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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1 | 인터뷰 [제 57회 백제기행]
사라진 흔적을 찾아 떠난 마지막 여행
원도원(문화저널 편집장)(2015-05-26 16:13:19)


 백제, 광주 임동확 시인의 표현법을 빌린다면 백제는 '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않는'나라이다. 백제는 아직도 미궁속에 빠져있다. 백제는 백제라는 이름으로 엄연히 존재한 백제라는 이름으로 엄연히 존재한 나라였지만, 백제 사람들은 그 나라의 마지막 망해가는 길에서조차 그 나라를 실감하지 못했던 것이다. 백제는 처연하게 무너져 갔지만 그들의 문화는 끈질기게 살아남아왔다. 백제는 남한땅 모두를 그들의 땅으로 삼았었지만 지금은 그 어디에서도 그 흔적을 온전하게 확인해 주지 않는다. 그래서 백제는 아직도 '존재하면서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백제의 사라진 흔적을 찾아 떠나는 마지막 여행이었다. 망해버린 나라의 흔적을 찾아 나서는 여행답게 그 출발도 위태로웠다. 때 아닌 겨울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그 어느 때보다 적은 수의 참가자들이 드문드문 모여들었다. 백제기행은 때때로 이렇게 변덕을 부리는 것이다. 밀려드는 참가신청을 주체할 수 없었던 여느때의 기행들에 비해서 절대로 빠지는 기획이 아닌데.

 버스가 전군가도에 접어들면서 부슬부슬 내리던 겨울비가 현저하게 세력을 약화시키고 있다. 도로가 맨살을 드러내면서 햇살도 간간히 길을 비추고 있지만 아직도 을씨년스럽기만 하다. 버스는 익산을 거쳐 군산으로 접어들고 있다. 이제 참가자들의 잠을 깨워야 한다. 백제기행의 전통 관례에 따라서 뒷줄 오른쪽에서부터! 문화저널 곤충이야기의 주인공 김태홍 선생님과 그 똘똘한 쌍둥이 명식이와 재식이가 왔구나. 저런! 명식이는 감기가 들어서 연신 콜록이지만 감기를 이기는 투혼으로 무장했구나. 순창의 얼굴 예쁘고 마음 착한 효녀씨도 왔고, 정란씨는 딸을 데리고 오고 싶었지만 아직 시집을 못가서 대신 조카를 데리고 왔대나. 설예원의 이림님도 보이고. 문화저널덕에 먹고 산다는 창원의 송사장님도 걸쭉한 인사를 건넨다. 오늘밤을 기대 하시라나. 중국 연변대학에서 물설고 낯설은 조국땅에 연수왔다는 김영호씨도 진지한 인사말씀을 올린다. 비록 숫자는 적지만 규모는 거의 세계적인 것이다.

 한바탕 수인사가 돌자 분위기는 제법 을씨년스러움을 걷어낸다. 모두들 모처럼의 여행에 대한 기대가 단단하다. 이렇게 백제기행은 시작되는 것이다. 이번 기행의 강사이자 올 한해 백제기행의 참모장인 윤덕향 선생님의 쌉싸란 첫 강의가 짧게 끝날때쯤 버스는 대야를 지나 첫번째 목적지인 금강 하구둑에 다다른다. 이제 비로소 내 마음도 바빠진다.

 금강 하구둑. 이번 백제기행의 공식지명은 진포 하구언이다. 지금은 관광지로 변해버린 이곳에 버스를 부리고 내려서니 겨울바람이 매섭기만 하다. 저기 멀리서 우리를 향해 손짓하는 어르신이 군산의 터줏대감인 이병훈 선생님이다. 무척 오랜만에 뵙는 모습인데 눈매는 더욱 서글서글하다. 이곳은 신라가 이른바 삼국통일(통일이라고!)을 위해 끌어들인 당나ㅏ의 소정방이 내륙에 들어선 길목이다. 이병훈 선생은 진지하게 이곳의 역사뿐 아니라 군산의 역사까지를 자상하게 설명해 주신다. 고려때는 최무선이 화약을 이용해서 이곳에서 왜군의 500여척 배를 부수며 대첩을 거둔 곳이고, 여기서 최무선에게 한방 크게 얻어맞은 왜군은 다시 황산으로 쫓겨들어가 이성계에게 결정타를 맞았다. 그러니까 우리가 익히 아는 전설적인 황산대첩의 비결은 바로 이곳 진포에서의 승리에 있었던 셈이다. 역사속에는 늘 이런 비밀 아닌 비밀이 숨겨져 있는 것이다. 그 진포가 이제는 쌀의 집산지에서 수탈의 전진기지로 다시 대륙진출의 기지로 변모해 가고 있다. 그러나 거기에는 또 어떤 역사의 비밀을 숨겨둘까.

