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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6 | 인터뷰 [인터뷰]
대숲은 말이 없어도 여전히 '리얼'하다
문동환 객원기자(2015-06-01 11:42:35)

인터뷰를 부탁하기 위해 연락했다. 작업실이 따로 있지만 혼자 틀어 박혀서 그림 그리는 곳이 있으니 그리 오라고 했다. 여기저기 알리지 않고 그림에만 몰두하겠다는 뜻일 테니 모처라고 해둘 수밖에 없다. 모처에 들어서자마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그림이었다. 이쪽부터 저쪽 끝까지, 족히 10미터는 됨직한 큰 그림이었다.

화폭에는 붉은 대숲과 바람만이 가득했다
핏빛이라고 해도 곧이들을 정도로 붉었다
한 가을 단풍도 이만하지는 못할 것이다

 

이기홍의 대숲을 처음 본 건 오륙년 전이었다. 좋은 전시가 있으니 같이 가자는 아내의 권유에 못 이겨 겨우 발길을 옮겼다. 그림을 대하는 태도가 좋을 리 없었다. 무심한 시선으로 그림을 지나치다가 갤러리 중앙에서 진초록 대숲과 마주쳤다. 바람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무성한 댓잎들이 바람에 몸을 부대끼며 사사삭 거리는 소리. 대숲을 보고 있으면, 나는 대숲 한 가운데에 서 있었다. 동선을 따라 다음 그림으로 넘어가지 못하고 가까이에서, 또 멀리에서 대숲 보기를 반복했다. 왜 대나무일까. 그는 대나무 숲에 들어가서 올려다보면 눈을 자극하는 빛과 색의 또렷한 콘트라스트(contrast)를 표현한 거라고 했다. 또 하나 있다. 동학농민혁명. 그는 예전부터 동학농민혁명을 소재로 한 작업을 해왔다. 동학농민혁명에서 대나무는 상징적이다. 동학농민군이 관군에 맞서 싸우기 위해 손에 쥔 죽창. 째내기 좋아하는 먹물처럼 번지르르하게 말하진 않았지만, 그는 분명 동학이 대숲의 모티프라고 했다. 

 

모처에는 대숲 그림이 많았다. 보랏빛 대숲도 눈에 띄었다. 얼마 전 선후배 작가 세 명과 함께 참여한 중국 상해 전시에도 대숲을 들고 갔다. 모처에 있는 붉은 대숲 큰 그림만 빼고 모두 팔고 돌아왔다. 개선장군처럼 의기양양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오히려 걱정이었다.

 

사람들이 좋다고 하고 나도 그럭저럭 맘에 드니까 계속 대숲만 그리고 있네. 이젠 보라색 대숲까지 나왔으니까. 이게 매너리즘으로 빠질 수 있어서 걱정허고 있는 중이야. 그래서 다른 소재를 찾아보려고 하고 있지.

 

담배연기가 눈을 찌르는지 그는 고개를 왼쪽으로 꺾고 한 쪽 눈을 찡그린 채 담배연기를 내뿜고 있었다. 나는 그를 꼬박꼬박 선생님으로 부르고 있었는데, 그렇게 예의바른 존칭을 붙여 부르는 작가의 자기고백을 듣고 있자니, 나도 담배를 물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하긴, 인터뷰를 하는 내내 우리 둘은 줄창 담배를 펴댔다. 모처의 벽면을 가득 채운 대숲은 숨이 막혔을 것이고, 우리 둘이 자리를 뜬 뒤에는 그 무성한 댓잎을 모조리 떨궈버렸을지도 모른다.

 

아름다운 풍경이 있잖아. 그러면 그게 중요한 건 아니고. 그걸 작가의 시선으로 해석해서 표현하는 게 중요한 거지. 근데 있잖아. 어떤 사람은 저거 보고 단풍 그림 잘 봤다며 인사하는 사람도 있어. 참나... 흐흐흐흐. 근데 그게 잘못은 아니잖아. 내가 뭐라고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본 걸 어쩌겄어.

 

젊을 때는 주먹 쥐고 싸우는 그림을 많이 그렸다. 리얼리즘에 빠져있을 때였다. 리얼리즘이나 예술의 사회참여는 미대 시절 임옥상 교수의 영향이 컸다. 예순을 바라보는 지금은 은유적인 표현을 즐긴다. 리얼리즘의 가치를 내팽개친 것은 아니다. 예술의 사회참여는 여전히 중요한 책무다. 단지 직설적이고 노골적인 화법을 버리고 이미지를 통해 표현하는 화법을 즐길 뿐이다. 미적 감수성과 예술적 조형성 안에서 또아리 틀고 있는 메시지. 메시지를 숨기기 위한 방식이 아니라 메시지의 밀도를 높이기 위한 그만의 어법이다. 그래서 그의 그림은 이즘(ism)이라는 접미사가 없을 뿐, 여전히 리얼(real)하다.

