지만 모든 걸 접고 고향을 밟은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포함돼 있었다. 일단, 정년까지 자리를 지키는 것이 인생에 큰 의미가 없어보였다. 더욱이 순환율이 10%도 채 안되는 국공립예술단체에서 더 뛰어난 후배들을 위해 자리를 내어주는 선례를 남기고 싶었다. 엎친 데 덮친 격일까, 노 전 대통령 노재에서 상여소리를 하고 추모앨범에 노래를 실으면서 예술인 블랙리스트에 오른 것도 그가 결심을 굳히는 계기가 됐다. “나이 들어 고향에 내려가면 갈 데 없어 내려왔다는 소리를 들을 거 아녜요? 할 수 있는 일, 할 힘이 있을 때 내려가자고 했어요. 지금은 신간이 편해요. 사람들로 받았던 스트레스가 없으니 아주 좋습니다.”

고향에 내려온 그는 그동안 그가 생각했던 소리 인생을 살기 시작했다. 소리꾼이 쉽게 버티지 못하는 전주에서 한판 재대로 놀아보자는 각오로 내러온 길이니 만큼 해야 할 일도, 하고 싶은 일도 많았다. 시립정읍사국악단 단장으로 국악단을 새롭게 하는데 공을 들이고, 판소리의 재미를 되찾기 위한 시도도 이어졌다. 

그래서일까, 판소리에 대한 그의 시각은 상당히 비판적이었다. 판소리가 일부 마니아층이나 즐기는, 따분하고 재미없는 것으로 인식되는 것을 바꿔 판소리의 재미를 들려줄 수 있는 방안을 찾는 것이 시급하다고 그는 생각한다. 이를 위해 그는 기존의 틀을 깰 것을 요구한다. 유파는 물론이고 다섯바탕을 깨 우리 시대에 맞는 판소리를 만들 필요성을 그는 제기한다. “판소리의 바디와 재는 몇 백 년 전부터 오롯이 내려온 것이 아니라 그 시대에 맞게 좋은 것을 가져다 붙여서 만들어진 것이잖아요. 보존의 차원에서는 다섯바탕이 그대로 이어져야겠지만 그것을 기본으로 해서 창작품들을 만드는 노력이 필요할 것입니다.”

이러한 경향에는 자신만의 소리를 잇게 하는 선생들의 잘못도 있다고 그는 이야기한다. 자신의 소리만을 이어야 한다는 엄한 훈육이 소리꾼이 스스로 틀에 갇히게 만든다는 것이다. “악기는 새로운 유파들이 생겨나는데, 판소리는 새로운 것이 없잖아요. 윗대 선생님들의 빛나는 업적은 그대로 인정해요. 하지만 유파에 얽매이지 않고 소리로 소리꾼을 평가해야 하지 않을까요? 조금만 틀려도 내 소리가 아니라고 하는 선생들의 가르침이 젊은 소리꾼들을 옭죄고 있는 것 같아요. 모든 것을 통재하려고 하니 새로운 소리가 안나오는 거죠.”



다양한 음악이 울리는 소리판에서 놀고 싶다 


우리 고유의 판을 잃어버린 판소리에 대한 쓴소리도 이어졌다. 서구식 극장형식이 들어와 무대와 객석이 유리됐다는 것이 그의 견해다. 따라서 그는 판소리나 창극이 야외로 나와 마당이나 대청마루에서 펼쳐졌던 우리 고유의 판으로 돌아와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기계에 의존하는 판소리에 대해서도 그는 부정적이다. 마이크를 사용하면서 최선의 노력을 다하지 않고 ‘꾀목’을 쓴다는 것. 결국 이런 ‘꾀목’의 소리는 진실성을 전달하지 못하게 된다고 생각한다. 소리를 잘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겠지만 땀 흘리고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이면 관객들은 감동할 것이기 때문이다. “소리꾼이 자신의 민낯을 드러내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한판 노는 장소에서 소리를 해야 해요. 귀명창들의 귀가 무서워서 큰 무대의 마이크 뒤로 숨어서는 안 되죠. 과감하게 무대를 벗어나 청중들에게 다양한 소리를 접할 기회를 주고 소리꾼은 그저 소리를 즐기면 됩니다. 전주가 전통의 도시라면 다양한 유의 음악이 울리는 곳이 돼야 하지 않겠어요?”  

소리에 대한 ‘이단적’ 생각은 제자들에게도 이어지고 있었다. 그는 소리의 기술보다 선생의 혼을 배우려고 노력하라고 가르친다. 또 나밖에 모르고 남을 인정하지 않으면 소리꾼으로서 자격이 없다거나 인간의 됨됨이가 중요하다, 자기 일을 즐길 줄 알아야 한다는 가르침을 소리 가르치는 것보다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자신의 소리에 대해서는 어떨까. 그는 자신의 소리에 대해서는 아직 부족함이 많다고 고백한다. 소리의 맛을 알아갈수록 소리는 어려워지니, 소리와 연기는 여전히 초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죽을 때까지 해도 모자라는 것이 소리니 득음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 그저 노력하고 노력할 뿐이라고 했다.

소리꾼이 되려는 노력과 함께 그는 새로운 시도와 파격을 계속 이어나갈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왕기석창극단을 창단했다. 하고 싶었던 작업을 마음껏 하고, 자신이 죽더라도 제자들이 놀 판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에서다. 그 시작으로 ‘가족창극’을 준비 중이라고 했다. 다섯바탕도 재미를 더해 올릴 생각도 가지고 있다. 이름을 건 만큼,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걸 생각이다. 

“내 길이 옳은지는 모르겠어요. 하지만 제가 가는 길이 자극이 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왕성하게 활동하고, 틀을 깨는 사람의 역할을 하고 싶습니다. 제 한계가 있겠지만 이런 일들을 하려고 고향에 내려왔으니 제가 할 수 있는 역할에 최선을 다해야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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