 추위에 달달떠는 참가자들의 얼굴색이 변해간다. 간신히 선생님의 말허리를 자르고 버스는 다시 오성산을 스쳐가면서 군산대 박물관으로 향한다. 버스 안에서 들려오는 선생의 말씀이 허허롭기만 하다. 군산대 박물관을 들러 백제의 유적들을 확인하고 군산시내에서 저녁식사를 마치면서 백제기행은 분위기가 뜨거워지기 시작한다. 숫자가 적으니까 금새 친구가 되는 것이다. 이제 우리의 여정은 다시 남쪽으로 향한다. 다시 변산을 거쳐 원광대 임해수련원에 도착.

 해가 짧아 벌써 사방이 칠흑같지만 백제기행은 바닷가에서 점점 무르익고 있다. 모두 한방에 모여 앉으니 말 그대로 가족같은 분위기. 이번 기행은 올 한해 백제의 역사와 문화를 찾아 떠난 백제기행을 결산하는 자리인 셈이다. 윤덕향 선생님의 강의도 가족같은 분위기에서 스스럼이 없다.

 백제는 왜 망했는가, 왜 신라와 당나라는 백제를 무너뜨리려 했는가. 백제의 멸망보다도 훨씬 더 극적으로 전개되었던 백제부흥운동은 어떻게 실패해 갔는가. 이제 낯이 익어 발갛게 상기된 얼굴들 모두가 천년의 세월을 건너 백제땅 한 가운데로 들어섰다.

 백제의 고도는 어디일까. 우리가 감회에 젖어 둘러보곤 했던 공주와 부여가 백제의 도읍으로 자리잡았던 것은 불과 이백여년에 불과했다. 그에 비한다면 서울은 무려 사백여년 동안 백제의 왕성으로 자리를 굳히고 있었다. 한 나라의 멸망은 정치사뿐만 아니라 문화의 종말까지를 의미하는 법이다. 그러나 백제의 문화는 나라의 운명과는 관계없이 멸망의 시점에서도 성장하는 문화로서의 자생력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도 백제는 결국 무너졌고 역사는 단절되었다. 삼국의 정치적 위상이나 군사력을 단순 비교해 본다해도 백제의 패망은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계백이 이끈 오천 결사대의 전설적인 항전을 제외한다면 이렇다 할 싸움 한 번 변변히 해보지 못한채 왜 백제는 무너져야 했을까.

 역사는 두 개의 시간성을 갖는다고 했던가. 역사는 그 역사적 사실과 그것에 대한 해석이라는 이중의 시간성을 갖는다. '의자왕이 술과 미인을 옆에 두고 성충을 내던지고 질탕하게 놀았기에' 백제는 멸망했는가. 궁궐을 새로 짓고 미륵사 창건이라는 대형 불사로 인한 국력의 피폐가 원인이 되었을까. 또 백제에는 계백의 오천 결사대를 빼고는 군사도 없었던가.

 이제 그 '해석'의 강을 건너 '사실'의 바다에 들어가 보자 우리가 배운대로라면 의자왕은 만소에 씻을 수 없는 오명을 안아야 하지만 의자왕에 대한 신뢰할 만한 평가는 그 반대로도 나온다. 의자왕은 과단성있는 군주였고 뛰어난 책략가였다. 미륵사의 창건은 분명 백제의 경제에 부담이었겠으나 신라는 황룡사를 지으면서 부흥기를 맞기도 했다. 또 잘 알다시피 백제는 광활한 평야와 금의 산지를 지니고 있었으나 그에 비하면 신라는 가난한 나라였다. 백제는 군사적으로도 막강한 나라였다.

 백제부흥운동을 이끈 비운의 장수 흑치상지는 작은 성의성주에 불과했음에도 단 사흘만에 삼만의 군사를 모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문제는 백제를 감싸고 있었던 대외적 조건이 검토될 필요가 있다. 당시 동아시아를 패하고 있으면서도 번번히 고구려에 당하고 있던 당나라는 궁극적으로 고구려를 등뒤에서 치기 위해 백제를 건널 필요가 있었고, 때마침 신라는 백제와의 대야성전투에서 김춘추의 여동생을 잃음으로써 한을 춤고 있었다. 이때 백제는 외교적으로 왜와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었고 당나라는 한강 이남을 두고 고구려와 쟁패하고 있었던 신라와 손잡으면서 자연스럽게 전선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백제는 의자왕이 거둔 일련의 정치군사적 성공으로 국가적으로 고양기에 있었고, 그것은 곧 백제와 의자왕의 자만을 가져왔을 것이다. 그 자만이 어쩌면 국제 정세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는 뼈아픈 실팍으로 이어졌는지도 모를 일이다.

 또 하나의 유력한 설명은 백제의 정치체제에 관한 것이다. 백제는 이른바 8대 가문이라는 지방호족들과 왕족들에 의해서 지배되고 있었다. 신라가 강력한 중앙집권국가를 이루고 있었던데 반해 백제는 지방분권의 정치체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여기에 의자왕이 시도했던 강력한 왕권강화가 귀족집단의 반발을 불러왔고 그것이 곧 국력을 하나로 모으느네 결정적인 장애가 되었다는 것이다. 즉 흑치상지의 부흥운동에 열광적으로 호응했던 백성들이 정작 백제가 망해가는 상황에서는 구국의 결사대로 모여들지 않는 어이없는 상황이 벌어졌던 것이다.