 

쯤에서 그의 예전 작품 「전야」(前夜)를 본 소감을 말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그는 보여줄 게 있다면서 컴퓨터 마우스를 부산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우리 둘을 갈라놓고 있는 옹색한 탁자 맞은편으로 넘어가 구부정한 자세로 노트북 화면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마주하고 내뿜던 담배연기가 이번에는 부딪혀 엉키지 않고 한 방향을 향해 보기 좋게 직진했다. 마우스는 한참 동안 숨을 꼴깍거렸다. 기다리기가 민망해질 때 쯤, 화면을 가리고 있던 담배연기 너머로 「전야」가 눈에 들어왔다. 순간 나는, 공복에 소주 첫 잔을 원샷으로 비우고 나서 내는 소리를 내고 말았다. 부지불식간에 튀어나온 탄성이었다지만 민망할 정도로 경박한 탄성이었다. 최고의 찬사는 가장 경박한 탄성과 동일할 수도 있다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었다. 진심이 변명으로 뒤바뀔 수도 있는 일이었다. 다행히 그는 화면에 손가락을 대가며 그림 이야기 하는 데 몰두해 있었다. 「전야」에 대한 애정이 각별한 것이 분명했다. 어둠과 횃불, 들판과 들판 끄트머리에 솟아 있는 높지 않은 야산. 진군을 앞둔 동학농민혁명군의 결기와 긴장감을 이보다 더 ‘리얼’하게 묘사할 수 있을까 싶었다. 사실적 묘사는 적었지만 그림이 전달해주는 메시지와 이미지는 오히려 더욱 충만해지는 아이러니. 대놓고 말하진 않았지만 그는 「전야」같은 그림을 이기홍 특유의 리얼리즘으로 생각하고 있는 듯 했다.

 

왕성하게 작품활동을 하고 있지만 그는 한 동안 그림 그리는 일에서 떨어져 있었다. 전주도 떠나 있었다. 1990년대 초까지 동문사거리 인근에서 화실을 운영하던 그는 돈 버는 것도 그림 그리는 것도 시원치 않아서 화실 운영을 그만두었다. 이후 중인리에 있는 교회건물로 들어가서 그림 그리는 일에 몰두했다. 하지만 이마저도 채 1년이 가지 않았다. 어느 날 그는 아무런 예고도 없이, 별다른 생각도 없이 갑작스럽게 서울로 갔다.

 

아무 생각도 없이 어느 날, 정말 딱 몸뚱아리만 가지고 서울로 가버렸어. 그림도 다 두고. 지금 생각하면 조금 아쉽지. 그 때 한창 충만해 있을 때 많이 그렸어야 했는데.. 지금은 그 때 못한 거 열심히 하려고 하는 거지.
 
예고가 있든 없든 간에 상경을 한 건 순전히 개인적인 선택이었지만 후배들에게는 못내 미안한 구석이 있다. 상경하기 직전 지역 화가들과 민중미술운동을 이끌었고, 그 동력을 발판삼아 민미협(민족미술인협회) 결성을 추진 중이었다. 그런데 그 와중에 상경을 결행한 것이다. 서울에 올라가서도, 전주로 낙향해서 살고 있는 지금도, 후배들에 대한 미안한 마음은 지우기 힘들다. 그는 미안하다는 말을 두어 번 반복했다. 헛웃음을 섞어가며 하는 말이었지만, 미안하다는 한 마디가 그토록 속 깊게 다가온 적은 처음이었다.

 

서울에서는 다시 화실운영을 시작했다. 제법 규모 있는 화실로 시작했지만 갈수록 졸아들었다. 낯선 타향에서 누구 하나 도와줄 사람도 없었다. 급기야 옥상 위에 물탱크를 떼어 낸 한 평 정도의 공간만 남게 되었다. 집에서 나와 그곳에 누우면 하늘도 보였고, 날아가는 새도 보였다. 서울 생활하면서 아내를 만났고 딸아이도 태어났지만 기초생활수급자를 신청해야 하는 처지로까지 몰리며 궁핍한 생활이 이어졌다. 그러던 중, 후배가 전주로 내려오라며 낙향을 종용했다. 그러더니 어느 날 갑자기 그 후배가 트럭을 끌고 서울로 올라와버렸다. 별 수 없이 부랴부랴 짐을 꾸렸고, 그렇게 17년간의 서울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전주로 내려왔다. 올라갈 때도 예고 없이 올라갔고, 내려올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내가 5년 전 처음 만났던 바로 그 대숲은 그가 전주로 내려와 준비했던 생애 첫 개인전이었던 것이다.

 

작은 키에, 흰머리와 흰 수염, 그리고 왼팔이 없다. 누군가는 그에게 외팔이가 그렇게 그림을 잘 그리면 멀쩡한 사람은 어쩌라는 것이냐며 따졌던 적이 있다. 운전하면서도 핸들 돌리고 담배 피고, 전화도 받고, 할 거 다한다며 용하다고 했다. 하지만 그가 왜 왼팔을 잃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아는 사람이 없다고 했다. 물어서는 안 될 것 같은 문제였는데, 이제는 굳이 물을 필요가 없는 문제가 됐다. 하지만 이것만은 꼭 묻고 싶었다. 왜 봉고차가 핑크색인가.

 

서울서 처음 신차로 구입했는데 전주 내려오자마자 선거하는 데 누가 빌려달라고 하더라고. 근데 그 후보 색깔이 핑크라고 해서 시트지로 열까지 가해서 아주 딱 붙여논 거여. 그래서 떼어내기도 뭐하고 해서 그냥 타고 다니는데 사생활 노출이 많이 되네. 대리운전기사도 기억한다니까. 차암~ 나

 

밤 9시. 모처를 떠나기에 앞서 물었다.

끝으로 형식적인 질문 하나 드릴게요. 작가로서 꿈이 있다면요.

꿈? 화가! 흐흐흐흐. 새벽(강)에 술이나 먹으러 가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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