 여기에 왕족 내부의 분열도 한 몫하지 않을 수 없다. 사비성을 지키던 왕자 태는 수성의 과정에서 권력게임에 걸려 스스로 항복하고, 사비성의 어이없는 함락은 웅진의 의자왕과 태자의 무혈항복을 가져왔다. 결국 가장 강력한 적은 바로 내부에 있다는 만고의 진리가 다시 한 번 확인되는 역사였던 것이다.

 내분은 절체절명의 의지로 모여들어야 했던 부흥운동의 내부에서도 발생했다. 아마도 강력한 군대와 힘을 따로 비축해두고 그저 구경하고 있었던 지방호족들에게 이 상황은 백제의 멸망이라기 보다는 의자왕의 몰락쯤으로 여겨졌는지 모를 일이다. 어쨌든 그들과 살아남은 왕족들은 그야말로 화끈한 부흥운동을 벌이지만 결국 이 절절한 부흥운동도 내부에서부터 무너지기 시작했다. 부흥군은 끝내 자신만만했고 실제로 사비성을 강력하게 위협했지만 왕성의 탈환 이후에 벌였어야 할 권력투쟁 끝에 거의 자멸하다시피 무너져갔다.

 내가 늘 문화저널의 보석이라고 주장하는 유선생님의강의는 탄력있고 그 가운데서도 질서정연하다. 이 흥미진진한 백제의 마지막 역사가 마무리 되면서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문제의 주류성으로 흘러간다. 주류성은 부흥운도의 세 거두중 한 사람이었던 풍왕의 거점이었는데, 그곳이 어디인지 분명치 않다는 것이 문제의 시작이다. 이 주류성이 어디인가는 이제 각 지역의 자존심 싸움으로가지 번져있다. 충남서천과 홍성, 연기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가 지금와 있는 부안이 주류성의 위치를 놓고 각축하고 있는 지역들이다. 모두 그럴듯한 근거들을 지니고 있지만 아무래도 가재는 게편인 것이다.

 이야기가 한창 익어가는 도중에 들여온 맥주잔들이 어지럽게 날라다니면서 백제사 강의는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그러나 이어지는 자리에서도 열기는 식을 줄을 모른다. 연변의 김선생은 백제의 분열을 한국사람들의 핏줄에 흐르는 뿌리깊은 분열심리로 훌쩍 뛰어넘는다. 연변에서 지긋지긋하게 보고 당했던 동족들의 야만성에 질렸으리라. 밤은 깊어가고 송사장님은 결국 접속에 성공! 백제의 후예들을 이끌고 마침내 바닷가 횟집으로 진출했다. 아, 그래도 나는 지구를 지켜야지.

 다음날은 해가 훤하게 떴다. 이제 허물없는 정도가 아니라 거의 계모임이 되버린 백제기행은 내소사로 길을 잡았다. 올때마다 느끼는 감정이지만 내소사는 참말 아름다운 절이다. 이건 순전히 나만의 불경한 느낌이지만 여인의 속곳같은 자태가 거기에 있다. 고집스럽게 단청을 안해서 그런가 아니면 뭐눈에 뭐만 보여서 그런가... 내소사는 소정방이 찾았다는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  절이다. 그러나 그것은 전설일 뿐이다. 내소사의 건립연대가 그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개암사와 개암사 뒷산의 성터는 의미있는 곳이다. 개암사를 마주보고 서 있는 식당에서 점심을 먹으면서 우리는 뜻밖의 손님을 맞았다. 주류성을 바로 찾는데 거의 한 평생을 바친 부안의 향토사가 강성채 선생이다. 주류성의흔적을 직접 확인하고 오라는 강선생님의 강권을 받아들여 우리는 개암사 뒷산길로 아직은 '그들만의 주류성'에 오른다. 산길은 의외로 험했다. 그렇지, 주류성이면 이쯤은 되어야겠지.

 산 꼭대기에 못 미쳐 넓은 공터가 나타나더니 바로 거기에 널찍한 굴이 나란히 있다. 이곳에서 부흥운동의 쓰리스타 가운데 한 사람인 복신이 거처 했던 굴이라고 부안은 주장하고 있다. 어쨌든 우리는 복신굴을 보았고 그곳에서 사진도 한 장 찍었다. 무려 세시간여에 걸친 산성답사와 산행으로 백제기행은 이제 백제탐험이 되고 있었다. 결국 대부분은 차에 오르자마자 지쳐 떨어졌고 마침내 계화도는 다음 기회에 각자 다녀오기로 약속해야 했다.

 

 1박2일. 백제기행은 끝났고 더불어서 올해 경주에서 시작한 백제사 탐구도 같이 끝났다. 비는 그쳤고 날씨가 이렇게 좋은데도 난 별로 편안하지가 않다. 겨울바람이 매섭다. 인생을 살다보면 바람이 부는 때가 있는 법이다. 그리고 그 바람은 나뭇잎을 흔들기도 하고 가지를 꺽어놓기도 한다. 지금 내가 그렇다. 백제가 너무 슬퍼서는 아니고 그냥 살다보면 그런때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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